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6권 쌀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 제3장 조선시대의 벼농사와 쌀
  • 5. 쌀밥·떡·볏짚
이정철

곡물 조리법의 대표적 음식인 죽·떡·밥은 농경이 시작되던 때 다 같이 이용되었던 음식 형태였다. 하지만 그 후 밥이 주식으로 정착된 이후, 떡은 명절 음식, 의례(儀禮) 음식으로 발전하였다. 그 결과 떡은 밥보다도 더욱 문화적인 내용을 포함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떡은 각종 제사, 집에서 치르는 여러 가례(家禮), 손님을 접대하는 빈례(賓禮)에 필수적인 음식이 되었다. 또 떡 종류에 따라 고유한 의미를 가진 음식으로 발전하였다. 초기에는 쌀가루만을 찌던 단순한 형태였지만 점차 다른 곡류, 과실, 꽃, 야생초, 약재 등을 섞음으로써 빛깔, 모양, 맛이 다양하게 발전되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궁중과 양반집을 중심으로 떡은 더욱 사치스럽게 발전하였다.220)이철호·맹영선, 「한국 떡에 관한 문헌적 고찰」, 『한국 식생활 문화 학회지』, 한국 식생활 문화학회, 1987, 119쪽

확대보기
음식디미방
음식디미방
팝업창 닫기

조선시대 조리서(調理書)221)조선시대에 떡에 대해 언급한 문헌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도문대작(屠門大嚼)』(1611),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1670), 『요록(要錄)』(1680), 『주방문(酒方文)』(1600년대 말), 『슐만드(는) 법』(17세기 말, 18세기 초), 『산림경제(山林經濟)』(1715), 『경도잡지(京都雜誌)』(1747∼1800), 『수문사설(搜聞事說)』(1745), 『성호사설(星湖僿說)』(1763),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1766), 『원행을묘정리의궤』(1795), 『역주방문(曆酒方文)』(1800), 『규합총서(閨閤叢書)』(1815), 고대(高大) 『규합총서(閨閤叢書)』(1815),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1827),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1849), 『음식법(飮食法)』(1854), 『김승지댁 주방문』(1860), 『간본규합총서(刊本閨閤叢書)』(1860), 『음식방문(飮食方文)』(1800년대 중반), 『규곤요람(閨壼要覽)』(1800년대 중반), 『규곤요람』(1896), 『시의전서(是議全書)』(1800년대 말) 등(이효지, 「조선시대의 떡 문화」, 『한국 조리 과학회지』 vol.4. No.2, 한국 식품 조리 과학회, 1988, 98쪽).에 기록된 떡 종류는 모두 198가지이다. 그 중 찐 떡이 99가지, 친 떡이 45가지, 지진 떡이 40가지, 삶은 떡이 14가지이다. 찐 떡이란 시루에 찌는 것을 말한다. 시루에 떡을 얹히는 방법에 따라서 설기떡·무리떡·백편·두텁떡 등으로 나뉘고, 재료에 따라서 메떡·찰떡 등으로 나뉘며, 만드는 방법에 따라서 증편·송편 등으로 나뉜다. 친 떡이란 멥쌀가루나 찹쌀가루를 찌거나 찹쌀로 밥을 지어, 안반이나 절구에 놓고 쳐서 완성한 떡이다. 멥쌀가루를 쪄서 친 떡에는 절편·가피떡·흰떡이 있고, 찹쌀이나 찹쌀가루를 쪄서 친 떡에는 인절미·단자가 있었다. 지진 떡이란 찹쌀가루를 반죽하여 모양을 내어서 기름에 지져서 완성한 떡으로, 화전·주악222)화전은 찹쌀가루 반죽 위에 꽃이나 잎을 놓고 기름에 튀겨낸 떡으로, 진달래꽃전·장미꽃전·국화꽃전 등이 있다. 주악은 멥쌀로 적·청·황·백의 색깔을 내어 송편만한 크기로 빚어 기름에 지진 다음 꿀에 잰 것으로, 밤주악·대추주악·치자주악·메밀주악 등이 있다(이철호·맹영선, 앞의 글, 120쪽).이 여기 속한다. 삶은 떡이란 찹쌀가루를 반죽하여 둥근 모양을 만들어 끓는 물에 삶아 건져서 완성한 떡으로 경단이 여기 속한다.223)이효지, 앞의 글.

