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5권 기록과 유물로 본 우리 음악의 역사
  • 제1장 음악 만들기
  • 2. 제사와 축제로서의 음악, 선사시대
권오성

한민족의 역사를 통하여 전승되어 온 음악과 무용은 당시 사람들이 산이나 들에서 일하면서 부르던 노래와 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문헌 기록이나 고고학적 유물이 거의 없어 논급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우리나라의 선사 또는 상고시대 문화는 주로 중국 문헌을 통하여 살펴볼 수 있다. 고대 중국인들은 우리 민족을 이족 또는 동이족(東夷族)이라 불렀으며 동이족의 음악을 매(昧)·이(離)·주리(侏離)라고 불렀다. 중국 진나라 진수(陳壽)가 297년에 지은 『삼국지(三國志)』 「위지 동이전(魏志東夷傳)」과 중국 남북조시대에 남송의 범엽(范曄)이 편찬한 『후한서(後漢書)』 「동이전」에 선사시대 우리나라 음악 문화의 단면이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부여에는 매년 12월에 영고(迎鼓)라는 제천 행사가 있었고, 고구려는 10월에 동맹(東盟)이라는 행사를 열었으며, 동예는 10월에 무천(舞天)이라는 제천 행사가 있었다고 한다.

부여…… 은정월(殷正月) 나라에 대회(大會)를 열고 연일 음식을 먹고 노래 부르고 춤을 추는데 이를 영고라고 한다.

고구려…… 그 백성들이 노래와 춤을 즐겼으므로 나라의 각 마을에서 남녀가 밤에 서로 어울려 노래하고 유희를 하였다. …… 10월에 하늘에 제사하고 나라에 대회를 여니 이를 동맹이라 하였다.

예…… 10월마다 늘 하늘에 제사하고 밤낮 술 마시며 노래 부르고 춤을 추니 이를 무천이라 하였다.1)『삼국지(三國志)』 권30, 위지 동이전(魏志東夷傳). 영고를 은정월(殷正月)에 행해졌다고 하나, 부여가 은력(殷曆)을 채용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은력이 축월(丑月)을 새해 첫 달로 하였으므로 12월에 제천 행사를 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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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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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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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10월에 하늘에 제사하고 나라에 대회를 열었던 데에서 볼 수 있듯이 부여 또한 정월에 국중 대회(國中大會) 곧 나라 안의 큰 모임을 열고 나라의 번영과 안녕을 하늘에 비는 제천 의식 등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이때에 노래 부르고 춤을 추었다는 데에서 악무(樂舞)의 원류를 찾아볼 수 있겠다.2)송방송, 『한국 음악 통사』, 일조각, 1984, 36∼38쪽 참조. 부여·고구려·예의 사람들이 즐긴 가무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며 노래 부르고 춤을 추었다는 기록을 보면 우리 민족은 본래부터 가무를 좋아하였던 듯하다. 그리고 여럿이 함께 부른 노래의 선율은 강강술래 같은 민요처럼 간단한 가락이었을 듯싶고, 모두 같이 추었다는 춤은 손뼉을 치면서 간단한 동작을 곁들인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3)송방송, 『한국 고대 음악사 연구』, 일지사, 1985, 150쪽.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예의 무천 외에 남부 지방에도 음악과 관계된 습속(習俗)이 있었다.

마한…… 5월에 씨 뿌린 후 항상 귀신에게 제사하고 무리를 지어 노래하고 춤추며 술 마시기를 낮밤 쉬지 않았다. 그 춤은 10여 명이 서로 따라가면서 땅을 밟고 구부리고 펴서 손발이 잘 맞았는데, 절주(節奏)는 탁무(鐸舞)와 같아서 10월 농사일이 끝나고서도 이 같은 행사를 다시 하였다.4)『삼국지』 권30, 위지 동이전.

마한 사람들이 5월에 씨를 뿌리고 나서 하는 제사나 10월에 농사일을 마친 후에 하는 제사는 농경 사회에 있던 전형적인 음악 문화로 여겨진다. 이러한 마한의 음악 문화는 오늘날 모심기와 김매기 같은 농사일을 마을에서 공동으로 행할 때에 연주하는 두레풍장굿이라는 농악(農樂)의 한 형태로 전승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5)송방송, 앞의 책, 1985, 154∼1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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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창동 출토 현악기 복원품
신창동 출토 현악기 복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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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한에서는 굿을 치르는 동안 밤낮으로 가무를 계속하는데, 그 절주가 중국의 탁무와 같았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춤의 반주에 금속 타악기를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시골 도당굿이나 별신굿에도 징과 북의 반주에 맞추어 가무를 베푸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매우 ‘소란스럽게’ 연행되는 것이 우리 음악 문화의 특징적인 모습이라고 하겠다.

『후한서』에는 진한의 습속에 대하여 “노래하고 춤추며 음주하고 고(鼓)와 슬(瑟)을 연주하기를 즐기는 습속이 있었다.”6)『후한서(後漢書)』 권85, 동이열전(東夷列傳)75, 한(韓).고 기록되어 있으며, 변한도 진한과 같은 습속이 있다고 『삼국지』의 기록에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고와 슬은 현악기로서, 이 고대 현악기는 그 뒤에 생긴 가얏고와 거문고 등과 같은 뉘어 타는 현악기의 원형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 악기로 연주한 악곡이 어떤 성격의 곡이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가야의 우륵(于勒)이 만든 12곡 가운데 아홉 곡이 가야 여러 지방의 민속 음악을 편곡한 것이었던 사실에 비추어 지방의 민요곡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7)송방송, 앞의 책, 1985, 158쪽.

고조선의 음악 또한 부족의 사회적 습속과 관계가 있었다. 그리고 이 습속은 대체로 제사와 관계된 행사였음이 입증되고 있다.8)양주동, 『고가 연구(古歌硏究)』, 박문 출판사, 1954에 따르면 영고는 ‘마지굿’, 동맹은 ‘ㅣ 또는 ‘한’, 무천은 ‘한춤’이라고 고증되어 있다. 음악의 시원(始原)이 어떠하든 사람이 지혜가 발달하고 지식을 갖추어 공동체를 형성하는 그 시기부터 자연과 주위에 대한 경외심 내지 공포에 의하여 개인 심리 현상이 공동체적인 사회 심리화를 이루고 여기서 제사와 축제가 형성되는 것이라고 해석된다. 제사와 축제가 형성되면 그 속에서 음악이 만들어질 수 있고, 혹은 반대로 이미 불리고 있던 음악의 단편들을 모아 축제를 만들고 이것과 결합하여 제사의 형식이 이루어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제사와 축제는 음악과 어떠한 관련이 있을까?

부족 국가(部族國家)를 형성하고 있던 선사시대에는 제사와 축제의 습속이 있었으며, 여기에 사용된 것이 음악과 춤이었다. 음악과 춤은 분리되지 않은 종합 예술체로 제사와 축제에 연행되었으며, 이때 음악을 만들고 음악을 연행한 의술자(醫術者)나 무당(巫堂) 등의 행위자는 그 부락의 어른이었다. 그리고 음악이 아직 분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음악인이 따로 없었으며, 음악 만들기도 연주만을 위한 독립된 악곡을 위해 이루어졌다고 하기보다 제사와 축제의 집행 등에 필요한 기능을 가지고 행해졌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의 선사 또는 상고시대 문화는 제천 의식과 관련하여 우리 민족의 노래와 춤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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