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5권 기록과 유물로 본 우리 음악의 역사
  • 제1장 음악 만들기
  • 5. 중국 음악의 창의적 수용, 고려
  • 당악
권오성

당악(唐樂)은 글자 그대로 하면 당나라의 음악이라는 뜻이나, 고려시대에는 신라에서 전승한 당악의 바탕 위에 송·원·명나라에서 들어온 음악을 첨가시킨 넓은 의미로 바뀌었다. 따라서 고려의 당악은 중국 음악의 통칭으로 향악에 대칭되는 음악 양식으로 개념이 바뀌게 되며 이러한 넓은 의미의 당악은 조선시대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우방악(右坊樂)과 좌방악(左坊樂)으로 나누고 향악을 우방악, 당악을 좌방악으로 하는 등 양부악으로 구별하고 있다.38)서긍, 『선화봉사고려도경』 권40, 동문, 악률.

전조(前朝, 고려) 광종이 사신을 보내어 당나라 악기와 악공을 청하여 그 자손이 대대로 그 업을 지키게 하였는데, 충렬왕 때에 이르러서는 김여영(金呂英)이 맡았고, 충숙왕 때에는 그 손자 김득우(金得雨)가 맡았습니다. 또 송나라 악서(樂書)를 상고하면 “원풍 연간(元豐年間, 1078∼1085)에 고려가 악공을 구하여 가르쳤다.” 하였습니다.39)『태종실록』 권22, 태종 11년 12월 15일 신축.

당악이 고려에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이 기록에 따르면 광종 때였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당악기와 음악인을 초청하고 그 자손으로 하여금 음악을 세습시킨 것이다. 문종 때에는 송나라에 악공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여 초청해 온 송나라의 교방 악사들이 고려에 몇 년 동안 머무르면서 당악 연주와 당악 정재를 가르쳐 주고 돌아가기도 하였다. 한편으로 고려에서 송나라에 사절로 갈 때에는 반드시 재물(財物)을 가지고 가서 송나라 악공에게 당악 정재와 당악기 및 노래를 배우고는 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고려의 “악무(樂舞)는 매우 성대해져 보고 들을 만하게 되었다.”40)서긍, 『선화봉사고려도경』 권40, 동문, 악률.는 평을 듣기에 이른다.

고려에 들어온 송나라 음악은 교방악(敎坊樂)과 사악(司樂)이라는 두 형식의 음악이다. 교방악은 여인들의 노래와 춤을 말하고, 사악은 노래와 관현악으로 연주하는 형식이다. 1073년(문종 27) 2월에 교방의 여제자(女弟子) 진경(眞卿) 등 13명이 새로이 전하는 답사행가무(踏沙行歌舞)를 연등회(燃燈會)에서 쓸 것을 상주(上奏)하여 왕의 재가를 얻어 공연하였다. 또 같은 해 11월 팔관회(八關會)에서는 교방의 여제자 초영(楚英) 등이 새로 전하는 포구락(抛毬樂)과 구장기별기(九張機別伎)를 연주하였으며, 1077년(문종 31) 2월 연등회 때에는 교방의 여제자 초영이 왕모대(王母隊)를 공연하였는데, 55명이 춤을 추며 ‘군왕만세(君王萬歲)’, ‘천하태평(天下泰平)’의 네 글자를 나타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 문종 때에 송나라의 교방악이 본격적으로 들어오면서 새로이 전해진 포구락·구장기별기·왕모대 등은 연등회와 팔관회 같은 큰 행사에서 공연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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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악지」에 전하는 당악 정재는 헌선도(獻仙桃)·수연장(壽延長)·오양선(五羊仙)·포구락·연화대(蓮花臺)의 다섯 가지로, 모두 당악이라는 명칭 아래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 다섯 당악 정재에 쓰인 음악은 1493년(성종 24)에 『악학궤범(樂學軌範)』을 편찬할 때까지 거의 그대로 연행되었다.

