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4권 유교적 사유와 삶의 변천
  • 제4장 예절로 다스리는 사회의 종법 질서
  • 2. 종법이라는 질서
  • 종법의 전래와 흐름
  • 조선시대의 종법
이영춘

조선시대에 와서는 왕실에서나 양반 사대부 계층에서나 종법이 보편화되고 일반화되었다. 심지어 그것은 일반 민중들의 예속에까지도 영향을 미쳤다. 종법의 적장자 계승 원칙은 본래 자율 규범에 속하는 문제였고 잘 준행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그 가치가 강조되어 마침내는 하나의 강제 규범으로까지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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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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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장자 계승 원칙도 고대 중국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그것은 춘추시대인 기원전 651년에 제 환공(齊桓公)이 소집하여 성사된 유명한 규구(葵丘)의 회맹(會盟)에서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는 이미 정해진 세자를 함부로 바꾸거나 첩(妾)을 처(妻)로 만드는 등 명분에 위배된 행위를 처벌하기로 결의하였던 것이다.182)『맹자(孟子)』 권12, 고자(告子) 하(下). 당나라 이래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는 이것이 정식 율령(律令)으로 법제화되어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당률(唐律)』에 따르면 적자를 바꾸어 서자를 후사로 세우거나 장유(長幼)의 차례를 위반하는 경우에는 도3년(徒三年)의 형벌을 주게 하였다. 다만 적처의 나이가 50이 넘을 때까지 아들이 없을 경우에는 서자를 후사(後嗣)로 세우는 것도 허용하였다.183)『당률(唐律)』 호혼률(戶婚律), 입적위법(立嫡違法). 『대명률(大明律)』에도 같은 내용을 규정하였으나 다만 형벌을 장(杖) 80으로 완화한 것이 차이점이다.184)『대명률(大明律)』 권4, 호률(戶律), 호역편(戶役篇), 입적자위법(立嫡子違法).

1428년(세종 10) 9월에는 사대부들의 대종·소종 제도를 『가례』의 대종·소종도(大宗小宗圖)에 의하여 시행하도록 하였다.185)『세종실록』 권41, 세종 10년 9월 14일(계해). 1429년(세종 11) 4월에는 가묘를 종손(宗孫)의 집에 설치하여 제사를 주관하도록 하고, 종자 가 유약하거나 질병이 있을 때만 지자(支子)가 제사를 대리토록 하였다.186)『세종실록』 권44, 세종 11년 4월 22일(정유). 또 사대부들의 제사 시에 여러 자손이 종가에 가서 일과 재물을 돕도록 하고, 멀리 있는 자는 편의상 자기 집에서 지방(紙榜)을 모셔 놓고 제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재산 상속 때 사당이 있는 집은 반드시 제사를 받드는 자손에게 주도록 하였다.187)『세종실록』 권35, 세종 9년 2월 10일(무진). 이러한 제사 상속 제도는 바로 『가례』의 종법 정신을 그대로 도입한 것이었다.

고례나 왕조례의 정신에 따르면 사대부들이 제사를 봉사(奉祀)하는 대수(代數)는 신분과 관품에 따라 한계가 있었다. 조선 왕조에서는 문무관 6품 이상은 3대까지, 7품 이하는 2대까지, 서민은 부모만을 제사토록 하였다.188)『경국대전(經國大典)』 권3, 예전(禮典), 봉사(奉祀). 그러나 아들이 여럿이 있을 때 종자를 기준으로 할 것인지, 지자를 기준으로 할 것인지가 문제였다. 종자의 관품이 높을 때는 문제가 없었지만, 지자보다 낮을 경우에는 문제가 되는 것이었다. 이 문제에 대하여 논의를 거듭한 끝에, 1437년(세종 19) 5월에는 조상 봉사의 대수를 여러 자손 중 관품이 높은 자를 기준으로 할 것을 결정하였다.189)『세종실록』 권77, 세종 19년 5월 14일(계묘).

