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4권 유교적 사유와 삶의 변천
  • 제3장 조선 성리학의 정치 이념과 갈등
  • 5. 호락 논쟁과 성리학 경세관의 대립
  • 성리학에서 심성론은 어떠한 의미인가
조성산

국가와 사회의 경영에서 성리학의 관심은 기본적으로 제도에 있지 않고, 그 제도를 운영하는 인간에 있다. 북송대(北宋代) 신법당(新法黨)과 구법당(舊法黨)의 대립은 이러한 성리학의 모습을 잘 보여 주었다.132)손영식, 『이성과 현실 : 송대 신유학에서 철학적 쟁점의 연구』, 울산 대학교 출판부, 1999, 80∼95쪽. 제도 자체보다 그 제도를 운용하는 인간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심성론(心性論)에 대한 정밀한 탐구로 이어졌다. 성리학에서 심성론은 이기론(理氣論)을 전제로 하여 이루어진 중세 인간학의 성격을 띠고 있다. 성리학자들은 심성론을 통해 인간의 심성을 규명하고 이를 근거로 경세와 사회 개혁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를 논하였다. 성리학자들이 심성에 대하여 고도의 형이상학을 전개한 것은 성리학의 이러한 고유한 특징 때문이었다.

조선 중기 사림이 집권하면서 사단칠정 논쟁(四端七情論爭)이 발생하였다. 사단과 칠정 사이의 관계를 규명하면서 이기 문제와 심성 관계를 조명한 이 논쟁은 인간 심성에 대한 섬세한 이해를 낳았다. 이러한 인간 심성에 대한 이해 속에서 그들은 경세학의 기본 방향과 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인간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하는 문제 속에는 세상을 어떻게 운용할 것인가 하는 경세학의 문제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논쟁 이후 율곡 학파(栗谷學派)와 퇴계 학파(退溪學派)가 보여 준 경세학의 방향에는 사단칠정 논쟁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의식(問題意識)이 반영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에 사단칠정 논쟁 이후 심성 논쟁으로 그에 필적할 만한 것은 18세기의 호락 논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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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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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락 논쟁은 주로 심성론의 영역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이유로 일부 연구에서 호락 논쟁을 현실과는 동떨어진 무의미한 공리공담(空理空談)으로 치부하였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 집권층의 가장 근본적 사상 기반이 성리학이었음을 고려할 때, 성리학 이론 안에서의 정합성(整合性) 결여와 이것에 대한 발견은 그들 정치 이념의 근본적인 토대를 위협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따라서 이에 대한 해결책 모색은 무엇보다 중요한 현실적 과제로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대학(大學)』의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 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라는 연속적 관점에서 볼 때 심성론 중심의 호락 논쟁은 이미 그 속에 치국·평천하와 같은 경세 사상의 의미들을 담고 있었다. 곧, 호락 논쟁은 단지 사변적(思辨的) 이고 형이상학적인 지향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세도치란(世道治亂)과 치평(治平)의 문제로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또 학파와 정파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던 당시 사회에서 심성 논쟁의 정통성 획득은 정치의 정통성 획득과 연결되어 있었고, 그러한 차원에서 호락 논쟁은 18세기 중엽 이후에는 ‘혈전(血戰)’으로 귀결되고 있었다.133)황윤석(黃胤錫), 『이재난고(頣齋亂藁)』 권29, 기해(1779) 5월 초5일 무자 : 『이재난고』 5, 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1999, 518쪽. “是昏與趙僚談 及洛湖學所爭心性之說 趙云 家學則洛學 而切姻則湖學 故頗聞湖學說話 但兩邊以此看作大事 因成血戰 此未可知耳(저녁때에 조 아무개 관료와 담론하였는데 대화가 호락심성논쟁에 미쳤다. 조 아무개가 말하기를, “우리 집의 가학은 낙학인데 절인(切姻)은 호학이었던 까닭에 자못 호학의 주장들을 들었습니다. 단, 낙학과 호학 양쪽이 이 심성논쟁을 커다란 일로 여겨 혈전을 벌인 것에 대해서는 이를 아직 알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이러한 점들에서 호락 논쟁의 내용과 성격에 대한 고찰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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