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4권 유교적 사유와 삶의 변천
  • 제4장 예절로 다스리는 사회의 종법 질서
  • 2. 종법이라는 질서
  • 종법의 전래와 흐름
  • 고려시대의 종법
이영춘

종법은 종묘 제도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고려는 유교 정치 이념과 문화의 수용에 적극적이었던 988년(성종 7) 12월에 처음 오묘의 종묘 제도를 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고려 초기의 왕위 계승은 형제 상속이 많았기 때문에 종묘의 소목(昭穆)을 논의할 때 항상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이 때문에 고려의 종묘 제도는 많은 논쟁을 초래하였다. 일반적으로 형제는 소목의 순서에 있어서 같은 세대로 간주되었으나 종묘는 기본적으로 오묘를 기준으로 하였고 또 제사는 4대까지 행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고려 초기에는 오묘제와 제사가 항상 어긋나게 마련이었다. 이 때문에 종묘의 소목 제도를 정비하는 데 이견이 많았고 때로는 심각한 논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 문제는 오랜 논쟁을 거쳐 고려 말기 이제현에 이르러 ‘동당이실이방(同堂異室異房)’의 체제로 귀결되었다. 이는 조선시대의 종묘 제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어떻든 소목 논쟁을 통하여 왕실의 정통과 방계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되었고, 점차 왕위 계승에서 형제 상속이 지양되고 적장자 상속의 추세로 나아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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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현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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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성행하여 전기의 귀족 사회에서나 후기의 사대부 사회에서나 불교 의례가 예속 생활의 중심이 되었고, 상례와 제례에서도 유교식의 의례가 잘 행해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왕실 이외의 지배 계층에서는 종법에 대한 인식이 낮았고 친족 제도나 가계의 계승에도 종법이 제대로 시행되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고려시대에는 귀족층 이하 일반 사회에서 거의 종법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다만 고려 말기에 원나라로부터 성리학이 수입되고 『가례』가 전해지면서 일부 사대부 계층에서 유교적 가정의례를 행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 결과 1390년(공양왕 2)에 이르러 『가례』에 의한 ‘사대부가제의’가 제정, 반포되었다. 여기에는 직접 ‘종법’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고 있어 우리나라 종법의 시작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는 고려 말기의 정치적·사회적 주도 세력인 사대부 계층에서 종법이 가계 계승과 친족 조직을 운영하는 최고의 원리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다. 사대부 계층에서의 종법은 『가례』의 보급 및 준행과 병행하여 정착되어 갔고, 이후 조선시대의 사회생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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