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6권 쌀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 제4장 개항에서 일제강점기 쌀 수출과 농촌 사회
  • 2. 일제강점기 쌀 생산과 농촌 사회
  • 지주와 농민 그리고 농촌 사회
  • 농촌 경제의 악화와 소작농 증가
김윤희

일제강점기 농업 정책은 조선 쌀의 증산과 쌀의 대량 이출을 목적으로 하였던 만큼 쌀의 상품화를 크게 촉진하였다. 이로 인해 쌀의 유통과 농가 경영 나아가 농촌 사회를 크게 변화시켰다. 조선인의 쌀 소비량이 계속 줄어들어 농민 생활이 악화되어 갔던 만큼 일본으로 쌀의 유출이 크게 증가하였다. 농가 경제 악화를 기반으로 가능하였던 식민지 농업 경영은 지주제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었다. 소작 경영을 통해 지주가 보유하는 쌀의 양은 증가하였던 반면 소작농은 자가 소비분의 쌀을 팔아 잡곡으로 연명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전체 조선 농가 중 지주 농가는 3.6%에 불과하였지만, 그들이 판매하던 쌀의 양은 전체 시장 판매량의 56%를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높았다.283)京城日報社·每日新報社, 『朝鮮年鑑』, 1945, 106∼107쪽. 지주가 보유한 쌀의 판매량 증가는 생산된 쌀의 분배 구조가 매우 불균등하였다는 것을 보여 준다. 반면, 소작 농가는 자가 소비분을 판매하고 잡곡을 구입하는 한편 짧은 소작 계약과 불리한 소작 관행으로 점차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1920년에서 1933년까지 지주, 자작 지주, 자작농, 자·소작농, 소작 농가 수의 변동을 보면, 경제 상태에서 양극단(兩極端)에 있던 지주와 소작농이 크게 증가하였다. 중간 계층이던 자작농의 경우 쌀값이 상승하던 1920년대 전반기에는 증가세를 보였지만, 이후 쌀값의 하락으로 농가 경제가 악화되면서 감소하였다. 경제적으로 상층 농가였던 자작 지주의 경우도 자작 농가의 변화 추이와 비슷하게 감소하였다. 중상층 농가의 감소는 전반적으로 농가 경제가 악화되었음을 분명히 보여 주는 지표라고 할 수 있다. 자작농에 비해 쌀의 보유가 상대적으로 많았던 자·소작농의 경우는 1920년대 부터 전반적으로 감소하였고, 1930년 이후 급격히 감소하였다.

조선 농가 호수의 이러한 변화는 경지 면적의 변화 양상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1918년 50.4%, 1926년 50.7%였던 소작지 면적이 이후 급상승해서 1932년에는 56%로 높아졌다.

일제강점기 농업 정책과 쌀값의 하락으로 인해 농가 경제는 더욱 어려워졌다. 1922년 조사된 전라남도의 농가 수지(收支) 상황을 보면 경작 면적이 큰 경우에는 이익을 보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쌀값이 상승하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지주, 자작농, 자·소작농, 소작농 중 20정보 이상의 넓은 토지를 경작하는 경우는 수지 상황이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20정보 이하로 중층 이하의 경작 면적을 보유한 자·소작농이나 소작농은 대부분 적자였다. 5정보에서 20정보를 경작하는 자·소작 농가의 적자는 30엔이었으며, 소작농은 21엔이었다. 자·소작 농가와 소작 농가의 적자는 점차 인상되는 고율의 소작료 때문이었다.284)강만길 엮음, 앞의 책, 156쪽.

산미 증식 계획의 실시로 수리 조합 비용의 부담 증가, 소작료의 인상 그리고 쌀값의 하락이라는 삼중고(三重苦)를 겪던 농민층의 수지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1931년 소작 농민의 75%가 부채를 안고 있었으며, 농가당 평균 부채액은 65엔이나 되었다. 당시 65엔은 10석을 생산하는 1정보를 소유한 자작농의 1년 생산량과 맞먹는 규모였다.

1925년 이후 농가 경제의 부채 불황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자금 동원 능력이 있는 계층만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그러나 당시 금융 기관을 이용할 수 있는 계층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금융 대출 관행상 대출은 토지 담보 대출이 일반적이었고, 상대적으로 이자율이 낮았던 조선식산은행과 동양 척식 주식회사는 주로 대지주들에게 대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자·소작농과 소작농은 월 3∼4%에서 10%에 달하는 높은 이자율을 감당하면서 사금융에 의존하여야 했다.

또한, 중농층 이하 농민의 금융 편의를 위해 건립된 농업 창고(農業倉庫) 의 이용에서도 이들은 배제되고 있었다. 원래 농업 창고는 금융 기구를 이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농층 이하 농민들에게 저리 자금을 대부해서 그들의 쌀 방매를 방지하고자 하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 농회의 보고에 따르면 농업 창고 이용자의 다수는 지주나 부호 농가 혹은 상인이고, 구제가 필요한 중농 이하는 이용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중농 이하 농민층은 비료대, 기타 부채에 쫓겨 쌀값의 등귀에 관계없이 수확 직후 곧 바로 방매하는 실정이라고 하였다.285)朝鮮總督府 學務局 社會課, 「細窮民及浮浪者又は乞食數調」, 『朝鮮社會事業』 13(6月), 朝鮮社會事業協會, 1935.

일본 농촌의 경우 쌀값 하락으로 농업 구조에 변화가 일어났다. 일본 농가는 농업 경영을 다각화하여 상업적 농업을 전개하였으며, 동시에 지주제가 약화되고 중농 표준화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조선은 산미 증식 계획에 따른 일본 수도 품종, 수전 농법의 보급 등으로 밭을 수전으로 개량하는 사업이 계속 추진되었고, 이로 인해 쌀의 단작화가 오히려 더 강화되어 갔다. 농업 경영의 다각화보다는 쌀의 증산을 목적으로 하는 정책이 실시되는 가운데 조선 농업은 벼의 단작화가 급속히 진행되었고, 이로 인해 쌀값의 하락이 곧 농가 경제의 파탄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한 예로 1930년 경상남도의 경우 농업을 포기하고 전업한 농가 호수가 1만 1600여 호, 3만여 명에 달하였다. 이 숫자는 경상남도 총호수인 29만여 호의 4%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1930년대 만주와 일본 등지로 이주가 증가하게 된 것도 이 시기 농가 경제의 파탄과 나아가 식민지 농업 정책의 결과였다.286)전시 체제기 농가 경제 실태에 대해서는 이송순, 「일제하 1930·40년대 농가 경제의 추이와 농민 생활」, 『역사 문제 연구』 8, 역사문제연구소, 2002, 79∼123쪽 참조.

농업 경제의 파탄이 최하층 조선 농민들에게 집중되면서 농민의 소작 쟁의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1920년대 하반기 크게 증가한 소작 쟁의는 점차 농민 운동으로 조직화되어 각 지역에 소작인 조합, 농민 조합 등이 결성되었다. 1927년 전국 규모의 조선 농민 총동맹이 결성되었다. 그리고 1930년대 조선 총독부의 탄압이 격화되고 농가 경제가 파탄으로 내몰리자 농민들은 혁명적 농민 조합 운동을 통해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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