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6권 쌀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 제4장 개항에서 일제강점기 쌀 수출과 농촌 사회
  • 1. 개항과 쌀 수출
  • 쌀의 상품화와 농촌 사회
  • 지주제 강화와 농민층 분해
김윤희

향촌 사회를 장악하고 있었던 양반 지주층은 미곡 수출과 쌀값 상승에 편승하여, 지대(地代) 수입으로 들어온 쌀을 개항장에 판매하는 한편 소작료를 인상하면서 경제적으로 이익을 얻고 있었다. 개항 이후 쌀의 대일 수출 증가로 지주는 쌀 생산을 더욱 추동하였고, 쌀의 상품화 진전은 지주의 토지 확대로 귀결되어 토지를 상실한 농민층이 임금 노동자로 전환되는 양 상을 촉진하였다.

1890년대 이후 곡물 수출이 본격화되면서 지주들은 미곡 무역을 통한 수입 증대를 위해 소작 경영 이외에 임노동(賃勞動)을 이용하여 직접 농업 경영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94년 이전에 지주의 토지 소유 확대는 개항장의 배후지(背後地) 지역에 국한되어 나타났고 전국적으로 확대되지는 않고 있었다. 오히려 양반 지주층은 조선 후기 이래 정착된 지주 소작 관계를 재확립하기 위하여 향촌 사회에 대한 지배를 강화해 갔다. 외국과의 통상 조약을 반대하면서 내수어양(內修禦洋)의 입장에서 일어난 위정척사(衛正斥邪) 운동은 지배 계급이 갖고 있던 위기감의 표현이기도 하였다. 특히 임술년 농민 전쟁을 겪은 지배층은 농민이 외세와 결탁하여 체제 위기를 불러올 것을 경계하였다. 따라서 민보(民堡)의 설치 등 향촌 안정화를 위해 농민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고 하였다.

1890년 이전에는 상업적 농업의 발전과 부농(富農)의 성장이 촉진되는 양상을 드러내고 있었다. 경상북도 농업 경영의 사례를 통해 보자면 쌀은 산간(山間) 지역과 연읍(沿邑) 지역 간의 지역적 분업에 기초하여 생산이 촉진되고 있었으며, 미곡 수출의 영향은 오히려 부차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면화, 대마, 누에고치와 생사 등의 섬유 원료 생산은 섬유 제조업 공정의 분업이 발달하면서, 유통이 촉진되고, 생산도 증대되는 경향을 보였다. 특히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지역 간 시장이 확대되었고, 기선 도입 등으로 원격지 시장이 늘어나는 등 농작물의 유통량은 크게 증가되고 있었다.263)교통망 구축에 대해서는 정재정, 『일제 침략과 한국 철도』,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9 참조.

이러한 조건은 부농 경영의 성장을 가져오는 요인이었다. 농산물의 생산에서는 조방 경영(粗放經營)을 특징으로 하는 광작형(廣作形) 부농이 증가하고 있었다. 특히 쌀의 상품화에 유리한 조건을 가졌던 조시(朝市) 및 수공업 촌락 인근 지역 등지에서는 임금 노동을 고용하여 2정보 이상을 경영하고 있는 광작형 부농 경영이 늘어나고 있었다. 한 연구에 따르면 낙동강 부 근 지역에서는 광작형 부농 경영 형태가 최소한 총 농가 호수의 5% 전후를 차지하고 있다고 하였다.264)岩永重華, 『最新韓國實業指針』, 寶文館, 1904, 31쪽.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1890년대 이후 쌀 수출이 본격화되고 쌀값이 등귀하면서 점차 위축되었다. 쌀값의 상승으로 쌀 생산이 확대되면서 논을 소유한 지주에게 유리한 조건이 형성되었지만, 다양한 농작물을 판매하여 성장하는 부농에게는 불리한 조건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수입 면제품의 확대로 면포 생산이 줄어들었고, 이에 따라 재배 면화의 가격 조건이 불리해졌다. 콩은 수출 증대로 가격 조건이 유리하였지만, 다양한 상업적 농업을 통한 부농의 성장 조건은 이전과 달리 매우 제약되었다. 1894년(고종 31) 동학 농민 운동에 부농층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경제적 배경이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쌀의 단작화(單作化)와 쌀값의 상승이 진행되면서 지주제가 강화되는 현상은 1894년 이후 더욱 심화되었다. 이 시기 광무양안(光武量案)에 나타난 농민들의 토지 소유 실태를 보면 지주층의 토지 집중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경기도 광주 지방을 예로 들면 전체 농가의 6.5%에 불과한 1결 이상 소유 부농이 이 지역 농지의 40.5%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50부에서 1결 미만을 소유하고 있는 6.5%의 중농은 26.4%의 농지를, 25부에서 50부 미만을 소유하고 있는 9.6%의 소농은 16.9%의 농지를, 25부 미만을 소유하고 있는 35.5%의 빈농은 16.2%의 농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경기도 광주 지역 농가의 10% 남짓인 부농과 중농이 전체 농지의 70% 가까이를 차지한 반면, 대다수의 소농과 빈농은 30% 정도의 농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더욱이 수많은 농민은 토지를 소유하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양상은 지역에 따라 편차가 있었지만, 지주의 토지 집중과 상인의 토지 매입 현상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었다.

광주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도 농민들이 실제로 소유하고 있는 토지는 군 또는 면 전체의 1호당 평균 소유 면적에 훨씬 미치지 못하였다. 농업 경 영 형태에서는 소작 경영이 확대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광주, 수원, 안성, 온양, 연산 등 다섯 개 지역 소작 농민의 평균 분포율은 자작농이 14.1%, 자·소작농이 57.7%, 소작농이 28.2%로 소작 관계에 놓인 농민의 비중이 89∼90%로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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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소작 관계에 놓인 농민 중에는 대체로 자·소작농의 비중이 훨씬 높았다. 그들 중에는 곡물 상품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농업 경영을 합리화함으로써 성장해 갈 수 있었던 부농층도 존재하였다. 특히 궁방전(宮房田)이나 관둔전(官屯田) 같이 대지주의 농지가 집중적으로 발달한 지역에서는 농지를 임대하여 경영하는 것만으로도 부농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전반적인 농업 경영 조건이 지주에게 유리하게 형성되면서 소작지의 확대를 초래하는 방향으로 작동되고 있었기 때문에 경작지의 차지 경영을 통해 부농으로 성장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1890년대 이후 쌀 수출의 증가와 쌀값의 등귀는 지주제를 강화함과 동시에 토지세였던 결가(結價)를 인상시켰다. 이러한 조건은 소작료와 세금을 납부해야 하는 농민층에게는 가중한 부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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