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3권 다양한 문화로 본 국가와 국왕
  • 제5장 왕실 행사와 전례 음악
  • 2. 왕실 행사의 음악 담당자들
  • 궁중의 춤 담당자들, 무동과 여기
송지원

무동(舞童)이란 궁중의 각종 행사에서 정재를 추는 남자 어린아이이며, 여기(女妓)는 정재를 추는 여성을 말한다. 악공과 악생, 관현맹인(管絃盲人)이 왕실의 여러 행사에서 악기 연주를 주로 담당하였다면, 무동과 여기는 춤을 주로 담당하였다. 춤에 따라 무동이 출 수 있는 것이 있는가 하면 여기만 출 수 있는 것도 있었다.

무동은 궁중의 여러 제사와 연향 등에서 춤과 음악을 담당하였다. 남자 아이들이 담당하므로 무동을 남악(男樂)이라고도 한다. 무동으로 선발할 수 있는 나이는 시기별로 다소 차이가 있지만 대개는 8세부터 14세 정도의 소년이 대상이 되었다. 8세 이상의 어린 아이를 뽑아 음악과 춤을 연습(習樂)시켜서 이들이 일정 정도의 재주를 이루게 되면(成才) 종묘 제향의 일무를 비롯하여 회례연 등의 여타 연회에 투입시켜 춤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내연(內宴)과 외연(外宴)에서 연행하는 정재를 두루 담당하였다. 여악(女樂)을 사용하면 문제가 될 때 무동이 춤을 담당하였는데, 한때는 무동에게 가면을 쓰도록 하여 정전(正殿)에서 베풀어지는 연향에서 춤을 담당하도록 한 적도 있었다.

세종대에 무동을 모집하는 방법과 과정을 살펴보자. 세종대에는 어린 사내아이, 즉 동남(童男) 가운데 11세 이상 13세 이하의 나이로 용모가 단정하고 깨끗하며, 성품과 기질이 총명하여 왕 앞에서 정재를 출 수 있는 정도의 사람을 가려서 뽑되 각 도에 일정 인원을 배당하였다. 1431년(세종 13) 당시에는 총 57명을 원래 정원으로 하여 한 고을에 1명, 혹은 두서너 고을을 합하여 1명 정도의 인원을 배당하도록 하였고, 각 도별로는 경상도에 15명, 전라도에 10명, 충청도에 7명, 강원도에 7명, 경기도·황해도·평안도에 각각 5명, 함길도에 3명을 배정하였다. 무동으로 들어온 이후 성장하여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거나, 사고로 일할 수 없는 사람이 생기면 역시 각 고 을에 배정한 것을 기준으로 인원수를 다시 채워 쓰도록 하는 방식으로 인원을 조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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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인진연도병(壬寅進宴圖屛)의 무동 정재
임인진연도병(壬寅進宴圖屛)의 무동 정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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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어린 나이에 어버이의 품에서 떠나고 친족과 멀어지게 되면 악무(樂舞)를 익히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을 것을 감안하여 여타 봉족과는 일정 정도 차이가 있는 대우를 하기도 했다. 이들이 나이가 들어 무동으로 쓸 수 없게 되면 고향으로 돌려보냈지만, 그 가운데 음악을 잘 익혀서 악공이 될 만한 자격을 갖춘 무동에게는 장악원의 연주 활동에 투입시켜 악공으로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하기도 하였다.

