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5권 기록과 유물로 본 우리 음악의 역사
  • 제5장 소리의 기록, 음반사
  • 2. 1920년대부터 1945년 광복까지
  • 1920년대 초반 음반 시장
노재명

1913년에 일본 축음기 상회가 우리 음악 신보(新譜) 음반을 낸 이후 1920년대 초반까지 10여 년간 특별한 신녹음 없이 재발매를 위주로 음반 시장을 공략한 것은 과도한 초기 투자의 부담 속에 모험적인 추가 투자를 자제하고 시장 상황을 관망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리고 기존에 확보한 음원(音源) 홍보와 판매에 총력을 기울여 초기 투자 비용을 회수하고자 했던 것 같다. 1910년 한일 병합 전후로 신문물 유입이 본격화되었던 만큼 1910년대만 하더라도 유성기가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 축음기 상회가 우리 음악 음반을 계속 개발하여 많이 만들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이 회사가 1911년부터 이미 우리 음악 음반을 상당수 배포하고 있는 상황에서 1915년 빅타 음반 회사가 가세하여 경쟁을 벌이게 되자 일본 축음기 상회의 추가 신녹음 진행은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1910년대 후반 빅타 음반 회사가 완전히 손을 떼고 떠나고 1920년대 초반 유성기와 음반 수요가 급증하자 일본 축음기 상회(닙보노홍)에서 경서도 명창 김일순·김연연·박채선·이류색·유운선·조국향·한 부용, 남도 명창 강남중·신옥란·신진옥·신연옥 등의 음반을 제작하였다. 이 시기 음반은 대부분 민요를 장기로 하는 기생(妓生)이 녹음하였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 밖에도 기생들의 음반 취입 참여는 우리나라 음반사 초기부터 1930년대까지 30여 년에 걸쳐서 단골 메뉴로 각광을 받았다.

기생의 음반 취입이 많았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당시에 음반을 주로 구매하던 부유층 남성들에게 기생의 음성과 사진을 통해 이성적 호기심과 구매 욕구를 유발시켜 음반 판매를 촉진하려 한 일본 음반 회사의 상술이었다. 왜냐하면 음악성만 보자면 그들보다 몇 배 뛰어난 기량을 지닌 남자 대명창이 전국에 많았고, 동시대에 단 하나의 녹음도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대가도 많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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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구 치는 기생
장구 치는 기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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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명창 스스로 녹음을 꺼린 이도 상당수 있었다. 박기홍 같은 명창은 충분히 녹음을 남길 수 있는 시기에 활동하였고 기회도 있었을 것인데 정황으로 보아 녹음을 거부한 것이 아닌가 한다. 판소리를 완창 내지는 제법 길게 소리를 해야 진면목이 나오는 박기홍으로서는 한 면에 고작 3분 정도 넣을 수 있는 유성기 음반에 제 기량을 발휘할 수도 없었을 것이고, 음악이 점차 통속화되는 세태와 그가 장타령 아니면 염불이라고 비판한 판소리가 음반에 담겨 길거리에서 마구 울려 퍼지는 것도 못마땅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판소리를 판막음하였다고 평가받는 박기홍의 판소리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도 당대에 그리 많지 않았기에 음반사에서 그의 음반을 기획하려 하였어도 그리 높은 사례를 제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그러한 이유 때문에서인지 판소리가 설익은 10대 기생의 음반도 활발히 제작되는 상 황 속에서 박기홍, 김채만 등 무수히 많은 국악 대가가 녹음 하나 남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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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자의 창가 음반
박정자의 창가 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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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사회에 비해 국악이 급격히 쇠퇴한 오늘날에는 유성기 음반에 담겨 있는 것만 들어도 대단한 기량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유성기 음반 시대에도 이미 고형(古形)의 국악 모습을 간직한 대가는 고령이거나 은둔한 이가 많았고, 당시 취입된 음반은 신성향의 음악을 구사한, 대중적으로 이름난 스타들의 녹음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와중에 1920년대 중반부터 이기세와 무용가이자 판소리 명고수인 한성준이 음반 취입과 기획, 녹음자 섭외에 관여하여 그래도 대중성이나 상업성과 무관하게 기록으로 남길 가치가 높은 소중한 고음악이 몇몇 음반에 보존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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