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5권 기록과 유물로 본 우리 음악의 역사
  • 제1장 음악 만들기
  • 6. 예악으로서의 음악, 조선
  • 향악의 변화
권오성

조선 전기의 향악은 대부분 고려시대의 향악을 계승하였는데, 새로 창업한 조선의 역사적 당위성과 새 왕조를 찬양하기 위한 신악 제정 사업의 일환으로 크게 진작되었다. 그런데 이때의 음악 내용은 대부분 고려시대부터 전승된 향악에 기초하여 새로 지은 악장을 얹어 불렀기 때문에 향악 자체의 변화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새로운 향악곡의 창제는 세종 때에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향악과 고취악을 참작하여 만든 정대업·보태평·발상(發祥)·봉래의(鳳來儀)·전인자·여민락·치화평(致和平)·취풍형(醉豊亨)·후인자 등을 이때 새로 만들었다. 이 가운데 정대업·보태평·여민락은 오늘날까지 전해 오는 주요 향악곡이다. 조선 전기의 향약곡은 『대악후보(大樂後譜)』·『시용향악보』·『금합자보(琴合字譜)』 등에 수록되어 있다. 『대악후보』와 『시용향악보』를 중심으로 조선 전기의 향악곡을 정리하면 표 ‘조선 전기 향악곡’과 같다.

<표> 조선 전기 향악곡
수록책
악곡명
세종실록악보 대악후보 시용향악보 금합자보 경국대전
치화평(致和平)    
취풍형(醉豊亨)    
봉황음(鳳凰吟)    
만전춘(滿殿春)      
진작(眞勺)      
이상곡(履霜曲)      
납씨가(納氏歌)    
횡살문(橫殺門)    
감군은(感君恩)      
서경별곡(西京別曲)      
만대엽(慢大葉)      
한림별곡(翰林別曲)    
쌍화점(雙花店)      
보허자(步虛子)    
영산회상(靈山會相)        
북전(北殿)    
동동(動動)      
정읍(井邑)        
자하동(紫霞洞)      
유림가(儒林歌)      
사모곡(思母曲)      
나례가(儺禮歌)        
정석가(鄭石歌)      
청산별곡(靑山別曲)        
유구곡(維鳩曲)        
귀호곡(歸乎曲)        
생가요량(笙歌寥亮)        
상저가(相杵歌)        
풍입송(風入松)        
야심사(夜深詞)        
성황반(城皇飯)        
내당(內堂)        
대왕반(大王飯)        
잡처용(雜處容)        
삼성대왕(三城大王)        
군마대왕(軍馬大王)        
대국(大國) 1·2·3        
구천(九天)        
별대왕(別大王)        
여민락(與民樂)      
✽송방송, 「음악」, 『한국사』 27, 국사 편찬 위원회, 1996, 411∼412쪽.

조선 전기 향악곡은 유래에 따라 고려의 향악곡을 전승한 것과 조선 초에 창작한 것으로 나눌 수 있다. 고려의 향악곡 갈래에 드는 것으로는 만전춘(滿殿春)·진작(眞勺)·자하사(紫霞詞)·야심사·사모곡(思母曲)·서경별곡(西京別曲)·북전(北殿)·청산별곡(靑山別曲)·한림별곡·동동·정읍·풍입송·정석가(鄭石歌)·이상곡(履霜曲)·상저가(相杵歌)·유구곡(維鳩曲)·귀호곡(歸乎曲) 등 17곡이 있다. 한편 고려의 향악곡은 조선 초에 창작된 향악곡의 선율에 많이 차용되기도 하였다. 곧, 청산별곡과 서경별곡은 납씨가(納氏歌)와 정동방곡의 선율로 쓰이고, 풍입송은 유황곡(維皇曲)과 보태평 중의 융화(隆化) 등의 바탕이 되었다.

