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5권 기록과 유물로 본 우리 음악의 역사
  • 제1장 음악 만들기
  • 6. 예악으로서의 음악, 조선
  • 민간 음악의 형성과 발전
권오성

조선 후기 민간 음악을 발전시키는 데 공헌한 사람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양반 가문 출신의 사대부와 실학자들로, 이들은 거문고를 애용하였다. 이들의 거문고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거문고 악보를 펴내는 동기가 되었으며, 이득윤(李得胤, 1553∼1630)의 『현금동문유기(玄琴東文類記)』(1620)나 서유구(徐有榘, 1764∼1845)의 『유예지(遊藝志)』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두 번째는 탄탄한 사회 경제적 기반을 지니고 있던 중인 들이다. 음악의 수용가로 출발한 이들은 점차 직접 가객(歌客) 또는 풍류객(風流客)이 되어 조선 후기 음악사를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시켰다. 숙종·영조시대를 대표하는 가객 김천택(金天澤)과 김수장(金壽長, 1690∼?), 거문고·퉁소·비파의 명인으로 일컬어졌던 김성기(金聖基)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세 번째는 조선 사회의 천인인 광대들이다. 이들은 판소리에서 창을 부르는 직업적인 예능인으로 활약하면서 조선 후기 공연 예술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79)송방송, 앞의 글, 1998, 559∼5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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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구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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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나 중인 출신의 가객이 발전시킨 음악으로는 정가(正歌)라고도 일컫는 가곡(歌曲)·가사(歌詞)·시조(時調)가 대표적이다. 가곡은 거문고 반주를 필수로 하는 점에서 금가(琴歌)와 통한다. 1610년(광해군 2) 『양금신보(梁琴新譜)』를 펴낸 시기만 하더라도 금가에는 만대엽(慢大葉)·북전(北殿)·중대엽(中大葉)·감군은(感君恩) 등의 곡이 있었다. 18세기에 이르러 김천택·김수장을 비롯한 여러 가객이 모인 경정산가단(敬亭山歌壇)이 형성됨으로써 시조와 함께 가곡이 널리 불렸다.

늦은한잎이라고도 하는 만대엽은 본래 중대엽·삭대엽과 더불어 세 틀을 이루는 곡이다. 이 세 곡은 거의 동시에 발생하였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유행은 만대엽부터 차례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만대엽은 조선 초기부터 애호되다가 중대엽이 유행하던 숙종 때부터 차츰 자취를 감추었고, 삭대엽이 유행하던 영조 무렵에는 아주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풍속 가사에 대엽조(大葉調)가 있는데, 형식이 다 같아서 길고 짧은 구별이 없다. 그 중에 또 느린(慢) 것, 중간인(中) 것, 빠른(數) 것 세 가지 조(調)가 있으니, 이것은 본래 심방곡(心方曲)이라 이름 하였다. 느린 것은 너무 느려서 사람들이 싫증을 내어 폐지된 지가 오래고, 중간 것은 조금 빠르나 또한 좋아하는 사람이 적고, 지금 통용하는 것은 곧 대엽의 빠른 조이다.80)이익(李瀷), 『성호사설(星湖僿說)』 권13, 인사문(人事門), 국조악장(國朝樂章).

이익(李瀷, 1681∼1763)은 우리나라 사람이 느린 노래보다는 빠른 노래를 좋아하기 때문에 만대엽과 중대엽이 차츰 밀려나고 삭대엽이 유행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삭대엽의 유행은 많은 변주곡의 파생을 불러일으켰다.

삭대엽은 『양금신보』에서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본래 만대엽·중대엽과 같이 5장과 중여음(中餘音, 간주곡)·대여음(大餘音, 전주곡 또는 후속곡)으로 이루어진 단형(短形)의 노래인데, 거문고로 반주하는 음악이다. 그런데 17세기 말에 편찬한 것으로 추정되는 『증보고금보(增補古琴譜)』에서의 삭대엽은 우조·계면조(우조 계면조)·평조·계면조 평조(평조 계면조) 등 네 개의 조를 완전히 갖추고 있으며, 우조 삭대엽 두 곡과 나머지 세 개의 조에 속하는 삭대엽이 두 곡씩 수록되어 있다.

