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6권 쌀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 제4장 개항에서 일제강점기 쌀 수출과 농촌 사회
  • 1. 개항과 쌀 수출
  • 쌀의 상품화와 농촌 사회
  • 농촌 임금 노동자의 증가
김윤희

조선 후기 이래 조선 사회는 점차적으로 신분제가 해체되는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었다. 신분제가 폐지된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에는 과세에서 신분적 차별이 없어졌으며, 노비보다는 고용 노동이 일반화되는 경향이었다. 여기에 쌀 수출과 면포 수입의 증대로 인한 상품 화폐 경제의 발전은 농민층의 분해를 더욱 촉진하고 있었다.

소작료의 상승, 소작료의 생산물 납부로의 전환 등은 소작 농민의 경제적 부담이 강화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여기에 물가 상승에 따른 소비의 위축, 세금의 인상 등은 소농과 빈농층의 몰락을 촉진하였다. 이들은 점차 토지를 잃고, 임금 노동자로 전락해 갔다.

그러나 토지를 상실한 농민층을 흡수할 수 있는 도시는 공업화가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 대부분은 다시 농업 노동자로 생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더욱이 노동 집약적 생산을 요하는 이앙법(移秧法), 곧 모내기식 쌀 생산이 확대되면서 농촌에서는 폭넓은 농업 노동자층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쌀, 보리 등을 미리 받고 농번기에 노동력을 제공하였다. 또한 지주층이 주관하는 개간 사업에도 동원되었으며, 그 밖에 나무를 벌채하고 운반하는 일, 뽕나무밭의 잡초 제거, 집수리 등에 고용되어 고가(雇價)를 받거나 땔감 장사나 야채 장사를 하여 의식주를 해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받는 임금은 매우 빈약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노역에 종사하면서도 늘 식량 부족과 부채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에 일부는 머슴살이를 하거나 광산, 부두, 철도 공사장 등 노동력이 필요한 곳으로 진출하여 생계를 유지하기도 하였으며, 일부는 국경을 넘어 만주 지역으로 가거나 화적(火賊)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의 지도부는 하층 양반, 요호 부민층(饒戶富民層)이 주도층을 이루고 있었으나, 농민군은 빈농, 농촌 노동자, 영세 상인, 영 세 수공업자, 천민 등이었다. 이들은 전주 입성(全州入城) 단계까지는 대체로 상층 지도부의 구상대로 움직였으며 아직 자신들의 욕구를 스스로 표출하기보다는 상층 지도부의 통제를 따랐다. 그러나 집강소(執綱所) 단계에 이르러 평민, 천민층, 사회적 불만 계층의 다수가 참여하면서 더 이상 상층부의 지휘에 따라 움직이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주도권을 쥐고 급진적 투쟁을 전개해 나아가기도 하였다. 농촌 임노동자층이 무장 농민군의 주력을 형성하게 되면서 토호(土豪), 요호 부민층의 전곡(錢穀)을 약탈하기도 하였으며, 원한 관계가 있는 양반 유생층을 응징하기도 하였다.265)김도형, 「권업모범장(勸業模範場)의 식민지 농업 지배」, 『한국근현대사연구』 3, 한국근현대사연구회, 1995, 140∼2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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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노동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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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개입으로 동학 농민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 뒤 이들은 각종 민란에 참여하거나 의병, 영학당(英學黨), 활빈당(活貧黨) 등에 참여하여 저항을 계속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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