조선시대에 밥이 주식으로 자리 잡아 나갔던 것에 비해서 떡은 다양하 고 특별하게 쓰였다. 즉, 떡은 해마다 절기(節氣) 따라 먹는 절식(節食)으로, 한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맞는 다양한 계기들, 즉 출생·결혼·죽음 등을 축하하거나 애도하기 위한 음식으로, 다른 한편 백성들과 깊은 관련을 맺었던 무속 신앙과 관련된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절식으로서의 떡의 종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월: 가래떡(초하루), 절편 약식(보름), 흰무리, 붉은팥 시루떡(무오일), 승검초편, 꿀찰떡, 삼색 주악, 각색 단자, 산병(초삼일)

2월: 노비 송편(중화), 용떡(영등제)

3월: 쑥송편, 두견화전(杜鵑花煎), 쑥버무리, 청절편(삼짇날)

4월: 청절편, 느티떡, 기주떡, 녹두찰떡, 쑥편, 화전, 석이단자 승검초편(초파일)

5월: 쑥편, 쑥절편, 수리취떡, 기주떡(단오)

6월: 상화병, 색비름 화전, 편수, 경단(유두)

7월: 밀전병, 강냉이떡, 밀개떡(칠석), 깨 찰떡, 밀설구, 주악, 떡수단(삼복)

8월: 콩깨동부, 인절미, 올벼송편(오려송편), 개떡, 조떡, 콩떡, 호박떡, 콩찰떡, 무시루떡(추석)

9월: 감국화전, 밤단자, 밤떡, 감떡, 호박전, 소머리떡(중양)

10월: 콩인절미, 감떡, 붉은팥시루떡, 검은콩시루떡, 무설기떡, 밤단자(고사)

11월: 골무떡, 호박떡, 무시루떡(동지)

12월: 온시루떡, 꼬리떡(제석)

설날에는 액을 피하고 복을 기원하며, 순탄한 기후와 풍년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흰떡으로 떡국을 끓여 먹었다.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의 『조선 상식 문답(朝鮮常識問答)』(1946)에 따르면, 설날에 떡국을 먹는 것은 흰색 음식으로 새해를 시작함으로써, 천지만물의 부활 신생(復活新生)을 의미한 다는 종교적 뜻이 담긴 것이었다고 한다.224)이효지, 『한국의 음식 문화』, 신광출판사, 1998, 83쪽. 2월 1일은 중화절(中和節) 혹은 노비일(奴婢日)이나 머슴날이라고도 불렸다. 이날은 공식적으로 한 해 농사가 시작되는 날이다. 이날에는 노비들에게 나이 수대로 송편을 나누어 주었다. 이 송편은 정월 보름날 세웠던 볏가릿대(禾竿)에 있던 쌀로 만든 것이었다. 풍년을 바라며 하늘과 가까이 두었던 쌀을, 일할 사람들에게 먹였던 것이다.225)이규태, 『한국인의 밥상 문화』 2, 신광문화사, 2000, 37쪽. 볏가릿대는 정월 보름에 볏짚에 종자를 넣어서 매달아 집 가까이 두었던 기다란 장대이다. 중화절에 끌어 내린다.

확대보기
백설기
백설기
팝업창 닫기

2월 1일에서 15일 사이에 풍어(豐漁)를 기원하는 의미로, 흰 가래떡을 용떡이라 하여 영등제(靈登祭)226)영등은 바람을 일으키는 신으로 천계에 살다가 2월 1일에 지상에 내려와서 20일에 다시 올라간다고 한다. 영등 할머니는 바람과 농작의 풍흉과 관계되는 농신(農神)의 성격을 가진다.를 지내는 습속(習俗)이 있었다. 3월 삼짇날은 봄이 시작되는 날로, 화전을 해 먹고, 집안의 우환을 없애는 산제(山祭)를 드렸다. 4월 초파일에는 석가 탄생의 축하로 유엽병(楡葉餠)을, 5월에는 풍작을 기원하며 쑥으로 수레바퀴 모양의 수리취떡을 만들어 먹었고, 6월에는 유두일에 수단(水團)·건단(乾團)227)『동국세시기』 유두조에 “멥쌀가루를 쪄서 긴 다리같이 만들어 둥근 떡을 만들고, 잘게 썰어 구슬같이 만든다. 이것을 꿀물에 넣고 얼음을 채워서 먹으며, 제사에도 쓴다. 이것을 수단(水團)이라고 한다. 또 건단(乾團)이라고 하는 것도 있는데 그것은 물에 넣지 않은 것으로 곧 찬 음식 종류이다. 혹 찹쌀가루로 만들기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을 만들어 들에 나가 용신제(龍神祭)로 풍년을 기원하였다. 7월 칠석(七夕)에는 수단·개찰떡·주악 등을 만들었고, 8월에는 오려송편을 만들어 조상께 감사제를 드렸다. 9월 중양절(重陽節)에는 국화전을 만들었으며, 10월 상달에 붉은팥 시루떡을 만들어 집안에 액이 없기를 바랐다. 11월 동짓날에 액을 피하는 의미로 새알심을 넣은 팥죽을, 섣달그믐에는 시루떡과 흰떡으로 만든 색색의 골무떡을 만들어 새해를 맞는 기쁨을 나누었다.228)이종미, 「한국의 떡 문화 형성 기원과 발달 과정에 관한 소고」, 『한국 식생활 문화 학회지』 7, 한국 식생활 문화 학회, 1992, 188쪽.