이후 삭대엽은 여러 개의 파생곡을 갖게 되면서 1680년(숙종 6)경에 간행된 『신증금보(新證琴譜)』에 이르러서는 네 개의 조가 각각 1, 2, 3의 세 가지 곡으로 확대되고, 또 다시 삭대엽 1과 그 변주곡인 2, 3으로 진행됨에 따라 노래의 시작음이 점점 높아지는 경향을 보인다.

그 뒤 영·정조 무렵에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 『한금신보(韓琴新譜)』에 이르러서는 4조의 삭대엽 중에서 우조와 우조 계면조의 삭대엽이 3에서 4로 늘어난다. 현재 삭대엽 1은 현행 초삭대엽에 해당하고, 2는 두거(頭擧)에, 3은 삼삭대엽에, 대현5괘음으로 시작하는 4는 이삭대엽에 해당한다.

고종 때에 간행한 『삼죽금보(三竹琴譜)』에서는 평조와 평조 계면조가 없어지고 우조와 (우조) 계면조만 남게 되고, 1886년(고종 23)에 간행한 『현 금오음통론(玄琴五音統論)』에 이르러서는 이삭대엽 다음에 중거(中擧)와 평거(平擧)가 새로 추가되어 오늘날 볼 수 있는 대곡(大曲)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가곡의 변천 과정은 변주라고 하는 창작 활동을 통하여 전통의 발전을 꾀한 좋은 예를 보여 주고 있다고 하겠다.

가사는 가곡처럼 오랜 역사를 갖고 있지 못하고, 노래 양식도 가곡만큼 세련되지 않지만, 시조나 가곡과 함께 정가의 하나로 분류되고 있다. 사설(辭說)은 가곡이나 시조에 비하여 매우 길어서 음악적 구조가 가곡이나 시조보다 확대된 형식을 보여 주고 있다. 가사는 음악보다는 사설이 중시되는 노래로 음악 중심인 가곡과 대조를 이룬다.

오늘날까지 전래되고 있는 가사는 춘면곡(春眠曲)·백구사(白鷗詞)·황계사(黃鷄詞)·죽지사(竹枝詞)·양양가(襄陽歌)·어부사(漁父詞)·길군악(路軍樂)·상사별곡(相思別曲)·권주가(勸酒歌)·수양산가(首陽山歌)·처사가(處士歌)·매화타령(梅花打令) 등의 12곡이다. 이 때문에 가사는 흔히 12가사라고 일컫고 있다.

가사의 악곡을 담은 거문고 악보는 『삼죽금보』인데, 상사별곡·춘면곡·길군악·매화곡·황계곡·권주가의 여섯 곡이 실려 있다. 그러나 가사가 모두 거문고 반주를 가졌던 것은 아니다. 즉, 가사는 보통 장구와 젓대 반주로 노래하며, 그 반주의 선율은 노래의 가악을 그대로 따르는 것(수성가락)이 보통이었다.

한편, 악곡 수와 가사의 사설은 계속 변화되어 갔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남아 있는 12가사를 조선 후기에 간행한 노래 모음집과 비교하면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1728년(영조 4) 편찬한 『청구영언(靑丘永言)』에는 춘면곡·권주가·백구사·군악·관등가(觀燈歌)·양양가·귀거래(歸去來)·어부사·환산별곡(還山別曲)·처사가·낙빈가(樂貧家)·강촌별곡(江村別曲)·관동별곡(關東別曲)·황계가·매화가 등이 실려 있는데, 이 중에서 백구사와 양양가를 제외한 대부분의 곡이 그 사설을 조금씩 달리하고 있다. 상사별곡과 춘면곡은 가사 끝부분의 사설이 생략되어 있는데, 이 점은 가사가 유절형식(有節形式)의 음악인지, 통절형식(通節形式)의 음악인지를 결정하는 데 어려움을 준다.

그리고 『삼죽금보』의 상사별곡은 매 24점이 가사 1곡에 맞아 5박자 1장단(3점)의 8장단(24점)이 1장을 이룬다. 그러나 현행 상사별곡 12장 중 8장은 8장단이 아니라 12장단이 1장을 이루고, 특히 종장에서는 8장단이 아닌 6장단이 1장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현행 상사별곡은 사설이 『청구영언』과 다르고, 음악 장단 또한 『삼죽금보』와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상사별곡은 가사 변천의 일면을 보여 주는 한 사례이기는 하지만, 이와 같은 가사의 사설과 음악의 변화, 그리고 악보의 결핍은 가곡에 비하여 조선 후기 가사의 변천 과정을 불분명하게 하고 있다.

