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4권 유교적 사유와 삶의 변천
  • 제1장 유교적 사유와 삶의 형성
  • 2. 삼국시대, 충·효·정결의 유교 윤리
  • 신라
권오영

신라에서는 유난히 국가에 대한 충이 강조되었다. 212년(내해이사금 17)에 보라국(保羅國)·고자국(古自國) 등 여덟 나라, 이른바 팔포상국(八浦上國)이 연합하여 신라의 변경을 침입하였다. 내해이사금은 태자 날음(捺音)과 장군 일벌(一伐) 등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물리치게 하였다.

그 뒤 215년(내해이사금 20)에 골포국(骨浦國) 등 세 나라 왕이 각각 군사를 거느리고 갈화(竭火)에 침입하자 왕은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방어하여 세 나라를 모두 물리쳤다. 이때 물계자(勿稽子)가 노획한 것이 수십 급(級)이나 되었으나, 사람들은 그의 공로를 말하지 않았다. 물계자는 자기 아내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은거하여 다시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들으니, 임금을 섬기는 도리는 위태로울 때 목숨을 바치고, 어려움을 당해서 몸을 잊고, 다만 절의를 갖고 사생(死生)을 돌보지 않아야 함을 충이라 이르는 것이니 대체 저 보라국과 갈화의 싸움은 실로 나라의 어려운 일이요, 임금이 위태로울 때였는데에도 내가 일찍이 몸을 잊고 목숨을 바칠 용맹이 없었으니, 이것은 불충이 심한 것이요, 이러한 불충으로 임금을 섬기는 것은 그 누(累)가 조상에 미치는 것이니, 어찌 효라 이르리오. 나는 이미 충과 효를 함께 잃었는바, 무슨 낯으로 다시금 조시(朝市) 가운데에 노닐 수 있으리오.13)『삼국유사』 권5, 피은(避隱), 물계자(勿稽子).

이같이 신라에서는 임금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용맹이 요구되었으며, 그 용맹은 충과 관계되는 것이고 그 충은 다시 효와 관계되는 것이다. 곧, 용·충·효는 신라인이 갖추어야 할 유교의 주요 덕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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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충사(孝忠祠)
효충사(孝忠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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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계자뿐 아니라 충을 실천한 인물로는 박제상(朴堤上)이 유명하였다. 눌지왕(?∼458) 때 활동한 그는 고구려와 일본에 인질로 갔던 왕자들을 구출하고 대신 죽음을 당하면서도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켰다.14)『삼국사기』 권45, 열전5, 박제상(朴堤上). 그는 일본에 가기 전에 눌지왕에게 “신이 듣사온데 임금이 근심스러우면 신하가 욕되고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마땅히 죽어야 하는 줄로 아옵니다. 만약 어렵고 쉬운 것을 논한 후에 간다면 불충(不忠)이라 하겠고 사생을 도모한 후에 움직인다면 무용(無勇)이라 할 것이옵니다.”라고 하였다. 그는 왜왕(倭王)의 회유에도 굴복하지 않고, 차라리 계림(鷄林, 신라)의 개돼지가 될지언정 왜국(倭國)의 신하가 되지는 않겠다고 하였다. 이같이 박제상은 나라와 나라 사이의 신의와 군신 간의 충절을 몸소 실천한 인물이었고, 우리 역사에서 줄곧 그의 충절을 높이 기려 왔다.15)조선시대 김성일(金誠一)은 일본에 사신으로 가면서 박제상의 충혼을 생각하며 시를 읊었다. 일제 강점기 때 김구(金九)도 『나의 소원』에서 박제상의 충절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뿐이 아니었다. 김흠춘(金歆春), 김반굴(金盤屈), 김영윤(金令胤) 3대는 유교적 삶을 실천하였다. 진평왕(579∼632) 때의 화랑 김흠춘은 660년(태종 무열왕 7) 당나라 고종이 소정방(蘇定方)에게 명하여 백제를 치게 하였을 때 장군 김유신(金庾信) 등과 함께 정예 군사 5만을 이끌고 나갔다. 그해 7월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을 만나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자 김흠춘은 자기 아들 반굴에게 “신하로서는 충이 가장 중요하고 자식으로서는 효가 가장 중요하다. 나라의 위급함을 보고 목숨을 바치는 일은 충과 효를 모두 온전하게 하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반굴은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는 적진에 들어가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반굴의 아들 영윤도 보덕성(報德城)에서 벌어진 고구려와의 전투에 참가하여 아버지의 가르침을 실천에 옮겼다. 그는 “전쟁에 임하여 용기가 없는 것은 『예기』에서 경계한 바요, 전진이 있을 뿐 후퇴가 없는 것은 병졸의 떳떳한 분수이다.”라고 하면서 적진에 나아가 싸우다가 죽었다. 신문왕(681∼691)은 김영윤의 전사 소식을 듣고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그런 아비가 없었으면 이런 자식이 있을 수 없다. 그 의로운 공이 가상하다.”라고 말하였다.16)『삼국사기』 권47, 열전7, 김영윤(金令胤) ;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新羅本紀)5,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 7년. 이같이 신라 사회에서는 국가에 대한 충과 부모에 대한 효가 유교적 삶의 핵심 가치로 인식되고 있었다.

