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4권 유교적 사유와 삶의 변천
  • 제4장 예절로 다스리는 사회의 종법 질서
  • 1. 불교 의례에서 유교 의례로
  • 조선 초기의 불교 의례
  • 이중적 불교관
이영춘

조선 초기에는 유교를 왕조 개창의 이념으로 하여 치국의 원리로 삼고 국가적으로 장려하였지만, 사회의 저변은 물론 지배 계층에서도 고려 이래의 불교적 사고와 인습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래서 정부의 관료였던 사대부들도 공적으로는 불교를 배척하는 정책을 취하면서도 개인적으로는 불교를 신앙하고 불교적 습속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 왕조 실록』에는 불교의 폐단 시정을 요구하는 신하들의 과격한 상소가 많지만, 그들의 호불적(護佛的) 성향을 보여 주는 기록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당시 사 대부들의 불교관은 이중적인 성격을 보였다. 이는 국가의 지도 이념은 바뀌었지만, 일반 사회에서는 불교 신앙의 전통이 광범위하게 지속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141)조선 초기의 불교 의례에 대하여는 주로 이영화, 「조선 초기 불교 의례의 성격」, 『청계 사학』 10, 청계 사학회, 1993에 의거하였다.

조선 초기 불교 억제 정책은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 집현전(集賢殿) 등의 젊은 언관(言官)들이 주도하였다. 이들이 주도한 배불론(排佛論)은 매우 완강하고 신랄하였다. 이 때문에 그들은 다른 관부(官府)의 관원과 마찰을 일으키기도 하였는데, 특히 의정부(議政府)나 예조(禮曹) 등의 원로·중견 관료들과 갈등을 빚는 일이 잦았다. 그러나 이들의 배불론은 대부분 불교의 신앙과 교리를 극복하고자 하는 사상적 투쟁이었다기보다는 불교 사원의 말폐(末弊)에 대한 정치적 논박이 많았고, 국가의 재정과 부역(賦役) 확보를 위해 사찰이 가졌던 경제적 특혜를 폐지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래서 태종대에는 사원전(寺院田)과 사사노비(寺社奴婢)를 혁파하여 국고로 귀속시키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조선 왕조가 개창되어 안정되기 시작한 태종∼세종대의 배불론은 오히려 고려 말 정도전 등의 배불론보다 완화된 경향이 있었고, 성리학적 철학 체계 위에서 불교 자체를 부정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이렇게 철학적 근저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불교를 부정하지 않았던 것은 조선 초기 사대부들의 관념과 생활이 여전히 고려시대의 연장선상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곧, 이 시대 관료들을 비롯한 사대부 계층은 실제로 불교를 신앙하고 불교적 습속 가운데 살고 있었다. 그들은 공적으로 불교에 대해 정치적·사회적 비판을 하면서도 자신들의 신앙 행위는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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