시조는 가곡과 함께 사설로 불렸지만 음악의 형식에 있어서는 가곡처럼 5장이 아닌 3장으로 되어 있고, 1장의 박자수도 가곡보다 적다. 그런데 시조는 옛 문헌에 시절가(時節歌) 또는 시절단가(時節短歌)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고, 문학으로서의 시조와 구별하기 위해 시조창(時調唱)이라 부르기도 한다.

시조가 처음으로 악보에 기록된 것은 서유구의 『유예지』와 이규경(李圭景, 1788∼?)의 『구라철사금자보(歐邏鐵絲琴字譜)』이다. 그런데 『구라철사금자보』에는 시조의 장별 구분이나 장구점이 표시되어 있지 않고, 다만 곡의 끝에 모두 60점이라는 주가 붙어 있다.

그 뒤 『삼죽금보』에는 평시조와 지름시조가 나오는데, 이 노래는 모두 5장으로 이루어졌다. 1910년경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장금신보(張琴新譜)』에도 평시조와 지름시조가 나온다. 『장금신보』에도 역시 장별 구분은 5장으로 되어 있고, 시조 장단 그림은 1·2·3장을 분명히 보이고 있으며, 장구점은 1916년에 편찬한 『방산한씨금보(芳山韓氏琴譜)』와 비슷하나 여음이 매장단 끝에 있지 않고 3장 끝에만 붙어 있는 점이 다르다. 『방산한 씨금보』에서는 시조의 3장 형식과 장구점이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한편, 『서금보(西琴譜)』에서는 평시조와 지름시조가 각각 3장으로 나누어졌고, 여창(女唱)의 평시조와 지름시조도 3장으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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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혼례도병(回婚禮圖屛)의 판소리 장면
회혼례도병(回婚禮圖屛)의 판소리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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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가 각 지방으로 널리 퍼져 나감에 따라 그 지방의 가객들에 의해 창법상의 지방적 특징이 생김으로써 지역적으로 조금씩 다른 양상을 띠게 되었다. 즉, 서울을 중심으로 한 경제(京制), 전라도를 중심으로 한 완제(完制), 경상도를 중심으로 한 영제(嶺制), 충청도 지방의 내포제(內浦制) 등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 가운데 경제 시조는 원래 현행 평시조에 해당하는 시조곡의 한 가지였는데, 전통 가곡의 형식을 본받아 많은 파생곡이 생겨났다. 즉, 평시조·중허리시조(中擧時調)·지름시조(頭擧時調)·사설지름시조(濫時調)·수잡가(首雜歌, 엮음 또는 언편시조(言編時調))·휘모리잡가 등 변주곡이 나오게 된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우리나라 음악사의 발전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민속악(民俗樂)이 등장하였다. 판소리가 그것이다. ‘타령’ 또는 ‘잡가’라고도 부른 판소리는 소리광대 한 사람이 고수(鼓手) 및 청중과 함께 소리와 말(아니리) 그리고 너름새로 춘향가(春香歌)와 같은 긴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극음악이다. 판소리는 광대라고 불린 하층 계급의 예능인들이 가창·전승하여 왔다. 그들은 농촌이나 장터에서 노래하기도 하고 양반이나 부호들의 집 마당에서 노래하기도 하였다. 판소리는 다수의 청중을 상대로 한 소리판에서 우리 민족이 지녀 온 온갖 음악적 언어와 표현 방법의 총결집체라 할 수 있다.

오늘날과 비슷한 형태를 갖춘 판소리의 유래는 유진한(柳振漢, 1711∼1791)의 『만화집(晩華集)』에 한시 200구(句)로 기록된 춘향가의 사설이 실려 있는 점으로 보아 숙종 무렵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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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집』 춘향가
『만화집』 춘향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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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엽에 송만재(宋晩載, 1788∼1851)의 ‘관우희(觀優戲)’에도 판소리가 소개되어 있다. 송만재는 가난하여 과거에 급제한 아들에게 광대를 불러 축하연을 베풀어 주지 못하고 대신에 ‘관우희’라는 한시를 지어 주었다. ‘관우희’에는 그 당시 광대들이 연주하던 판소리 열두 마당이 소개되어 있다.

