• 한국문화사
  • 23권 다양한 문화로 본 국가와 국왕
  • 제5장 왕실 행사와 전례 음악
  • 1. 왕실의 행사와 음악
  • 왕과 음악, 정조의 경우
송지원

정조 집권 초반인 1778년(정조 2) 11월 29일의 일이다. 정조는 음악을 관장하는 기관인 장악원의 관리, 악공, 악생을 소집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궁중 음악을 책임지는 모든 음악인과 관리, 그리고 왕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악공, 악생은 각자 자신의 전공 악기를 지참하도록 하였다. 당시 장악원 제조(提調)는 이중호(李重祜)와 김용겸(金用謙)이었고, 세손(世孫) 시절 정조의 스승인 판중추 서명응(徐命膺, 1716∼1787)도 함께하였다. 이들이 모인 장소는 융효문(隆孝門)이었다. 융효문은 정조의 생부인 사도 세자(思悼世子)가 공부하는 정당(正堂)이었던 저승전(儲承殿)의 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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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어진
정조 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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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악공과 악생에게 음악을 연주하도록 명하였다. 먼저 금·종·경·생·소·훈(塤)·지·약(籥)·적(篴)·축·어·부(缶) 등의 아악기로 아악을 연주하도록 하였고, 연주와 함께 일무도 추게 하였다. 아악기의 독주와 합주를 모두 마친 후에는 가야금·거문고·비파·아쟁·해금·당적·태평소(太平簫) 등의 향악기와 당악기를 혹은 독주로, 혹은 합주로 연주할 것을 명하였고, 정조는 이들이 연주하는 음악을 귀 기울여 들었다. 특정 행사도 아닌데 모든 악기를 다 동원하여 직접 연주할 것을 지시하고, 악기 연주를 하나하나 들어보는 일은 조선의 어느 왕도 한 적이 없었다. 실로 의미 깊은 장면이다.

이미 세손 시절부터 악학(樂學)에 대한 연구가 깊었던 정조가 당대의 궁중 음악을 책임지는 음악인과 함께했던 모임은 단순히 음악을 감상하기 위한 자리가 아니었다. 오례 가운데 하나에 속하는, 궁중 의례에서 연주하는 의례 음악을 제대로 연주하고 있는지, 또 그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들의 연주 실력은 어떠한지, 연주할 때 조화가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 악공과 악생의 차이는 무엇인지, 연주자들의 수는 부족하지 않은지 등의 여부를 하나하나 점검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나아가 머지않아 있을 사직 대제의 음악을 위해 단속하는 자리이기도 하였다. 또 정조는 실제 연주를 잘 하려면 음악을 담당하는 관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직책인 전악을 뛰어난 실력의 소유자로 잘 가려서 써야 한다는 당부도 빼놓지 않았다.

이날 현장에서 각 악기가 연주하는 음악을 모두 들어본 정조는 한마디로 이렇게 평하였다. “불성성의(不成聲矣)로다!” 즉, 소리를 이루지 못하였다는 말이다. 정조는 이미 세손 시절에 악학의 기반을 닦았고, 금(琴)의 소리를 좋아하여 항상 금을 곁에 두었을 정도로 이론 실력과 음악적인 귀를 아울러 갖추고 있었다. 정조는 규장각(奎章閣) 학사들에게 장악원이 소장하 고 있는 특종과 편종을 가져다가 그 악기의 제도를 연구하고, 음률을 익히라고 명한 바도 있다. 각종 제사를 지낼 때마다 제대로 연주하지 못하는 음악을 듣고 늘 귀에 거슬렸던 정조였으므로 악공과 악생이 연주하는 음악 실력에 만족할 수 없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궁중의 음악인이 궁중에서 쓰는 음악을 연습하기 위해 모이는 날짜는 며칠 되지 않았다. 한 달이면 고작 여섯 차례에 불과하였다. 궁중 음악인은 이륙회(二六會) 혹은 이륙좌기(二六坐起)라 하여 매 달 2자와 6자가 들어가는 날, 즉 2일, 6일, 12일, 16일, 22일, 26일에 모여 정기 연습을 하였다. 궁중에서 연주하는 음악이 아무리 쉬운 것이라 가정하더라도 한 달에 여섯 차례는 결코 좋은 기량을 연마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아니었다. 이들이 개별적으로 이륙좌기 이외의 날에 얼마나 음악을 연습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전반적으로 연습량이 부족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는 제도적인 문제였다. 게다가 이들이 소지하고 온 악기 상태를 보니 전반적으로 좋지 않았다. 또 필요하지만 갖추어 놓지 못한 악기도 상당수 있었다.

