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5권 기록과 유물로 본 우리 음악의 역사
  • 제2장 기보법의 발달과 악보
  • 2. 나라에서 펴낸 악보와 악서
  • 『세종실록악보』
권오성

『세종실록악보』는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악보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또한 정간보로 표기한 최초의 악보집이기도 하다. 『세종실록』에 실려 있는 악보집이라고 하여 『세종실록악보』라고 하는데, 『세종실록』 권136에서 권146까지 11권에 걸쳐 실려 있다. 『세종실록악보』에는 정간을 사용하지 않은 율자보에 의한 아악보와 정간보로 표기한 정대업(定大業)·보태평·발상(發祥)·여민락보(與民樂譜)·치화평보(致和平譜)·취풍형보(醉豊亨譜)·봉황음(鳳凰吟)·만전춘(滿殿春) 등 여러 악보가 실려 있다.

『세종실록악보』가 체계를 갖춘 악보집으로 완성되어 인쇄되기까지는 1430년(세종 12)에 정간보가 창안된 이후로 무려 20여 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이 때문에 1450년(문종 즉위년)에는 박연(朴堧)이 『세종실록악보』를 하루 빨리 출판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악부(樂部)의 악에는 제향악(祭享樂)이 있고 연향악(宴饗樂)이 있는데, 제향악은 봉상시(奉常寺) 구본(舊本)과 『십이궁보(十二宮譜)』와 아울러 20여 장 (章)이 있어서 연습한 지가 이미 오래이나, 연향악은 우리나라에서 일찍이 보고 듣지 못하였다가 경술년 가을에 세종께서 주 문공(朱文公, 주자)의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 가운데 연향 아악 시장(詩章) 12편의 악보를 얻어 제목을 붙여 내었습니다. 또 보법(譜法)이 널리 펴지지 못할까 염려하여 옛사람의 이미 이룩한 법규를 써서 몸소 친히 부연(敷衍)한 뒤에야 보법이 크게 갖추어졌고, 이어서 부연한 보법 중에서 성음(聲音)이 아름다운 것을 골라서 회례연(會禮宴)과 양로연(養老宴)의 음(音)으로 들이고, 보법 전부를 주자소(鑄字所)에 명하여 인출(印出)하도록 한 지가 21년이나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발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99)『문종실록』 권4, 문종 즉위년 11월 28일 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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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악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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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0년 가을에 악보에 관한 법(보법)을 크게 완비하여 주자소에서 출판하도록 명하였는데도 그 뒤로 21년이 지나도록 인쇄하지 못하고 있는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세종대에 이루어진 아악 부흥과 향악 창제는 우리나라 음악사에서 손 꼽히는 업적이며, 『세종실록악보』는 이러한 빛나는 업적을 담고 있다. 곧 『세종실록악보』에는 15세기 우리나라 음악 창작의 발전된 면모와 특징을 보여 주는 방대한 양의 음악 작품이 실려 있는 것이다.

음악의 격조(格調)가 경전(經典)과 사기(史記) 등에 흩어져 있어서 상고하여 보기가 어렵고, 또 『문헌통고(文獻通考)』·『진씨악서(陳氏樂書)』·『두씨통전(杜氏通典)』·『주례악서(周禮樂書)』 등을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비록 뜻을 둔 선비가 있더라도 얻어 보기가 어려우므로 진실로 악률(樂律)이 이내 끊어져 없어지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문신 한 명을 본 악학에 더 설정하여 악서(樂書)를 찬집(撰集)하게 하고, 또 향악·당악·아악의 율조(律調)를 상고하여 그 악기와 악보법을 그리고 써서 책을 만들어 한 질(秩)은 대내(大內)로 들여가고, 본조와 봉상시(奉常寺)와 악학관습도감(樂學慣習都監)과 아악서(雅樂署)에도 한 질씩을 수장하도록 하소서.100)『세종실록』 권27, 세종 7년 2월 갑자(24일).

악보와 악서를 간행하여 악률의 전승을 도모하자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그대로 수용되어 세종대에는 악보와 악서를 간행하려는 노력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세종실록악보』는 그러한 노력의 총결실이라 할 수 있겠다.

『세종실록악보』가 현재 『세종실록』에 전하는 악보 체제로 갖추어진 것은 1445년(세종 27)에 장편 악장 가사(樂章歌詞)인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창작한 이후에 이루어졌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용비어천가가 창작된 2년 후인 1447년에 그것을 관현악에 맞추어 연주할 수 있도록 느리고 빠른 것을 조절하여 창작한 치화평·취풍형·여민락과 문무(文舞)와 무무(武舞)에 사용할 수 있도록 새롭게 창작한 보태평·정대업·발상 등을 완비하고, 이미 전해 오는 봉황음·만전춘 같은 향악곡을 궁중 음악에 쓸 악곡으로 제 정한 이후이다.

이 악보에 실려 있는 음악 작품의 일반적 특징을 들면 첫 번째는 모두 정재(呈才)와 결합된 규모가 큰 작품이라는 점이다. 두 번째는 음악을 이루고 있는 형태가 성악과 기악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조선 선대왕(先代王)들의 무공(武功)과 문덕(文德)을 찬양한 용비어천가나 조선 초기에 나온 악가에 토대를 두고 창작한 음악이라는 점이다.

