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3권 다양한 문화로 본 국가와 국왕
  • 제5장 왕실 행사와 전례 음악
  • 2. 왕실 행사의 음악 담당자들
  • 궁중 음악 연주자들, 악생과 악공
송지원

악생(樂生)과 악공(樂工)은 조선시대 왕실의 행사가 있을 때 실제 음악 연주를 맡았던 음악 전문인이다. 각자 자신이 주 전공으로 하는 악기 외에 몇 개의 악기를 더 연주하였다. 이 가운데 악생은 양인(良人) 가운데 선발하거나 악생의 자제로도 충당하였는데, 이들이 담당한 음악은 아악과 일무였다. 또 악공은 공천(公賤) 출신으로 충원하였는데, 향악과 당악을 담당하였다. 양인 중에서 악공을 원하는 경우 지원이 가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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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총대시연도(瑞蔥臺侍宴圖)
서총대시연도(瑞蔥臺侍宴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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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조선시대 사람들은 악공과 악생을 힘든 업종 중의 하나로 여겼다. 전쟁 때 흩어진 악공과 악생 가운데 다시 돌아오지 않은 숫자가 많은 것이 그 증거이다. 실제로 악공과 악생의 숫자를 충원할 때에는 늘 어려움이 있었고, 보통 예정된 숫자를 채우지 못하였다. 이런 경우 각 지방에 할당 인원을 부여하여 서울로 보내는 식으로 인원을 조달하였는데, 해당 지역은 충 원에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악공과 악생이 조선의 신분 사회에서는 좋은 직업으로 인식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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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총대시연도의 악공 부분
서총대시연도의 악공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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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아직으로 있던 장악원의 잡직 관리는 나라에서 일정한 월급을 받는 공무원과 같은 녹관(祿官)의 신분이었지만 악생과 악공은 이와 달리 봉족제(奉足制)로 운영되었다. 다시 말하면 신역(身役)으로 뽑혀 간 사람에게 줄 비용을 그렇지 않은 사람이 대신 내는 방식이다. 즉, 몸으로 그 역을 담당하지 않는다면 비용을 부담하고, 그렇게 거두어들인 비용을 악공이나 악생에게 지급하는 방식이다. 당연히 그 비용이란 매우 적어서 악공이나 악생이 받는 월급도 적을 수밖에 없었다. 기록에 의하면 1723년(경종 3)에는 당시 악공의 월급이 한 달에 베 한 필이었다는 기록이 보인다.173)『악장등록(樂掌謄錄)』 계묘(1723), 3월 25일.

이러한 현실은 조선시대 왕실의 음악을 담당하던 음악 연주자에게 음악에 대한 자긍심 같은 것을 요구할 수 없었던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따라서 악공과 악생이 연주하는 제사 음악과 연향 음악이 더 나은 상태로 발전하는 데에 걸림돌로 작용한 것도 사실이다. 맹자(孟子)가 “항산(恒産)이 있어야 항심(恒心)이 있다.”고174)『맹자(孟子)』 권10, 양혜왕(梁惠王) 상(上). 말한 것처럼 악공과 악생의 현실은 항심을 갖고 맡은 일에 몰두하기 힘들었던 듯하다. 이는 제도상의 문제였다. 왕실의 온갖 공식 행사에 참여하여 쉽지 않은 연주를 다 하지만 그들의 생활은 극빈자 이상의 삶을 면하기 어려웠다. 결국 이들은 궁중 음악 연주를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없었다. 장악원의 일을 기록한 『악장등록(樂掌謄錄)』에 악공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상소(上疏)가 유난히 많은 것도 이러한 현실을 반증한다.

이러한 현실은 악공과 악생의 연습일을 법으로 정하여 보충할 수밖에 없었다.175)장악원의 음악 연습에 관한 규정은 『대전회통(大典會通)』, 『육전조례(六典條例)』 등의 법전에 규정되어 있다. 좋은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음악을 익히고 익힌 음악을 꾸준히 연습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를 ‘음악 이습(音樂肄習)’이라 하였다. 장악원 소속 악공과 악생의 정기적 음악 이습은 이륙회 혹은 이륙좌기, 이륙이악식(二六肄樂式)이라 하여 한 달에 2·6일이 포함되는 엿새 즉, 2일·6일·12일·16일·22일·26일에 출근하여 연습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물론 이러한 연습은 최소한의 연습이다. 기본적으로 여섯 차례 외에도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면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별도의 연습을 하였다.

이륙회 같은 정기 연습일을 제도적으로 법전에 명기해 놓은 것은 악공의 생업을 고려한 조치였다. 악공과 악생의 보수 실태는 최저 생활비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으므로 궁중 밖의 여타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들은 전국 각지에서 서울로 소집되어 활동하였기 때문에 대개는 다른 집에 몸을 의탁하여 살거나 태평관(大平館)이나 왜관(倭館)의 공터 등 한양의 오부(五部) 근처에 거적을 치고 사는 궁핍한 생활을 면치 못하였다. 따라서 이 들은 평소 궁중 안에서 특별한 행사가 없을 때에는 민간에서 여러 용도로 쓰이는 음악을 연주하였다. 민간에서 잔치가 있거나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 악공과 악생이 동원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현장은 궁중 음악과 민간 음악이 만나는 지점이 되기도 했다.

