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6권 쌀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 제2장 고려시대 쌀의 위상과 생산 소비 문화
  • 1. 쌀 생산의 확대
  • 쌀의 장점
이정호

이처럼 고려시대 식량 가운데 밭작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지만, 쌀은 다른 밭작물에 비해 장점이 많았다. 당연히 쌀 재배가 늘어가는 것이 추세였다. 우선 쌀은 다른 곡물보다 맛이 좋을 뿐만 아니라 낱알도 크고 수확량이 많다. 또 보리·조·콩 등 밭작물에 비해 훨씬 오랫동안 저장할 수 있다는 것도 쌀의 장점이다. 곡물을 수확한 후 저장 기간을 비교해 볼 때 대체로 벼 상태로는 9년, 쌀은 3∼5년에 달한다. 곡물의 가치에 있어서도 쌀은 밭작물보다 우월하였다.

곡물에 따라 양을 측량하는 용기의 크기가 달랐다. 1053년(문종 7)에 쌀, 좁쌀, 된장, 콩, 팥을 재는 양기(量器: 이를 곡(斛)이라 부른다)의 크기를 달리 정하였는데, 용적을 비교해 본 것이 표 ‘곡물 양기의 용적비’이다. 가치가 높은 곡물일수록 작은 양기로 측량하였을 것이기 때문에, 크기를 비교해 보면 쌀, 좁쌀, 된장, 콩·팥의 가치를 알 수 있다. 우선 쌀을 재는 미곡(米斛)이 좁쌀 등을 재는 패조곡(稗租斛)보다 작은 것으로 보아(4 대 7), 그만큼 쌀이 좁쌀보다 가치가 높았던 것을 알 수 있다.76)여은영, 「고려시대의 양제」, 『경상 사학』 3, 경상대학교 사학회, 1987, 24쪽.

<표> 곡물 양기의 용적비
곡(斛) 구분 용적(分) 용적비
미곡(米斛) 1,728,000 4
패조곡(稗租斛) 3,048,625 7
말장곡(末醬斛) 2,685,619 6
태소두곡(太小豆斛) 1,295,029 3

한편 미곡과 태소두곡(太小豆斛: 콩·팥을 재는 용기)의 용적비가 4 대 3으로 되어 있어, 혹시 쌀의 가치가 콩·팥보다 떨어졌던 것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기에는 사정이 있었다. 미곡은 도정(搗精)이 안 된, 즉 껍질에 싸여 있는 상태의 도(稻)를 재는 것으로, 만약 도정률 50%로 추정할 경우 미곡과 태소두곡의 용적비는 2 대 3으로 볼 수 있다. 쌀은 좁쌀, 콩, 팥 등 밭작물보다 가치가 높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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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이 식량으로서 차지하는 비중이 증가하는 것은 자연스런 추세였다. 점차 쌀 재배의 비중과 중요성이 점차 높아지는 변화가 나타났다.

농경 제의(農耕祭儀)의 개최 시기는 어떤 곡물을 재배하고 있었는지를 추정해 보는 데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농경 제의는 수확기에 개최하기 때문이다. 삼국시대에는 음력 5월과 10월에 농경 제의를 열었는데, 이는 잡곡 농사 위주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던 것이 5∼7세기경부터 정월 대보름과 8월 한가위가 새로운 명절로 등장하는 변화가 나타났다.77)장주근, 「한국의 농경과 세시풍속」, 『한국의 농경 문화』 1, 경기대학교 박물관, 1983, 39∼40쪽.

노역(勞役) 동원 시기의 변화 또한 이러한 사정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노역 동원은 대체로 농사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 농한기(農閑期)에 실시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삼국시대에는 노역 동원이 봄철에 많이 이루어진 데 반해 고려시대에는 추역군(秋役軍)과 같이 가을철에 동원되는 일이 많다는 차이가 있다.78)이기백, 「영천 청제비(菁堤碑)의 병진축제기(丙辰築堤記)」, 『고고미술』 106·107, 한국미술사학회, 1970 ; 『신라 정치 사회사 연구』, 일조각, 1974, 306∼307쪽.

이와 같은 변화는 점차 8월에 수확하는 곡물, 대체로 쌀 생산의 비중이 늘어나면서 나타난 변화였다. 고려시대에 쌀과 관련한 행사와 풍속 등이 등장하는 것 역시 이러한 변화를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5월 단오절에는 ‘단오선사(端午宣賜)’라는 행사가 있었는데, 12공신에 게 은병(銀甁) 다섯 개씩과 쌀 20석을 하사하고, 그 밖의 공신들에게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79)『고려사』 권24, 고종 46년 5월 을사.

고려시대는 대다수가 신앙의 대상으로 불교를 숭배하고 있었던 만큼 불교 관련 행사가 다양하게 거행되었다. 그 가운데 불교의 영향으로 승려들이 주관하여 흰 쌀죽을 거리에서 행인에게 나누어 주는 행사가 있었다. 곧, 흰 쌀죽을 항아리에 담아 두어 오가는 행인이 먹을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80)서긍, 『고려도경』 권23, 잡속(雜俗)2, 시수(施水).

또 4월 8일 석가탄신일에는 집집마다 등을 매다는 연등 행사를 거행할 때, 그 경비를 쌀로 마련하는 풍습도 있었다. 행사에 앞서 몇 주일 전부터 아이들이 긴 자루에 종이를 달아 깃발을 만들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쌀과 베를 구하여 경비를 마련하였는데, 이를 ‘호기(呼旗)’라고 불렀다.81)『고려사』 권40, 공민왕 13년 4월 신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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