『세종실록악보』에 기록된 75곡의 악곡은 전부 정재와 결합된 음악이다. 『악학궤범』에 따르면 종묘(宗廟)와 문소전(文昭殿)에 제사 지낼 때에 헌가(軒架)에서는 영신(迎神)·전폐(奠幣)·초헌(初獻)에 보태평무(保太平舞)를 추고 아헌(亞獻)과 종헌(終獻)에는 정대업무(定大業舞)를 춘다고 하였다. 그리고 회례연 연회 때 쓰는 아악의 헌가악에서는 문무와 무무를 춘다고 하였다. 이것은 1445년부터 1447년 사이에 창작된 음악이 모두 정재와 함께 연주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

그리고 『세종실록악보』의 매 작품이 음악의 형식 구조상 성악과 기악을 함께 연주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은 거기에 담긴 주제 내용과 음악적 표현 형식을 통일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세종실록악보』에 실려 있는 작품 가운데 악곡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조곡(組曲) 형식의 작품을 보면 모두 선조왕들의 업적을 찬양하는 내용이며 그 음악적 표현 형식에서 선법과 조성이 통일되어 있다. 이처럼 선법과 조성이 하나로 통일된 것은 연관된 작품의 연주에 있어서는 편의를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긍정적이긴 하나, 음악의 표현에 있어서는 도식적인 선율로 이루어진다는 단점도 있다.

이와 같이 『세종실록악보』는 중세기 우리나라 음악 표기법의 발전 성과와 15세기 직업 음악의 발전된 면모를 보여 주는 귀중한 고악보 유산이며, 전통적인 가요 형식의 요소와 선율 표현의 특징이 여러 가지로 반영된 방대한 양의 음악 작품이 실려 있다는 점에서 음악사적 가치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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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악보』 중 아악보
『세종실록악보』 중 아악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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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세종실록악보』에는 정간을 사용하지 않은 율자보로 기보한 아악보도 수록되어 있다. 세종 때의 아악 혁신은 아악보를 새로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시악(詩樂)』 12편은 개원 연간(開元年間, 713∼741)에 전해 온 음악이어서 옛날의 음악이 아니며, 『석전악보(釋奠樂譜)』 17궁(宮)도 그대로 다 믿기 어렵다. 그러나 이 두 악보 이외에는 다시 의거할 곳이 없으므로, 의례악에서 순수하게 일곱 종류의 소리(七聲)만을 사용한다는 취지와, 소아(小雅)의 6편 26궁의 원칙을 가지고 이것을 부연하여 312궁을 만들어서 조회악(朝會樂)을 갖춘다. 『석전악보』에서는 순수하게 7성·12궁의 원칙을 가지고 부연하여 144궁을 만들어서 제사악(祭祀樂)을 갖춘다.101)『세종실록』 권50, 세종 12년 윤12월 정유(1일) ; 『세종실록』 권136, 악보 서.

1430년(세종 12)의 아악 제정은 주희(朱熹)가 지은 『의례경전통해』와 임우의 『석전악보』를 토대로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아악 이론은 7성 12궁 의 원칙을 그대로 수용하여 아악보는 7성 12율로 기보하였다. 선율의 기보와 악조(樂調)에서 기본음의 높낮이를 표시할 때에도 12율을 사용한 것이다.

『세종실록악보』의 서문에 나타나듯이 아악보는 『의례경전통해』와 『석전악보』를 참고하여 만들었다. 그리고 아악보 만드는 일을 주관한 박연은 악보는 그림을 그리고 내용을 해석해 놓아야만 누구나 펼쳐 보고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쓰는 삼부(三部)의 음악을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 정제되지 못하였는데, 그 중에 아악부가 더욱 심하다. 그 율려(律呂)의 제도와 가무(歌舞)의 규식(規式)과 금슬(琴瑟)의 보법 등의 정밀하고 미묘한 곡절은 함부로 허술하고 가볍게 논설(論說)을 세울 수 없다. 이에 여러 글을 두루 상고하고 여러 사람의 말을 참고하여 몸소 깨우쳐 마음속으로 그렇다고 수긍이 된 후에 그림으로 그리고 논설로 나타내 적어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다 찾아내고 풀어내어 알 수 있게 하고자 한다.102)『세종실록』 권47, 세종 12년 2월 경인(19일).

이에 따라 박연은 아악이 외국에서 도입된 악곡이었던 만큼 중국의 『의례경전통해』, 『석전악보』 등의 악보를 주로 참고하여 나열식 문자 표기법을 그대로 받아들여 기보하였던 것이다. 당시 이미 정간보가 창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악보에 나열식 문자보인 율자보로 기재하였는데, 정간보는 오음 음계인 향악을 기보하기 위해 만들었던 만큼 칠음 음계인 당악이나 아악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무리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당악이나 아악을 기보할 때에는 공척보나 율자보를 사용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면서도 박연은 아악보를 편찬하고 기록하는 데 있어 옛날 현인들의 학설만 좇아 음악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그르다는 것을 알게 하여 감히 함부로 쓰지 못하게 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이에 단순히 수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두루 상고하고 여러 사람의 말을 참고하여 몸소 깨우쳐 마음속으로 그렇다고 수긍이 되는” 과정을 거쳤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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