악공과 악생은 정기적으로 실기 시험을 치러야 하였다. 『경국대전』 「예전(禮典)」의 취재조(取才條)에는 이들의 시험 내용이 제시되어 있다. 시험은 음력 1월·4월·7월·10월에 정기적으로 치렀다. 악생은 아악과 문무, 무무를, 악공은 당악과 향악을 시험 보았다. 이때의 당악과 향악이란 당악기와 향악기를 말한다. 당악기는 여민락령과 여민락만을 비롯하여 보허자, 환환곡(桓桓曲), 종묘 제례악인 보태평 11성과 정대업 11성, 정동방곡 등의 곡을 시험 보았다. 향악기는 역시 여민락령과 여민락만, 진작(眞勺), 낙양춘(洛陽春), 자하동(紫霞洞), 보태평과 정대업, 한림별곡(翰林別曲), 헌선도(獻仙桃), 보허자 등을 각각의 해당 악기로 시험 보았다. 당악과 향악 부분에 같은 악곡을 시험 보는 것은 동일한 악곡을 당악기와 향악기로 모두 연주하기 때문이다. 그 밖에 편종·편경·생황 계통의 악기인 생·우·화·훈·지·금·슬 등의 아악기도 때때로 시험 보았다.

그런데 이러한 시험에 응시하려면 일정한 조건을 갖추어야 했다. 즉 3개월 내에 출근 일수가 30일이 차지 않는 사람이나 제향, 연향 및 모든 예회(禮會)에 이유 없이 두 번 결석한 사람은 응시 자격을 박탈하였다. 이륙회의 횟수만을 보면 한 달에 기본적인 출근 일수는 6일이고, 석 달이면 18일밖에 되지 않는다. 따라서 3개월 내에 출근 일수 30일을 넘기려면 정기적으로 정해 놓은 연습일보다 훨씬 많은 날수를 출근해 연주나 연습에 임하여야 했다. 최소 한 달에 10일은 출근해서 연습해야 했다. 또 출근 일수가 많은 사람에게는 일정 기간이 지나지 않더라도 시험 치를 자격을 부여하여 출근을 독려하였음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매 연말이 되면 낭청(郎廳)이 모여 악공과 악생의 기예를 시 험하였다. 낭청이란 실무를 맡은 관리로서 정5품의 정랑(正郞)과 정6품의 좌랑(佐郞)을 말하는데, 이때의 시험에서 기예가 일정 정도에 이르지 못하면 그 결과를 전악에게 알리고 징계하였다. 전악 1명이 악공과 악생 3명을 거느리고 당번이 될 때마다 사흘씩 돌아가며 숙직하면서 일과(日課) 때에 배운 내용을 익히도록 하였다. 이러한 방법은 일종의 과외 수업이라 할 수 있다. 악공과 악생이 저마다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는 음악성이 달랐고, 똑같은 기간 동안 연마하여도 개인차가 있었기 때문에 서로 실력의 차이가 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실력이 일정하게 나아지지 않는 사람은 특별히 관리하며 연습량을 늘려서 연주 실력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올려놓았다. 이러한 방법은 1741년(영조 17)에 장악원 주부(注簿) 조영로(趙榮魯)가 제기하여 정한 법이었다.176)『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권105, 악고(樂考)16, 습악(習樂).

그 밖에도 악공과 악생의 연습을 독려하기 위한 여러 장치가 있었다. 1779년(정조 3) 당시 제조로 있던 서명응이 정한 규칙 가운데에는 악공과 악생의 실력을 겨루어서 우수한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벌을 주는 내용이 있었다. 시험을 봐서 악생 중에 가장 우수한 사람 1명에게는 2냥(兩), 1등을 한 2명에게는 각각 1냥 5전(錢)씩, 2등을 한 3명에게는 각각 1냥씩, 3등을 한 9명에게 각각 5전씩을 상금으로 주었다. 또 악공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사람 1명에게 2냥, 1등을 한 3명에게는 각각 1냥 5전씩, 2등을 한 5명에게는 각각 1냥씩, 3등을 한 21명에게 각각 5전씩을 상금으로 주었다. 악공에게 더 많은 인원을 배정한 것은 악공의 숫자가 악생보다 많았기 때문이다. 1779년 당시의 악공은 168명, 악생은 90명이었다. 그에 반해 시험 결과 성적이 하위에 머물러 있는 사람에게는 매질을 하거나 태형(笞刑)을 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벌을 주는 방법은 악공과 악생의 저항을 받아 시행한 지 2년 만인 1781년(정조 5)에 폐지되었고, 당시 식자(識者)들 가운데에는 이를 안타깝게 여긴 사람들도 있었다.177)『증보문헌비고』 권105, 악고16, 습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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