한편 삼국시대에 효는 불교의 효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었다. 일연(一然, 1206∼1289)이 편찬한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아예 「효선(孝善)」이라는 편이 있을 정도이다. 고대 사회에서 효는 유교의 독점물이 아니었고 불교와 깊은 관련을 지니고 있었다. 효제에 특이한 행적이 있는 이에 대해 국가에서 벼슬을 한 등급 올려 주었다는 사실은 내물왕 때의 기사에 이미 보인다.17)『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3, 내물이사금(奈勿尼師今).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효행 사례는 향덕(向德·向得)과 손순(孫順) 등에게서 볼 수 있다.18)『삼국사기』 권48, 열전8, 향덕(向德) ; 『삼국유사』 권5, 효선(孝善), 향득사지할고공친(向得舍知割股供親). 『삼국유사』에는 경덕왕이 벼 500석을 상으로 내린 것으로 되어 있다.

신라에서는 충과 효의 윤리뿐만 아니라 삼종(三從)의 윤리를 실천한 사례도 보인다. 김춘추(金春秋, 태종 무열왕)의 셋째 딸로 김유신과 결혼하여 원술(元述)을 낳은 지소 부인(智炤夫人)의 유교적 발언은 당시 신라 왕실 여성의 유교적 사유를 짐작하게 한다. 원술이 당나라와의 전쟁에 비장(裨將)으로 참전하여 패배하자 김유신은 아들 원술이 왕명을 욕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훈(家訓)을 저버렸으니 목을 베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태종 무열왕은 “원술은 비장이니 홀로 무거운 형벌을 가할 수 없다.”며 사면하였다. 그러자 원술은 부끄러워하며 아버지를 만나지 못하고 전원에 숨어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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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향덕비(孝子向德碑)
효자향덕비(孝子向德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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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김유신이 죽고 나서 원술은 어머니 지소 부인을 찾아갔다. 지소 부인은 오랫동안 아들을 보지 못하였지만 단호하게 “부인은 삼종의 의리가 있으니 지금 이미 혼자되어 아들을 따르는 것이 마땅하나 원술과 같은 자는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자식 노릇을 못하였으니 내가 어찌 그 어미가 되겠는가.”라고 하며 만나기를 거절하였다.19)『삼국사기』 권43, 열전3, 김유신(金庾信) 하(下). 원술은 통곡하며 어머니 곁을 떠나가지 않았으나 지소 부인은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 여성이 지켜야 할 삼종의 의리는 『의례(儀禮)』 「상복(喪服)」에 보이는데 지소 부인의 예로 보아 신라 사회에 이미 실천 윤리로 자리를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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