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4권 유교적 사유와 삶의 변천
  • 제6장 유교적 사유 양식의 고수와 근대적 전환
  • 1. 서구 문명의 도전 시작
권오영

조선 후기 사회는 성리학의 심화와 더불어 학술과 문화의 양상이 다양하였다. 성리학에서 벗어나 서학(西學)을 익히거나 북학(北學)을 부르짖는 학자가 나타나는가 하면, 경전의 주자학적 해석에 대해 참신하고 비판적인 견해를 제기하는 이도 있었다. 박지원(朴趾源), 홍대용(洪大容), 박제가(朴齊家)로 대표되는 북학파 학자와 이익(李瀷), 정약용(丁若鏞)으로 대표되는 학자들은 이미 성리학을 극복하고 새로운 학문적 방향을 제시하며 근대의 여명(黎明)을 알리고 있었다. 그 뒤를 이어 최한기(崔漢綺)는 자신의 학문을 기학(氣學)으로 선언하여 유학을 새롭게 해석하여 제시하였다.

16세기에 이황(李滉)이 시작한 주자학 탐구는 17세기에 송시열(宋時烈)의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를 거쳐 19세기에 이항로(李恒老)의 『주자대전차의집보(朱子大全箚疑輯補)』에 이르러 집대성되었다. 심지어 18세기 후반부터 국왕들도 이제 시문을 지어 문집을 간행하기 시작하였고, 호학(好學)의 군주 정조는 『홍재전서(弘齋全書)』라는 방대한 문집을 남겼다. 그는 북학자이면서 동시에 주자학자였다. 박제가, 정약용 등을 극히 우대하면서도 주자학자인 송시열의 문집을 『주자대전』에 버금간다고 생각하고 『송자대전(宋子大全)』을 편찬하게 하였으며, 주자와 송시열의 심(心)에 대한 자료 를 모아 『양현전심록(兩賢傳心錄)』을 편찬하였다.

그런가 하면 유학자들은 문중(門中)마다 서원을 세워 그 고을을 대표하는 학자나 조상을 향사(享祀)하고 서원을 중심으로 강학(講學) 활동을 하였다. 서울의 도봉 서원(道峯書院), 경기도의 석실 서원(石室書院)·한천 서원(寒泉書院)·심곡 서원(深谷書院), 충청의 돈암 서원(遯巖書院)·화양동 서원(華陽洞書院)·황강 서원(黃江書院), 영남의 소수 서원(紹修書院)·옥산 서원(玉山書院)·도산 서원(陶山書院)·덕천 서원(德川書院)·호계 서원(虎溪書院), 호남의 필암 서원(筆巖書院)·고암 서원(考巖書院) 등은 대표적인 강학 공간이었다. 이들은 자기 학파의 학설을 더욱 공고히 지키기 위해 학파 간에 학설 논쟁을 치열하게 전개하기도 하였다. 특히 기호(畿湖) 지역에서는 18세기 100년간에 걸쳐 서울·경기 학계와 충청 학계 사이에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 논쟁이 일어났고, 영남에서도 19세기에 이황의 학설을 새롭게 정리하려는 경향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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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서원도(道峰書院圖)
도봉서원도(道峰書院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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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벽두(劈頭)를 휩쓴 서학에 대한 정치적·사상적 탄압은 새로운 학풍을 짓눌러 버렸다. 그러다 보니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자신의 학문을 저술로 남기는 활동에 들어갔고, 최한기는 서울 상동의 서재에서 저술 활동에 종사하여 불후의 명저를 집필하였다. 이 두 사람은 아무도 화답해 주지 않는 고상한 곡조를 타며 먼 미래에 자신의 학문적 업적을 알아줄 이를 기다리며 유교의 새로운 전환을 모색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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