한편 같은 해 6월에는 양자법(養子法)을 정하였다.190)『세종실록』 권77, 세종 19년 6월 3일(신유). 곧 동종(同宗)에서 지자를 입양하되 항렬의 차례를 준수토록 하고, 또 양가 부모의 동의를 얻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성(異姓)의 양자는 사당을 세우지 못하며, 본생부모(本生父母)나 본종(本宗)에 대한 강복(降服)을 인정치 않기로 하였다. 또 시양자(侍養子)의 시양부모를 위한 복상을 금지시키고,191)『세종실록』 권43, 세종 11년 3월 21일(정묘). 수양자(收養子)의 계승 자격을 박탈하여 종법 정신을 구현하고자 하였다.192)『세종실록』 권97, 세종 24년 7월 20일(무인). 이 역시 유교식 직계 혈연 위주의 관념이 법제화한 양상을 보여 주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형률에 『대명률』을 그대로 사용하게 하였으므로 종법의 위배자는 형사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장 80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그다지 중대한 범죄로 간주된 것은 아니었다. 이와는 별도로 『경국대전』 「예전」에 규정된 사서인의 제사 상속 원칙을 보면, 다음과 같다.

만약 적장자에게 후사가 없으면 중자(衆子)가, 중자에게도 후사가 없으면 첩자(妾子)가 제사를 받든다. (세주(細註)) 적장자로서 첩자만 있는 사람이 아우의 아들로 후사를 삼고자 하는 자는 허용한다. 스스로 첩자와 더불어 별도로 하나의 지파가 되고자 하는 자도 역시 허용한다. 양첩자(良妾子)에게 후사가 없으면 천첩자(賤妾子)가 승중(承重)한다. 무릇 첩자로 승중한 자는 그 생모를 사실(私室)에서 제사하되 자기 자신의 대에서 그친다.193)『경국대전』 권3, 예전, 봉사.

이 규정의 특징은 장자에게 후사가 없을 경우에는 입후를 우선하지 않고, 중자에게 봉사하게 한 것이다. 심지어 적자에게 후사가 없을 경우에는 첩자에게, 또 양첩자에게 후사가 없을 경우에는 천첩자에게라도 봉사하도록 할 수 있었다. 이것이 법전의 원칙이었다. 그러나 조선시대는 적서(嫡庶)의 차별 관념이 철저하던 사회였으므로 세주에서는 이러한 현실을 인정하여 첩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생의 아들로 입후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를 허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굳이 첩자에게 계승하고자 하여 대통에서 분리해 나와 첩자와 함께 별도로 한 지파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도 그 청을 들어 주도록 하였다.

『경국대전』 봉사조(奉祀條)는 종법의 원리를 법제화한 것이었으나 입후보다는 조선 고유의 관습 즉 형망제급을 중시한 것이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성리학과 예학(禮學)이 발달하면서 명분을 중시하여 입후를 선호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1580년(선조 13) 조정에서는 입후자와 후에 출생한 친자 사이에 발생하는 계승권에서 입후자의 기득권을 인정하는 결정을 내렸다.194)『선조실록』 권14, 선조 13년 10월 16일(임자). 조정의 입후(立後) 논의 전개와 귀결에 대해서는 지두환, 「조선 전기의 종법 제도 이해 과정」, 『태동 고전 연구』 창간호, 한림 대학교 태동 고전 연구소, 1984 참조. 이때 이이(李珥, 1536∼1584)가 올린 두 편의 ‘입후의(立後議)’는195)이이(李珥), 『율곡전서(栗谷全書)』 권8, 입후의 일(立後議一) 및 입후의 이(立後議二). 입후의 정신과 원칙을 강조한 대표적인 자료가 된다. 이러한 조정의 결정은 효종대에 재확인을 거쳐196)『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권86, 예고(禮考), 입후(立後). 『속대전(續大典)』에서 정식으로 입법화되었다. 이로써 입후는 확실한 법적 보장을 받게 되었다. 그 조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장자가 죽고 후사가 없어 다른 아들을 세워 봉사케 하였다면 장자의 부인은 총부(冢婦)로 논할 수 없다. …… 무릇 자식이 없어 입후한 사람이 이미 관아에 정장(呈狀)을 올려 입안(立案, 확인서)을 발급해 주었으면 비록 혹시 아들을 낳더라도 그는 당연히 중자가 되며 입후한 자로 하여금 봉사하게 한다.197)『속대전(續大典)』 권3, 예전, 봉사.