문종 때에는 대악관현방(大樂管絃房)의 각 관원에게 녹봉(祿俸)을 정하여 당악 전수에 전념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쌀 1과(科) 10섬은 당무업 겸 창사업(唐舞業兼唱詞業), 생업사(笙業師), 당무사 교위(唐舞師校尉) 각 한 명이 받았으며, 8섬은 어전 양부 도청(御前兩部都廳)이 받았고, 7섬은 비파업사 교위(琵琶業師校尉)와 합문사 동정(閤門使同正)이 받았다. 그리고 2과 8섬은 장고업사(杖鼓業師) 두 명, 당적업사(唐笛業師) 두 명, 향비파업사(鄕琵琶業師) 한 명, 당비파업사(唐琵琶業師) 한 명, 방향업사 교위(方響業師校尉) 한 명, 필률업사(觱篥業師) 한 명, 가무박업사(歌舞拍業師) 한 명, 중금업사(中笒業師) 한 명이 받았다.41)『고려사』 권80, 지34, 식화(食貨)3, 녹봉(祿俸) 제아문공장별사(諸衙門工匠別賜). 당악 정재와 각종 당악기 및 노래를 가르치는 악사의 수와 봉록(俸祿)까지 정하여 국가적 차원에서 관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 「악지」에는 헌선도·수연장·오양선·포구락·연화대의 다섯 정재 외에도 모두 43곡의 당악 이름과 가사가 기록되어 있다. 이 많은 사악 가운데 현재까지 전하는 것은 낙양춘(洛陽春)과 오양선의 정재 중에서 함께 부르던 보허자령(步虛子令)뿐이다. 그러나 이 두 곡도 조선 선조 이후로 점차 향악 연주법으로 바뀌고 가사를 상실하게 되면서 완전히 향악으로 동화되고 말았다.42)장사훈, 「고려시대의 음악」, 『한국 음악사』 한국 예술사 총서 Ⅲ, 대한 민국 예술원, 1985 참조. 이렇듯 고려의 왕립 음악 기관에서 새로이 수용한 송나라의 당악 정재는 고려시대의 당악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향악 정재의 형성과 발전에도 커다란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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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고려는 약 100년간 원 간섭기를 거쳤으면서도 원나라 음악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았다. 원나라 음악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내용은 호적(胡笛)·호무(胡舞)·호가(胡歌)를 왕실이나 귀족 사회에서 잠시 즐겼다거나, 호적이라 칭하는 태평소(太平簫)가 들어온 점, 대취타(大吹打)의 내취(內吹)를 조라치(吹螺赤)라는 몽고말로 쓰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삼국사기』 「악지」에는 통일신라에서 연주된 당악기로 박판과 대고 두 개가 나타나고 있으며, 고고학 자료를 통해 당비파·당피리·박의 세 가지가 더 있는 것이 밝혀졌다.43)송방송, 앞의 책, 1985, 121∼138쪽. 이러한 통일신라의 당악기가 고려시대에 어떻게 전승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밝혀진 내용이 없다. 다만, 광종 때 중국에 사신을 보내어 당악기를 요청하여 그 자손들이 충숙왕 때까지 이어져 내려왔다는 점,44)『태종실록』 권22, 태종 11년 12월 신축(15일). 문종 때에 포구락 등의 당악 정재가 연주되기도 하고 당악기를 가르치는 악공들의 녹봉이 규정되었다는 사실 등을 통해 문종 때에는 당악기가 널리 연주되고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고려사』 「악지」에 기록된 당악기는 방향(方響)·퉁소(洞蕭)·저(笛)·필률·비파·아쟁(牙箏)·대쟁(大箏)·장고(杖鼓)·교방고(敎坊鼓)·박(拍)이다.45)『고려사』 권71, 지25, 악2, 당악(唐樂), 악기. 이 가운데 방향·장고·교방고·박은 타악기, 비파·아쟁·대쟁은 현악기, 퉁소·저·필률은 관악기에 속한다. 이 10종의 당악기 외에도 『고려사』에는 생·오현금(五絃琴)·쌍현금(雙絃琴)·대고(大鼓)·지(篪)·소(簫)·훈(壎) 등의 당악기가 나타나는데, 이것들은 모두 1114년(예종 9)에 송나라에서 들여온 악기이다.46)『고려사』 권70, 지24, 악1. 그런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당악기의 편제에도 변화가 계속 나타나 당비파·장고·당적·방향·당필률·박은 계속해서 당악 연주의 가장 기본적인 악기로 사용되었으나 나머지 악기는 아악기나 향악기로 편성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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