그런데 조선 왕조의 유교 이념에 부합하지 않는 고려의 향악곡은 가사나 곡조가 비판을 받았으며 상당 부분을 개작(改作)하였다. 개작을 한 주요한 이유는 고려가 삼국시대 말기의 음악을 이어받아 그대로 썼고, 또 송나라의 음악을 따라 교방악으로 사용하였으며, 말년에 이르러서는 음란한 소리가 많았는 데에도 조회와 연향에 모두 그대로 썼으므로 고려악을 그대로 인습(因襲)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것이었다.65)『태종실록』 권3, 태종 2년 6월 정사(5일). 그리하여 만전춘·후정화(後庭花)·서경별곡·쌍화점(雙花店) 등을 개작하였는데, 그것은 가사의 내용이 남녀 사이의 사랑을 읊은 것이어서 비루하고 저속하며 음란하기 때문이었다. 조선 사대부들은 이러한 음악을 “궁중에서 베푸는 작은 연회나 관사(觀射)와 같은 활쏘기 대회에 거둥하실 때는 써도 무방하지만, 정전(正殿)에서 임금이 군신을 대할 때에는 쓰지 말아야”66)『성종실록』 권219, 성종 19년 8월 갑진(13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고려의 향악곡인 쌍화점은 성종대에 쌍화곡(雙花曲)으로 개작되면서 가사도 한문으로 새로 고치고 음악도 편곡하였다. 『대악후보』의 쌍화점과 『시용향악보』의 쌍화곡의 내용 일부를 살펴보면 원래 담고 있던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의 내용은 군왕의 덕을 찬미하는 내용으로 바뀌었음을 볼 수 있다.

쌍화점

솽화뎜에 솽화 사라 가고신디

휘휘아비 내 손모글 주여이다

이 말삼미 이뎜밧귀 나명들명

쌍화곡

寶殿 之傍 雙花 薦芳

來瑞 我王 馥馥 其香

燁燁 其光 允矣 其祥

한편, 고려 속악이 전승된 형태의 무가(巫歌)에 속하는 향악곡도 나타나고 있는데, 성황반(城皇飯)·내당(內堂)·대왕반(大王飯)·잡처용(雜處容)·삼성대왕(三城大王)·군마대왕(軍馬大王)·대국(大國)·구천(九天)·별대왕(別大王) 등 아홉 곡이다. 성황반·대왕반·삼성대왕·대국은 민간 신앙인 서낭 신앙을 기반으로 서낭당에 제사상을 차려 놓고 제사를 지낼 때 불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무가이다. 내당은 내당 또는 내불당(內佛堂)에서 무당이 굿을 할 때 부르던 노래이고, 잡처용은 궁중에서 지내는 나례 의식 에서 무당이 불렀을 것으로 보고 있다. 군마대왕은 궁중의 여마(輿馬)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인 사복시(司僕寺)에서 말신(馬神)에게 제사를 지낼 때 무당이 불렀던 무가로 생각된다. 구천은 도교(道敎)의 신인 구천현녀(九天玄女)에게 제사를 지낼 때 부르던 무가였으며, 별대왕은 별신사(別神祠)에서 제사를 지낼 때 무당이 부르던 무가였다. 그런데 이들 무가가 궁중의 악장 가운데 향악곡으로 채택됨으로써 무가로서의 기능과 악장으로서의 기능을 복합적으로 갖추게 되었을 것이다.67)김동욱, 『한국 가요의 연구』, 을유 문화사, 1961 참조.

그런데 이들 고려 향악곡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거의 사라진 듯하다. 『시용향악보』나 『금합자보』에 전하는 고려의 향악곡이 조선 후기에 편찬한 악보에서 더 이상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조선 초의 향악 창작은 세종대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우리나라의 음악이 비록 다 잘 되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반드시 중국에 부끄러워할 것은 없다. 중국의 음악인들 어찌 바르게 되었다 할 수 있겠는가.”68)『세종실록』 권50, 세종 12년 12월 계유(7일).라는 세종의 향악에 대한 인식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세종 때 만든 대표적인 향악은 봉래의(鳳來儀)·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정대업(定大業)·보태평(保太平)이다.

봉래의는 1445년(세종 27) 4월에 왕명으로 용비어천가의 가사에 맞추어 작곡한 음악인데, 그 음악에 맞추어 춤과 노래로 공연하던 종합 공연 예술의 총칭으로도 사용하였다. 음악은 전인자·진구호(進口號)·여민락·치화평·취풍형·후인자·퇴구호(退口號) 등의 일곱 곡으로 구성되었다. 전인자와 후인자는 관현악으로만 연주하는 전주곡과 후주곡에 해당하는 악곡이고, 진구호와 퇴구호는 정재를 추는 여기(女妓)들이 관현 반주 없이 부르는 일종의 노래이다. 여민락은 한문 가사의 용비어천가를 관현 반주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이고, 치화평과 취풍형은 국한문으로 된 용비어천가 전편을 노래하던 음악이다.

