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6권 쌀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 제4장 개항에서 일제강점기 쌀 수출과 농촌 사회
  • 3. 일제의 전쟁 수행과 조선의 쌀
  • 농촌 경제의 위기와 조선 총독부의 농업 정책
  • 소작 쟁의에 대한 조선 총독부의 대응
김윤희

쌀값의 하락, 농가 수지의 악화, 지주 경영의 강화 등으로 1930년대 농촌 사회는 점차 피폐해져 갔다. 1932년 300건이었던 소작 쟁의가 1937년 3만여 건으로 증가하였을 정도로 농민층은 생존을 위협받고 있었다. 특히 수전 농법의 강제적 보급과 비료 투하를 통한 생산력 증대 정책은 농가 부채를 증가시켰다. 여기에 쌀값의 하락은 농촌 사회에 부채 불황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1930년대 초 농촌 사회는 조선 총독부의 농업 정책으로 인해 파탄의 위기에 직면하였다. 1931년 조선 총독부의 조사에 따르면, 농가 부채의 총액은 5억 원 정도였다. 이 액수는 조선 전체 경지 가격의 40%에 해당하는 엄청난 규모였다. 여기에 쌀값 하락으로 이윤이 축소된 지주들이 농업 경영에 개입하면서 소작농에게 매우 불리한 환경이 조성되었다. 1929년 10월부터 1930년 9월까지 약 1년간 조선 전체에서 무려 24만 건 내외의 소작권 이동이 발생하였고, 이에 따라 소작 쟁의도 크게 증가하였다. 1931년 한 해 동안 생존을 위한 투쟁에 참여하였던 농민이 약 4만 3000명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경찰에 검거된 농민이 1,900명이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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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식민지 체제 위기에 봉착한 조선 총독부는 이제까지 쌀의 증산을 목적으로 하던 농업 정책을 변경해야 할 상황에 직면하였다. 조선 총독부는 1932년 7월 정체되어 있던 농업 생산성과 농가 부채를 줄이기 위한 방법으로 농촌 진흥 운동을 입안하였다. 그리고 급증하는 소작 쟁의에 대응하여 ‘조선 소작 조정령(朝鮮小作調整令)’과 ‘조선 농지령(朝鮮農地令)’을 제정하였다.

1932년 12월 제정된 조선 소작 조정령은 소작 쟁의를 조선 총독부가 행정 개입을 통해 법적으로 통제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조선 총독부는 먼저 각 지방에 소작 위원회를 설치하여 재판소의 지휘를 받게 하는 한편, 소작 쟁의가 발생한 지역의 지주와 소작농 간 타협과 화해를 권유하도록 하였다. 나아가 소작 관계 당사자의 요구가 있을 때에는 소작 조건의 유지 및 개선에 관한 사무도 처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선 소작 조정령은 소작 쟁의 발생의 근본 원인이었던 소작 관행에 대한 시정 및 소작 관계를 규정하는 조문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작 농민의 저항을 무마할 수는 없었다. 이에 조선 총독부는 이미 공포된 소작령을 대폭 수정·보완하 여 1934년 4월 ‘조선 농지령’을 제정하였다.

조선 농지령은 경작을 목적으로 하는 토지의 임대차에만 국한시킨 것으로 적용 범위로 볼 때는 이전의 조선 소작 조정령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소작 쟁의의 한 요인이던 마름(舍音) 등 중간 착취자에 대한 통제를 규정한 점에 있어서는 이전 소작령과 차이가 있었다.

부(府)·군(郡)·도(道)에 소작 위원회를 두고 마름의 악폐를 제거하기 위해 지주가 마름과 같은 소작지 관리인을 둘 경우 지방 관서에서 그 인물의 적부(適否)를 소작 위원회의 의견에 따라 판단하게 한 것이나, 소작권 이동을 억제하기 위해 작물의 성격에 따라 3년 내지 7년 이상의 기한을 규정한 것 등은 당시 발생하던 소작 쟁의의 주요 원인을 개선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작 쟁의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였던 고율 소작료에 대한 제한 규정이 없었다는 것은 여전히 지주 이익을 옹호하는 것이었다. 이 법령을 통해 소작농의 경우 마름의 전횡에 대한 규제나 어느 정도의 소작 기간 확보는 이루어졌지만, 여전히 소작료 인상에 대한 어떠한 법적 보호도 받을 수 없었다. 따라서 이 법령의 당초 제정 목적은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였고, 소작 쟁의는 그 뒤로도 수없이 발생하였다.

한편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면서 조선 총독부는 전쟁 수행을 위한 식량 조달을 위해 더 이상 소작 쟁의에 의한 생산 손실을 방치할 수 없었다. 1939년 12월 제정된 ‘소작료 통제령(小作料統制令)’은 그동안 소작 쟁의의 중요한 요인이던 소작료의 인상을 금지하는 한편 적정 소작 조건을 정하고, 부당한 소작 조건에 대해 지방 장관이 명령권을 발동하여 변경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소작료 통제령은 앞서 제정된 조선 농지령과 비교하여 지주의 이익을 크게 제한하는 것이었다. 지주제에 기초하여 쌀의 증산을 추진해 오던 조선 총독부가 이처럼 정책적 전환을 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제까지 진행된 농업 생산성 증대가 한계에 다다랐기 때문이었다. 즉, 비료 투하, 수리 사업 등을 통한 생산성 증대 정책이 소작 농가의 증가로 연결되어 농업 인구의 노동 의욕을 크게 감퇴시켰을 뿐만 아니라 농민층의 저항에 부딪쳤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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