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6권 쌀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 제4장 개항에서 일제강점기 쌀 수출과 농촌 사회
  • 3. 일제의 전쟁 수행과 조선의 쌀
  • 농촌 경제의 위기와 조선 총독부의 농업 정책
  • 농촌 진흥 운동
김윤희

농촌 진흥 운동은 1932년 7월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조선 총독이 도지사 회의 석상에서 운동의 취지와 방침을 밝히면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우가키 조선 총독의 지시와 별개로 당시 사회단체는 색깔 있는 옷을 장려하고, 금주와 금연 같은 생활 개선 사업을 위주로 하여 진흥 운동을 벌여 왔었다. 당시 면장과 면서기들이 장날이면 시장 입구에서 흰옷 입은 사람에게 먹물을 넣은 총을 쏜다든가 공중 화장실 출입을 막는 등 충돌이 빚어지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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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가키 가즈시케
우가키 가즈시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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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1933년 3월 정무총감(政務總監)이 ‘농산어촌(農山漁村) 진흥 계획 실시에 관한 건’을 발표하면서부터 농촌 진흥 운동은 본격화되었다. 이 통첩에 따르면 농가 경제 갱생(更生) 5개년 계획의 실행을 위하여 각 면마다 한 개의 지도 부락을 선정해서 5개년 동안 ‘식량 충실’, ‘현금 수지 개선’, ‘부채 정리’ 등 세 가지 목표(目標)를 연차적으로 달성해 나아갈 것을 지시하였다. 여기에 조선 총독부는 농촌 진흥 운동을 보조하는 시책으로서 궁민을 구제하기 위한 토목 공사로서 취로 사업(就勞事業), 농가 부채 정리를 위한 저리의 자금 융자, 농민 후계자 육성 사업을 위한 자작농 창설 사업 등을 실시하였다. 또한 앞서 언급한 ‘조선 농지령’ 역시 농촌 사회 안정화를 위한 비상조치의 하나로 실시되었다.

그러나 1931년 만주 사변 이후 중일 전쟁의 위기가 고조되어 가자 조선 총독부는 애초 목적으로 하였던 농촌의 ‘자력갱생(自力更生)’보다는 점차 ‘내선일체(內鮮一體)’를 통한 생산 동원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개별 농가 경제의 안정보다는 부 락 단위의 생산 증대를 더 중요시하는 쪽으로 방향이 바뀌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정무총감은 ‘시국의 진전에 대처해야 할 운동의 사명 수행에 관한 건’이란 통첩을 통해 전쟁 물자 동원에 있어서 농업의 역할을 규정하였다. 즉, ‘전쟁을 수행하는 국민으로서’ ‘비상시 국책에 관계되는 농작물의 보급, 현금 또는 현물의 헌납’을 강조하였다.

조선 총독부는 이와 함께 ‘농산어민 보국일(農山漁民報國日)’을 선포하고 촌락마다 ‘생업보국 전답(生業報國田畓)’을 조성할 것을 지시하였다. 1937년 9월 첫 번째 보국일 행사에는 전국 5만 8,000여 개 촌락에서 무려 350만 명의 농민을 강제 동원하여 보국 작업이라는 이름하에 공동 노동을 벌였으며, 이 과정에서 얻은 수입금 15만 1000여 원과 곡물 250석을 전액 헌납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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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산어촌 진흥 운동에 관한 총독 훈시
농산어촌 진흥 운동에 관한 총독 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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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초반 농가 경제의 안정화를 위해 실시하였던 농촌 진흥 운동은 일제의 침략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생산력 증진을 위한 농민 동원의 수단으로 전락해 갔다. 특히 1938년 7월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 연맹(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이 결성되었는데 이때부터 조선 총독부는 농가 단위의 ‘자력갱생’보다는 부락 단위의 ‘자조공려(自助共勵)’를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운동을 진행할 집단으로 구장, 연맹 이사장, 애국 반장, 중견 청년 등을 이용하였다. 조선 총독부는 농촌 진흥 운동 조직이었던 마을 진흥회를 점차 전쟁 동원을 위한 ‘자치 공려 단체’로 전환하려 하였다. 그러나 애초 자력갱생 조직으로 구성된 진흥회를 부락민 동원 조직으로 개편하는 것이 쉽지 않아 오히려 여러 가지 혼란만 조장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에 조선 총독부는 ‘고도 국방(高度國防) 국가 체제 건설’을 목표로 한 국민 총력 운동을 전개하였고, 1940년 12월 농촌의 모든 진흥 운동 관련 조직을 국민 총력 운동 조직으로 통폐합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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