용비어천가는 세종의 선조인 목조(穆祖)부터 태종에 이르는 여섯 대의 행적을 노래한 125장의 서사시(敍事詩)로 봉래의와 마찬가지로 1445년에 완성되었다. 가사는 순한문으로 된 것과 국한문으로 된 것 두 가지가 있다. 순한문 가사는 여민락에 쓰였고, 국한문 가사는 치화평과 취풍형에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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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비어천가
용비어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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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업과 보태평은 1447년(세종 29)에 만든 악곡으로 원래는 회례 의식에서 춤을 추는 문무(文舞)의 반주 음악으로 만들었다. 그 내용은 조선 왕조 건국에 직간접으로 공을 세운 역대 왕과 선조의 덕을 찬양하고 있으며, 세종이 손수 지었다고 하나 엄밀한 의미에서 창작은 아니고, 조선 초의 고취악과 향악을 바탕으로 창제하였다고 한다.69)장사훈, 『세종조 음악 연구』 서울 대학교 출판부, 1982 참조. 정대업은 처음 만들었을 때에는 15곡으로 구성되었으나, 1463년(세조 9)에 개작되어 종묘 제례악으로 채택되면서 11곡으로 줄어 보태평과 같아졌다.

향악기는 고려시대의 향악기를 거의 그대로 전승하여 연주에 사용하였다. 1430년(세종 12)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에서는 악공(樂工)의 취재에 쓸 향악기로 거문고(玄琴)·가얏고·비파·대금·장고·해금·당비파·향피리의 여덟 종을 열거하고 있는데,70)『세종실록』 권47, 세종 12년 3월 무오(18일). 이 가운데 당비파만 『고려사』 「악지」의 향악기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1493년(성종 24)에 간행한 『악학궤범』에는 거문고·가얏고·비파·젓대·향피리·소관자(小管子)·초적(草笛) 등 일곱 종을 향악기로 분류하고 있다.71)『악학궤범』 권7, 향부악기도설. 그리고 『악학궤범』에는 세종대에 향악기로 분류하였던 해금·장고·당비파를 모두 당악기로 구분해 놓고 있다. 이는 『악학궤범』이 역사적 유래에 따라 악기를 분류한 데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이해된다.72)송방송, 앞의 글, 1996, 410쪽.

성종대에 새로 나타난 향악기로는 소관자와 초적이 눈에 띠는데, 이 두 악기는 1744년(영조 20)까지 궁중에서 연주되었다.73)장사훈, 『한국 악기 대관』, 문화재 관리국, 1969, 219쪽. 그런데 1900년대 초에 간행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보이지 않고 있어 영조 이후로는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악학궤범』에 따르면 “소관자는 목동(牧童)에서 나왔으며, 연향과 제향 음악에 사용하지는 않지만, 그 소리가 청량하고 불기 편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소관자의 악기 그림을 보면 입으로 부는 취공(吹孔)이 하나 있고, 지공(指孔)이 세 개가 있는 관악기이다. 초적은 풀피리의 하나로 나무껍질이나 풀 잎사귀를 입에 물고 불어 소리를 내었다. 이렇게 볼 때 조선시대는 고려의 향악기를 그대로 전승하면서 소관자와 초적이 추가되어 숫자상으로는 늘어난 모습이다. 그러나 대표적인 향악기로는 거문고·가얏고·젓대·향비파·향피리를 연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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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관자
소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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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향당교주가 정재의 반주 음악에서 보편화되면서 향악기의 악기 편성은 점차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1829년(순조 29) 명정전(明政殿)의 진찬 의식 때에 정재의 반주 음악을 위한 향당교주의 악기 편성은 가(笳)·피리·젓대·당적(唐笛)·퉁소·비파·해금·방향·장고·생(笙)·거문고·가얏고·아쟁·교방고 등으로 향악기와 당악기가 혼합되어 있다.74)『진찬의궤(進饌儀軌)』 기축(己丑) 권3 : 국립 국악원, 『한국 음악학 자료 총서』 3, 1980. 이와 같은 사실은 향당교주를 본격적으로 정재의 반주 음악으로 사용하면서 향악과 당악 사이에 음악 내용은 물론 악기 사용에서도 구분 편성이 거의 모호해졌음을 말해 준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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