장안에 우춘대가 독판을 치는데 / 長安盛說禹春大

당대에 누가 능히 후계자가 될 것인고 / 當世誰能善繼聲

한바탕 소리 하면 많은 비단을 받는데 / 一曲樽前千段錦

권삼득과 모홍갑은 아직도 어리구나81)장사훈, 『한국 음악사』, 정음사, 1976, 321∼322쪽. / 權三牟甲少年名

‘관우희’에 따르면 우춘대(禹春大)가 장안에서 이름난 명창(名唱)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그 뒤를 이어 권삼득(權三得)과 모홍갑(牟興甲)이 막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관우희’에 소개된 열두 마당은 춘향가·심청가·박타령·토끼타령(별주부전)·적벽가·배비장전·강릉매화전·옹고집전·변강쇠타령·장끼타령·무숙이타령·가짜신선타령이다.

현재 판소리는 열두 마당이 모두 전승되지 못하고 일곱 마당이 사라진 채 다섯 마당만 남았다. 19세기 후반에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가고오략(嘉藁梧略)』에서는 판소리 열두 마당 가운데 내용이 황당무계하다고 여긴 강릉매화타령·옹고집전·변강쇠타령·장끼타령·무숙이타령·가짜신선타령 등을 수록하지 않았다. 또 신재효(申在孝, 1811∼1884)는 판소리 사설집을 정리하면서 춘향가·심청가·박타령·퇴별가(토끼타령)·적벽가·변강쇠가의 여섯 마당을 실었다. 그리고 1933년 이선유(李善有, 1872∼?)가 정리한 『오가전집(五歌全集)』에는 신재효의 여섯 마당 가운데 변강쇠타령을 빼고, 현재와 같은 다섯 마당의 판소리만을 수록하였다.

그런데 열두 마당이 모두 전승되지 못한 이유는 판소리 청중이 양반층으로까지 확대되면서 유교적 관점에서 판소리 사설을 정리한 데에 가장 큰 원인이 있다. 결국 임금에 대한 충성을 나타낸 수궁가, 부모에 대한 효를 강조한 심청가, 부부 사이의 정절을 나타낸 춘향가,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한 홍보가, 벗 사이의 의리를 표현한 적벽가의 다섯 마당만이 남게 되었다.82)송방송, 앞의 글, 1985, 357∼358쪽. 그리하여 판소리 열두 마당은 점점 후대로 내려오면서 곡의 수는 줄어들고, 살아남아 전승되어 온 각 곡의 분량은 확대되면서 오늘날과 같은 다섯 마 당으로 정착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판소리의 곡수가 줄어드는 동안 판소리의 사설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며 고쳐지고, 판소리의 청중이던 지식층이 새로운 내용을 첨가하는 양상을 보였다. 곧, 판소리 음악은 여러 명창이 각기 고유한 더늠(창작)을 첨가하여 나감으로써 현재 우리가 감상하는 것과 같은 방대한 극음악으로 확대되었다. 판소리의 더늠 대목은 비록 악보로 기록된 것은 아니나 구전(口傳)에 따라 그 창작자와 음악 내용을 알 수 있다.

한편, 판소리는 전라도와 충청도 서부 및 경기도 남부에 걸쳐 넓게 전승되고 있었기 때문에 지역마다 조금씩 다른 양식으로 발전하였다. 이로써 동편제(東便制), 서편제(西便制), 중고제(中高制)라고 하는 판소리 유파가 형성되었다.

동편제는 전라도 동북 지역에 전승되어 오는 소리제로, 순조 때의 명창 송흥록(宋興祿)을 시조로 삼는다. 그 소리는 우조(羽調)를 주로 많이 쓰기 때문에 발성을 무겁게 하고 소리의 꼬리를 짧게 끊어 굵고 웅장한 가락의 맛이 난다.

서편제는 전라도 서남 지역에 전승되어 오는 소리제로, 강산제(江山制)라고도 한다. 철종 때의 명창 박유전(朴裕全)을 시조로 삼는다. 계면조(界面調)를 비교적 많이 쓰기 때문에 발성을 가볍게 하고 소리의 꼬리를 길게 늘이여 정교하고 감칠맛을 풍긴다.

중고제는 경기도와 충청도 지역에 전승되어 오는 소리제로, 순조 때의 명창 김성옥(金成玉)과 염계달(廉季達)을 시조로 삼는다. 소리는 동편제 소리에 가까우며 책을 읽듯이 덤덤한 맛이 있다.83)송방송, 앞의 글, 1998, 568쪽.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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