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6권 쌀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 제4장 개항에서 일제강점기 쌀 수출과 농촌 사회
  • 2. 일제강점기 쌀 생산과 농촌 사회
  • 일본 농법의 보급과 산미 증식 계획
  • 일본 개량 품종의 보급
김윤희

일본은 조선에서 자국의 자본주의 발달을 위해 필요한 식량과 원료를 공급받기 위해 생산성 증대를 농업 정책의 최우선적 과제로 설정하였다. 1912년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쌀 생산과 면화 생산 그리고 양잠(養蠶)과 목축업의 개량과 증산에 대한 중대 훈시(訓示)를 발표하였고,271)지수걸, 「일제하 농민 운동」, 『한국사』 15, 한길사, 1994, 267∼306쪽. 이에 따라 농업 정책이 구체화되었다. 전반적인 농업 생산성의 제고를 위한 것이었지만, 역시 중심은 쌀이었다. 일본 자본주의 발달의 동력이 되는 저임금 기반을 위해서는 조선의 쌀이 무엇보다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 조선 총독부는 쌀의 품종 개량, 비료, 개관 사업 등을 중심으로 하여 전통적인 쌀의 품종과 재배법을 개량한다는 미명하에 일본의 품종과 일본 농법의 보급에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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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라우치 마사타케
데라우치 마사타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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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쌀 품종과 농법 특징은 수전(水田) 농법과 수도(水稻) 품종이었다. 일본은 조선과 달리 물이 많은 논에서 쌀을 재배하였고, 기후와 토질은 쌀의 수전 재배에 유리하였으며, 단위 면적당 생산량도 조선보다 높았다. 반면, 조선은 전통적으로 대부분 마른 밭에서 쌀을 재배하였고, 일부 관개 시설을 갖춘 곳에서 수전 농법을 사용하였다. 조선 후기부터 수전 농법과 수도 품종이 보급되기는 하였지만, 가뭄이 들면 한전(旱田)보다 재해가 심각하기 때문에 크게 확산되지는 못하였다.

일본 수도 품종의 보급과 농법 개량이 시도된 것은 1903년부터였다. 당시 재조선 일본인 상업 회의소 연합회는 일본 공사 하야시(林權助)에게 ‘한국 농사 개량에 관한 청원서’를 제출하여 일본인들의 입맛에 맞는 쌀의 공급을 위해 농사 시험장을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272)蘇淳烈, 「1930年代朝鮮における小作爭議と小作經營」, 『アジア經濟』 36-9, アジア經濟硏究所, 1995, 2∼21쪽. 일본인이 필요로 하는 쌀 의 생산을 위해 조선 농업을 재편해야 하는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되는 가운데 1904년 일본은 조선 농업을 개량하기 위해 ‘한국 토지 농산 조사’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하여 1906년 4월 권업모범장 관제(勸業模範場官制)를 발포하고 6월 경기도 수원에 권업모범장을 개설하였다. 통감부의 목적은 일본의 농업 방법을 권업모범장에서 시행해 보고 그것을 보급하여 일본인의 입맛에 맞는 쌀을 생산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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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업모범장
권업모범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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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촬영한 권업모범장 청사
1910년대 촬영한 권업모범장 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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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업모범장은 일본의 수도 품종을 도입하여 조선의 기후와 토질에 맞는 품종으로 개량해서 농촌에 보급하였다. 1925년 이전 권업모범장을 통해 도입된 대표적인 개량 품종은 조신력(早神力), 은방주(銀坊主), 곡량도(穀良都), 애국(愛國) 등이었다. 개량 품종의 보급률을 보면 1912년 5%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후 크게 증가하여 1920년에는 65%, 1936년에는 86%에 달해 재배 품종의 주종을 이루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초에 보급률이 저조한 것은 모두 수도 품종인 일본 개량 품종이 마른 땅에서 재배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개 시설이 갖추어지지 않는 한 생산성의 향상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따라서 1910년 권업모범장은 개량 품종의 보급보다는 비료 연구와 보급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1920년대 산미 증식 계획(産米增殖計劃)이 실시되고 수리 조합을 통한 개관(漑灌) 사업이 확대되면서 개량 품종이 급격히 보급될 수 있었다.

특히, 권업모범장 등의 농사 시험 기관에서 개량된 품종은 조선 농민의 의사는 무시된 채 각 지역의 조선 총독부 어용 단체와 지주를 통해 보급되었다. 토지의 상품화가 크게 진전되고 지주의 이익이 크게 보장되는 환경과 소작농의 비율이 높았던 농촌 사회에서 개량 품종은 지주를 통해 거의 강제적으로 보급되었다. 또한 유출되는 조선 쌀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 1915년부터 미곡 검사를 실시하였다. 미곡 검사는 쌀의 건조와 조제(調製)를 감독하여 일본의 요구에 맞는 품질의 쌀을 생산하기 위한 것이었다.273)朝鮮農會, 「小作爭議に關する地主の新戰術」, 『朝鮮農會報』(2월), 1932.

한편, 권업모범장에서 조사한 조선 품종은 모두 1,158종으로 그중 581종이 중부와 남부 지방에서 재배되는 것이었다. 조선 품종은 비료를 다량 투입하는 농법에 적합하지 않았지만, 가뭄에 강하고 수분이 없는 토양에서도 발아력(發芽力)이 우수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1910년대 조선 수전의 30∼50%가 천수답(天水沓)이던 상황에서 가뭄에 약한 일본 개량 품종의 강제 보급은 오히려 토지 생산성을 저하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일본이 필요로 하는 쌀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일본 개량 품종의 보급과 동시에 조선 전통의 한전 농법도 변화시켜야 가능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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