정조는 이날의 모임을 통해 정책적으로 방안이 마련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당시 그 자리에 함께하였던 서명응에게 악서를 편찬하도록 암시를 주었다. 서명응은 이미 영조대에 『동국문헌비고』의 「악고」를 지었고, 악장 모음집인 『국조악장(國朝樂章)』을 지은 적이 있었으므로 그 임무가 그에게 돌아갔다. 그 이후 정조 자신이 책의 범례(凡例)를 지어 주고 서명응에게 악서를 만들 것을 명하여 악서인 『시악화성』, 악장 모음집인 『국조시악(國朝詩樂)』, 어정서(御定書)인 『악통(樂通)』 같은 음악 저술이 이루어졌다. 이들 저술은 조선 후기 정조대의 음악 이론의 수준을 가늠하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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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통』
『악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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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악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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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음악 이론 실력은 여러 정황을 통해 이미 검증이 되었다. 그런데 정조는 이론에만 밝았던 것이 아니었다. 그에 못지않게 음악적인 귀도 뛰어났다. 그에 관한 일화가 많이 남아 있다. 정조가 친히 사직단에서 사직제를 올릴 때의 일이었다. 제사를 위해 판위(版位)에 나아가자 당하(堂下)의 헌가악(軒架樂)이 연주되기 시작하였다. 사직 제례악을 익숙히 알고 있는 정조였다. 그런데 제례악을 가만히 들어 보니 특정 부분이 귀에 거슬렸다. 이에 가까이 있는 신하에게 그 사실을 지적하고 빨리 가서 알아보도록 하였다. 음악 감독인 전악은 “제2성에서 당하의 왼쪽에 있는 특경이 두 박자를 빠뜨리고 연주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정조의 귀가 이 정도였다. 정조는 사직제에서 연주되는 제례악 선율을 낱낱이 알고 있었다. 정조가 음악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음악이 제대로 연주되고 있는지 알 수도 없었을 터였다. 그러나 정조는 달랐다. 제례를 올릴 때 연주되는 음악의 선율을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이후의 여러 제례에서 음악을 담당하는 전악 이하 악생과 악공의 자세가 어떠하였을지는 익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예와 악의 중요성은 조선의 역대 제왕이 모두 인지하였지만 늘 ‘예’에 비해 ‘악’이 소홀하게 되었고, 예는 잘 갖추어졌다 하더라도 악이 미비하게 되어 예와 악이 균형을 잃었던 때가 많았다. 정조는 그러한 현실을 경계하였고, 자신이 음악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실수를 지적할 수 있었다.

정조는 의례와 음악, 양자의 중요성에 대해 가장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인식한 왕이었다. 제사를 지낼 때 음악을 제대로 연주하지 않는 것은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과 같다.”고 보았다. 종묘 제례를 올릴 때의 일이다. 정조는 제향을 올리면서 당상에서 연주하는 등가와 당하에서 연주하는 헌가악을 들었다. 음악을 유심히 들으니 절주(節奏)를 잃은 곳이 많았다. 속도가 예년에 비해 지나치게 빨라져서 여유로움을 잃었다. 그런 음악을 듣고 정조는 “음악을 제대로 연주하지 않는 것은 제사 지내지 않는 것과 같다.”고 지적하였다. 예와 악이 조화를 이루어 행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선언이었다.

정조는 이미 동궁 시절부터 악학에 조예가 깊었고, 여기에는 스승이었던 서명응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서명응은 박학강기(博學强記)로 이름난 인물로 사학, 경학, 역학, 천문, 지리, 악학 등 여러 분야에 학문이 깊었으며, 방대한 분량의 악서를 남겼다. 그러한 스승의 영향으로 정조 또한 학문의 여러 분야에 정통하였고, 특히 악학 연구는 높은 경지에 도달하였다. 왕위에 오른 이후 실행한 음악 정책은 결국 동궁 시절에 한 악학 연구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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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응 초상
서명응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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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제례를 올릴 때마다 매번 음악과 관련된 내용을 많이 지적하곤 하였다. 정조 자신이 음악을 잘 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실제 정조대의 학자 관료는 조선의 어느 시기보다도 악의 교육에 비중을 두고 있음이 확인된다. 정조가 집권 초반에 규 장각을 설치하면서 아악기인 종·경·금·슬을 특별히 규장각에 하사한 것도 악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특종·편종을 규장각 학사들에게 익히도록 지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악을 잘 아는 신하, 즉 지악지신(知樂之臣)의 양성을 위하여 시교(詩敎)와 악교(樂敎)를 강조하였고, 규장각의 초계문신(抄啓文臣) 교육에는 악학과 관련된 조문(條文)을 많이 내려 평소 악학을 꾸준히 연구하도록 강조하였다.

정조가 강조한 악을 아는 신하를 양성하려 한 목적은 ‘음악 실기인’을 키우기보다 ‘음악 입안자’를 육성하는 데에 있었다. 한 나라의 음악 정책에 핵심적 역할을 해낼 인물, 즉 세종대의 박연, 맹사성(孟思誠) 같은 인물의 양성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정조는 음악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닦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므로, 기교적으로 잘 훈련된 음악 실기인보다는 악을 통해 덕이 갖추어진, 악을 아는 인물의 배출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악을 잘 아는 음악 입안자를 양성하고 나면, 그를 통해 악을 바로 세울 수 있는 음악 정책을 펼 수 있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고, 나아가 좋은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음악인을 기를 수 있으며, 아울러 국가 전례에서 연주되는 음악도 제 궤도에 올라 좋은 풍속이 만들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기 때문이다. 예와 함께 악을 제대로 갖추기 위한 정조의 노력은 그 시대를 문화 융성기로 자리 매김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정조시대의 예악이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은 정조 자신의 음악 실력과 무관하지 않았다. 음악의 실제와 이론에 두루 정통하였던 왕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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