떡은 의례 음식으로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출생 21일째인 삼칠일(三七日)에는 흰무리(백설기)를 하였는데, 이때는 음식을 집 밖으로 내지 않았다. 이는 아기와 산모가 아직 성스러운 신계(神界)에 속해 있음을 의미한다. 백일이나 돌 때는 흰무리·붉은팥 고물 수수경단·오색 송편 등을 만들어 이웃에 돌렸다. 백일 때는 100집과 백일떡을 나누어 먹어야 수명이 길어진다 하여 흰무리를 돌리는 풍습이 있었다. 오색 송편은 오행(五行)·오덕(五德)·오미(五味)와 같은 관념으로, ‘만물의 조화’라는 뜻을 담고 있었다. 붉은팥 고물 수수경단은 아기로 하여금 액을 면하게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었다. 아이가 열 살이 될 때까지는 생일상에 붉은팥 수수경단을 빠뜨리지 않았다.

확대보기
봉채떡
봉채떡
팝업창 닫기

의례 음식에서 쓰는 흰무리(백설기)는 원시적이고 종교적인 떡이었다. 그 자체가 신성한 상징적 제물의 의미를 띠었다. 희다는 형용사는 해(태양)라고 하는 명사에서 온 것으로, 한민족의 흰색 숭배 사상인 태양 숭배 사상에서 연유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229)김상보·황혜성, 「서울 지방의 무속 신앙 제상 차림을 통해서 본 식문화에 대한 고찰」, 『한국 식문화 학회지』 3권 3호, 한국 식문화 학회, 1988.

혼례 때는 세 가지 떡, 즉 봉채떡·달떡·색편이 있어야 했다. 봉채떡은 혼서(婚書)와 채단(綵緞)이 담긴 함을 받기 위하여 신부 집에서 만드는 떡이다. 이 떡은 ‘봉치떡’이라고도 한다. 찹쌀 세 되와 붉은팥 한 되로 시루에 두 켜만 안쳐, 위 켜 중앙에 대추 일곱 개를 둥글게 모아 놓고 함이 들어올 시간에 맞추어 찐 찹쌀 시루떡이다. 주재료를 찹쌀로 하는 것은 부부 금슬이 찰떡처럼 화목하게 잘 합쳐지라는 뜻이고, 붉은팥 고물은 액을 면하게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일곱 개 대추는 아들 칠형제를 상징하며, 떡을 두 켜로 하는 것은 부부 한 쌍을 뜻한다. 교배상(交拜床)에는 달떡과 색편이 올랐다. 교배상은 초례(醮禮) 의식을 치르기 위해서 마련하는 상이다. 교배상에는 달떡을 21개씩 두 그릇을 놓고, 색편으로 암수 한 쌍의 닭 모양을 만들어 수탉은 동쪽에 암탉은 서쪽에 각각 놓았다. 달떡은 둥글게 빚은 흰 절편으로, 보름달처럼 밝게 비추고 둥글게 채우며 살도록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또한, 색편은 각각 물을 들여 만든 절편으로, 이 떡으로 만든 한 쌍의 닭은 부부를 상징하였다.230)강인희, 「한국의 통과 의례 음식」, 『한국 식생활 문화 학회지』 Vol.11, No.4, 한국 식생활 문화 학회, 1996, 542쪽.

조선시대 의례는 이상과 같이 집에서 이루어지는 것들 이외에도, 무속을 통해서도 이루어졌다. 떡은 양쪽 모두에서 가장 중요한 준비물이었다. 무속 쪽에서 사람은 삼신상(三神床)231)삼신상이란 삼신에게 올리는 상. 삼신은 우리나라의 민간 사상 중 중요한 신으로, 아기를 점지해 주고 태어난 아이와 산모를 지켜 준다고 한다. 삼신상은 방 안 윗목에 차린다. 에 바치는 흰무리를 받아서 탄생을 축복받고, 진오귀상232)진오귀굿을 위한 상. 진오귀굿은 죽은 이를 위로하고 극락천도를 기원하는 굿이다.에 바친 편떡을 먹고 저승에 간다고 생각하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떡을 통해서 태어나고 떡을 받아먹고 저승에 갔던 셈이다.233)김헌선·양종승, 「한국의 굿과 떡의 상관성 연구」, 『비교 민속학』 31, 비교 민속학회, 2006, 49쪽.

확대보기
삼신상
삼신상
팝업창 닫기

무속에서 가장 중요한 음식은 역시 떡이었고, 그 떡은 대개 흰떡이었다. 중요한 떡으로는 증편·백설기편·계면떡을 들 수 있다. 증편은 불가(佛家)와 관계되는 최고의 신에게 바치는 떡이고, 계면떡은 굿이 끝날 무렵 모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떡이다. 사람들은 이 떡을 먹으면 복을 받는다고 하여 너도나도 받아먹으려고 하였다. 계면떡의 재료는 백미였다. 증편을 빚고 남은 찌꺼기(모서리를 잘라 낸 것들)를 먹지 않고 마름모꼴로 만들어 상에 놓은 것이다. 백설기는 용신(龍神)·제석신(帝釋神)·칠성신(七星神)·산신(山神) 등 천신(天神)을 대상으로 제사를 지낼 때 반드시 있어야 하는 떡이었다.234)김상보·황혜성, 앞의 논문, 224쪽.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