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4권 유교적 사유와 삶의 변천
  • 제4장 예절로 다스리는 사회의 종법 질서
  • 1. 불교 의례에서 유교 의례로
  • 유교적 예속과 의례의 흐름
  • 예법과 예속
이영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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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가례』
『주자가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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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적 사회 규범이란 곧 예법(禮法)과 예속을 말한다. 예법은 유교의 윤리 도덕이라고 할 수 있고, 예속은 유교적 의례 생활 곧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습속이다. 유교의 기초적인 윤리 도덕은 『소학(小學)』으로 대표되고, 관혼상제의 예속은 곧 『가례(家禮)』(보통은 『주자가례(朱子家禮)』로 알려짐)로 대표된다. 이 두 책은 심오한 사상이나 철학을 담은 것은 아니었지만, 유교적 교양의 기초를 이루는 것으로서 유교 예법의 사회적 실천을 위한 양대 교과서라고 할 수 있 다. 또한 유학자의 정신 수양과 도덕 실천의 토대가 되는 교과서로, 조선시대 과거 시험의 선수(先修) 과목일 뿐만 아니라 모범적인 사회생활을 위한 기초 교양서였다.

『소학』은 16세기에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등 일군의 사림(士林)을 중심으로 실천 운동이 일어나면서 널리 보급되었다. 이것은 도덕적 수양과 실천이 유학자의 모든 활동에 기초가 되고 우선한다는 일종의 근본주의적 사고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것은 내적인 심성의 수련도 중요하지만, 일상생활의 예의범절(禮儀凡節)을 중시하였다. 따라서 당시 유학자들은 예법을 훈련하여 절도 있고 윤리적인 태도가 습관화되도록 노력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한 윤리 도덕의 훈련은 유학자들이 선도하고 학생들이 답습하며 사회 전체가 본받도록 강조되었다. 이것이 곧 유교 국가가 이룩하고자 하였던 교화의 정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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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학』
『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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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례』는 사대부 유학자 계층의 가정의례서(家庭儀禮書)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조선 초기부터 국가 차원으로 보급되었지만, 개인의 의례 생활은 사회적 습속과 관련된 것이었으므로 쉽게 토착화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16세기에 사림파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성리학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가례』에 대한 연구와 실천도 일어나게 되었다. 특히 17세기에 김장생(金長生) 등이 집중적으로 『가례』를 연구하였고, 1632년(인조 10)에는 신식(申湜)의 『가례언해(家禮諺解)』가 간행되어 널리 보급되었다.

17세기에는 『가례』가 지나치게 강조되어 일반 서민들은 물론 왕실에까지 적용하자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국가 혹은 왕실의 의례를 위해서는 일찍이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라는 전범(典範)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 리고 서민들은 사회 경제적인 여건상 『가례』의 예식을 행할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가례』는 왕실 의례에 많이 수용되었고, 서민들도 양반 사대부의 예속을 본받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래서 조선 후기에는 비록 정확한 절차는 몰랐지만 서민 계층에서도 『가례』의 상례(喪禮)와 제례(祭禮)를 따르게 되었다. 그들도 유교식 삼년상을 치르게 되고 조상의 제사도 유교식으로 하게 되었다. 다만, 혼례(婚禮)에는 전통적인 인습(因習)이 강하게 유지되었고, 관례(冠禮)는 사대부 계층이 아니면 거의 행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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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오례의』
『국조오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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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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