무동을 선발하는 데에는 여러 어려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431년(세종 13)에 이미 무동 선발에 관한 문제를 논의하였지만 미흡한 점이 있었고, 여전히 조달에 어려움이 있었다. 따라서 1434년(세종 16)에는 예조의 건의로 무동 선발에 관한 논의가 다시 이루어졌다. 무동이라는 특수성, 다시 말하면 일정 정도 성장하면 더 이상 무동으로 일할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은 늘 한편으로 새로운 무동을 충원해야 하는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따라서 남자 아이들의 성장이 한참 이루어지는 나이에 무동으로 선발되어 나가기 때문에 인원을 보충하는 문제는 늘 현안으로 대두되었다. 결국 양인의 신분이지만 천인의 일을 하는 사람의 자손이거나 기녀(妓女)로서 양인에게 시집가서 낳은 자, 기녀로서 7품 이하 관리 등에 시집가서 낳은 자 중에서 음률의 전습이 가능한 자, 무녀(巫女), 경사(經師)의 자손 가운데 8세 이상인 자 등을 조사하여 무동으로 쓰게 하는 방안이 대안으로 모색되었다. 또 이러한 조건에 해당하는 자를 특별히 한성부의 관리가 담당, 조사하도록 하여 무동의 조달에 차질이 없도록 하는 방안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무동 조달의 어려움은 결국 1447년(세종 29)에 현실화되어 혁파하기에 이르렀다. 무동은 익숙해질 만하면 곧 장정(壯丁)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계속해서 인원을 조달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였다. 따라서 이들은 악공에 부속시키도록 하였고, 모든 회례와 양로연, 사신을 연향하는 잔치 등에는 악공 가운데 노래와 춤에 능한 사람을 골라 쓰도록 하는 방안이 마련되었다. 이후 무동의 역할을 악공이 맡게 되었으나 일정 시간이 지난 후 다시 무동이 여러 의례에서 정재를 담당하였고, 이러한 전통은 조선 말기까지 지속되었다.

무동이 입는 복식은 1431년(세종 13)에 당(唐)나라의 제도를 본떠서 만들었다. 복식의 제정 당시부터 한동안은 사계절 모두 사라(紗羅)로 만들어 입었으나 1439년(세종 21)부터는 무동의 여름 복식을 따로 만들었다. 토우(土雨), 즉 황사나 비와 같은 궂은 날씨를 만나게 되면 옷이 더러워지고 빛깔이 바래게 되는데, 이는 다시 염색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당시에 사라 같은 비단은 조선에서 공급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흰 모시에 사라 빛깔을 내도록 오색(五色) 물감을 곱게 들여서 옷을 만드는 것으로 정하였다. 이때부터 무동의 여름 복식을 제정하여 사용하게 된 것이다. 무동의 복식에 대한 그림은 『악학궤범』에 상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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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동의 복식-공연시부용관(公演時芙蓉冠)
무동의 복식-공연시부용관(公演時芙蓉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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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靴)
화(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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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동의 옷은 원래 무늬가 있는 비단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1748년(영조 24)에는 중국 사신을 위한 연향 때 입는 옷에 무늬를 넣은 비단을 사용하 지 못하도록 하는 금령(禁令)이 내려졌다. 따라서 이후의 사신연에서는 무동이 무늬 없는 비단으로 지은 관복(冠服)을 입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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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衣)의 앞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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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衣)의 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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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단(中單)
중단(中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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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裳)
상(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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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음악인인 여기는 여악이라고도 하는데, 주로 연향에서 악무를 담당하였다. 그런데 궁중의 연향에서 여악을 사용하는 일은 늘 문제가 되었다. 이는 조선시대에 성리학이 심화되는 역사와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보인다. 왕실의 연향에서 왕이 환궁할 때 노상(路上)에서 베푸는 교방가요를 올릴 때, 중궁의 하례에서, 친잠례에서 악·가·무를 담당하던 여악은 조선시대 악·가·무 연행(演行)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성리학의 심화와 함께 여악 폐지론은 늘 현실화 되었고, 결국 남성이 주축이 되는 외연에서 여악을 사용하는 일은 인조반정(1623) 이후 폐지되었다. 그 밖에 맹인으로서 악기 연주를 담당한 관현맹인, 등가에서 노래를 담당한 어린 소년인 가동(歌童) 등도 왕실 행사의 실제 연주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음악인이다.

조선시대 궁중에서 활동한 음악 연주자는 대부분 주체적 입안자(立案者)의 입장에 서 있다기보다 객체적 공급자의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활동은 부수적 위치의 소극적 범주에서 이루어졌다는 한계를 지닌다. 이러한 현실은 조선 왕실의 음악인이라는 신분적 한계로 인해 드러난 것이므로 또 다른 틀에서 논의될 내용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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