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6권 쌀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 제3장 조선시대의 벼농사와 쌀
  • 5. 쌀밥·떡·볏짚
  • 볏짚
이정철

벼농사의 산물 가운데 쌀이 너무나 귀한 것이었다면, 볏짚은 가장 흔한 것이었다. 쌀은 국가도 가져가고 지주들도 가져갔지만, 볏짚만은 가져가지 않았다. 때문에 볏짚은 농민들에게 조차도 흔하였다. 이렇듯 흔하였기에 사실 누구에게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얼핏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볏짚은 농민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되는 귀한 자원이었고, 나아가서는 신성한 의미를 띠기까지 하였다.

조선의 여인네들은 대대로 정갈한 삼신짚 위에서 아이를 낳았다. 일반적으로 안방에 짚을 깔고 그 위에서 출산을 하였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우선 출산 분비물을 처리하는 데 편리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출산의 편리만을 위해서 그랬던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출산할 때 볏짚을 한 주먹 묶어서 산실(産室) 구석이나 문 밖에 세워 놓는다던지, 혹은 삼신상 위에 짚과 쌀을 올려놓고 순산(順産)을 기원한다던지 하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볏짚이나 짚 다발은 그저 단순한 깔개가 아닌 삼신 그 자체, 바꾸어 말하면 아이를 낳아 길러 주는 영적 존재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235)남근우, 「곡령 신앙론-제일, 사제, 제장 문제를 중심으로-」, 『비교민속학』 13, 비교 민속학회, 1996, 5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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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줄
금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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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를 낳은 집은 왼새끼를 꼬아서 집 입구에 금줄을 쳤다. 부정한 기운을 막기 위한 것이다. 옛날에는 아기들이 태어나자마자 죽는 일이 많았는데, 그것은 잡귀(雜鬼)가 들어와 아기의 생명을 빼앗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었다. 금줄은 그런 잡귀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기 위한 것이었다. 금줄이 지닌 이런 의미 때문에 장을 담글 때나 잡병(雜病)을 물리치고자 할 때에도 효험을 얻기 위해 사용하였다.

조선시대 백성들은 대부분 초가집에서 살았다. 당연히 볏짚은 필수적 인 건축 재료였다. 농한기가 되면 동네 장정들은 두레패를 짜서 집집마다 다니며 이엉을 엮어, 모든 집의 지붕을 새롭게 단장하였다. 우리나라는 예나 지금이나 계절에 따른 기온 차이가 크다. 초가지붕은 비가 새지 않고 단열이 잘되어, 여름이면 시원하였고 겨울이면 따뜻하였다. 지붕만이 아니라 벽을 칠 때에도 짚은 없어서는 안 되는 재료였다. 짚을 작두로 여물처럼 잘게 썰어 진흙에 섞어 바르지 않으면 벽이 갈라졌다. 초가집 벽이 얇아도 보온이 잘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바닥재 또한 거의 짚에 의존하였다. 돈 있고 세도(勢道) 있는 사람들은 윤이 흐르는 장판지를 깔고 살았지만, 보통 백성들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그들은 돗자리를 깔거나, 더욱 곤궁할 경우 멍석이나 거적을 깔았다.236)인병선, 「마당 문화 꽃피운 멍석과 거적」, 『중등 우리 교육』 통권 50, 우리 교육(중등), 1994, 20쪽. 지붕에, 벽에, 바닥에 모두 짚을 썼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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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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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은 또한 대부분의 생활 도구를 만드는 재료였다. 짚을 꼬아 촘촘히 엮으면 알곡이나 가루가 새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종류의 저장 용기를 짚으로 만들었다. 멱서리는 알곡이나 왕겨 등을 담을 수 있는 용기였고, 멱둥그미는 고추나 콩 등을 짧은 기간 보관하기 위한 용기였다. 멍석은 흙바닥에 깔아 놓는 자리의 일종으로, 통풍이 잘되어 곡식을 말리고 사람들이 앉는 자리로도 썼다. 짚으로 만든 씨오쟁이, 망태 등은 습기가 차지 않아 썩을 염려가 없었다. 통풍이 잘 되어 다음 해 농사의 종자가 될 씨앗을 보관하는 용기로는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없 었다. 다듬잇돌을 올려놓는 다듬잇방석, 주둥이, 소등에 짐을 실을 때 쓰는 발채, 뚜껑을 예쁘게 만든 짚 독, 낫을 걸어 놓는 낫걸이, 낫 망태, 달걀 꾸러미, 토종 벌집을 덮은 멍덕, 주저리, 물동이를 이고 다닐 때 머리에 올려놓은 똬리, 짚방석, 닭 둥지, 심지어 짚 도시락까지 모든 생활 용구는 짚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였다.237)김시덕, 「짚과 함께 산 우리 조상들」, 『경향잡지』 제88권 제11호 통권 1544호, 한국천주교중앙 협의회, 2000, 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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맷방석과 둥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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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둥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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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으로 만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하나만 들라면 당연히 짚신을 들어야 할 것이다. 짚신은 조선 백성들의 발을 보호하였다. 짚신은 사람만 신었던 것이 아니다. 아주 추울 때 소에게도 짚신을 신겼는데, 이를 쇠신이라고 하였다. 겨울철 추위를 막기 위해 소에게 볏짚으로 만든 쇠덕석을 만들어 덮어 주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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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신
짚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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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와 관련해서 한 가지 더 말한다면, 쇠여물의 주재료가 바로 볏짚이었다. 볏짚은 보리짚이나 밀짚보다 부드러워서 소먹이로 적당하였다. 농가에서 소는 땅 만큼이나 중요한 재산이었다. 논밭을 갈려면 반드시 소의 힘을 빌어야 했다. 때문에 평상시 소를 건강하게 관리하는 것은 농가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18세기 말 영국의 농업 혁명이 사료 작물로 순무와 클로버를 재배하게 된 것을 핵심적 내용으로 하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소꼴로서의 볏짚이 가지는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짚은 비료의 중요한 재료였다. 앞서도 말하였듯이 조선 후기는 단위 면적당 생산성을 높이는 것에 모든 것을 걸었던 시기였다. 이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시비(施肥)였다. 오늘날과 같은 화학 비료가 없던 때에, 가장 중요하게 쓰였던 것은 두엄이었다. 두엄은 인분(人糞)이나 외양간에 깔았던 짚으로 만들었다. 요컨대 짚은 소의 가장 중요한 먹이이자 가장 중요한 비료였다. 이렇게 본다면 짚이 쌀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라고 말해도 터무니없는 과장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밖에 짚은 세제를 만드는 재료였고, 한지(韓紙) 원료가 되기도 하였다. 비누와 양잿물이 나오기 전까지 잿물은 가장 중요한 세제(洗劑)였다. 개항기 이후 새로 생긴 양잿물이라는 단어는 본디 우리나라에 잿물이라는 단어가 있었기 때문에 나온 것이었다. 빨래를 하려면 먼저 짚을 한 아름 태워 재를 내었다. 시루 밑에 짚을 깔고 그 위에 재를 놓은 다음 물을 부어 내렸는데, 이 물을 세제로 썼다. 또한 한지를 만드는 데 볏짚을 사용하였다. 짚을 주원료로 만든 종이는 매우 튼튼해서 인지(印紙)나 간지(簡紙)로 썼다. 이름도 짚 고(藁) 자를 써서 고정지(藁精紙)라고 하였다.238)인병선, 「짚으로 꾸려 간 농가 생활」, 『중등 우리 교육』 통권 48, 우리 교육(중등), 1994,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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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신 삼는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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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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