이러한 법적 조치와 적서 차별의 관념은 결국 조선 후기에 입후 선호의 풍조를 만연시켰다. 그래서 양반가에서는 대종가와 소종가를 따질 것 없이 모두 입후를 당연하게 여겼다. 또 입후를 위해 원근을 따지지 않고 동종의 조카를 얻기 위해 백방으로 힘을 쓰고, 이 과정에서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었다.198)『증보문헌비고』 권86, 예고, 입후. 입후는 원래 남의 지자를 데려와 후사로 세우는 것이 도리였으나 어느 때부터인가 동생이나 친족의 장자를 데려오는 것이 풍조가 되었고, 심지어 남의 독자를 데려오는 경우도 있었다.199)김장생(金長生), 『사계전서(沙溪全書)』 권35, 의례문해(疑禮問解), 종법(宗法), 독자위대종후(獨子爲大宗後). 이것은 입후 제도의 말폐(末弊)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사대부 사회에서 종법이 보편화하게 된 것은 유교 경전의 원칙과 법제적인 측면 때문이었다. 또 국초 이래로 『가례』가 국가 차원에서 보급·시행되고, 16세기 이래로 성리학이 발달하면서 유교 예속이 생활화한 데서 말미암은 것이었다.

『예기』 등의 경전에 수록된 종법은 원래 제왕가를 위해 제정된 것이 아니라 제후의 공족을 주된 대상으로 하여 마련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 계승의 원리는 왕가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왕가의 종통 원리와 사대부의 종법 원리가 같은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200)『인조실록』 권24, 인조 9년 1월 28일(임인) 소재(所載) 장유(張維)의 전례문답(典禮問答). 이 때문에 종법은 조선의 왕위 계승에서도 중요한 원리로 이해되었다.

왕위의 계승에서 장자 상속의 원칙은 조선시대 이전에 이미 확립되어 있었다. 그러나 반드시 원칙대로 시행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왕위의 계승에는 종법만이 유일한 원칙은 아니었으며, 능력이나 도덕성 같은 것도 역시 중요한 조건이 되었다. 또 특수한 경우에는 형제 상속도 부차적인 원리로 인정되고 있었기 때문에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성리학과 예학이 발달한 16세기 후반부터는 왕실의 종통에 관련된 전례나 계승 문제를 활발하게 논의하기 시작하였고, 17세기부터는 그것이 커다란 정치적 분쟁으로 비화(飛火)하기도 하였다. 이때 특히 문제가 되었던 것은 광해군·원종·효종·경종·영조 등의 계승이나 그들의 종통에 관련한 하자(瑕疵)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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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는 여러 왕대에 걸쳐 많은 논쟁과 갈등을 야기하였고, 크고 작은 정치적 변란을 초래하였다. 인조반정 직후의 원종 추숭(元宗追崇), 현종대 두 차례의 복제 예송(服制禮訟), 영조대의 세제 책봉(世弟冊封) 및 대리청정(代理聽政)과 신임옥사(辛壬獄事) 등이 모두 직·간접으로 왕실의 종통 문제에 결부되어 일어난 정치적 변란이었다. 이러한 문제는 조선 초기였다면 별로 쟁점화하지 않았겠지만, 조선 후기에는 모두 문제가 되었다.

유교 사회였던 조선시대에는 16세기 이후 성리학의 이해가 심화되고 17세기에 예학이 발달하면서부터 양반 사대부 사회에 종법적 사고가 고착되어 가고, 사회 저변에 널리 보급되었다. 그것은 왕실의 계승 원리에도 적용되었고, 서민들의 생활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렇게 사회 전반에 걸쳐 종법 의식이 보편화되자 장자 상속이나 입후 제도가 확고히 자리를 잡았고, 남아 선호(男兒選好) 등 여러 가지 사회적 폐단도 낳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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