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6권 쌀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 제5장 분단과 근대화 그리고 쌀의 의미
  • 1. 지배와 저항의 상징, 쌀
허은

1945년 9월 8일 38도선 이남에 진주한 미 점령군이 가장 예상치 못했던 문제가 식량 문제였다. 조선은 쌀 수출국으로 알려져 왔기 때문이다. 미군정 당국이 한반도에 진주한 직후 “조선은 결코 쌀을 충분히 생산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은 과장된 언급이 아니었다.287)History of the United States Armed Force in Korea 4(이하 HUSAFIK으로 약함), 돌베개 영인본, 31쪽.

미 점령군이 진주할 시점에 남한의 식량 수급 상황은 좋지 않았다. 패망 직전 일본은 자국의 긴박한 식량 사정과 전선의 군량 확보를 위해 조선에서 식량 공출(食糧供出)을 강행하였다. 식량 공출과 상관없이 매해 8월은 미곡 연도(米穀年度)288)미곡 연도는 11월 1일부터 다음해 10월 31일까지 기간을 지칭한다.가 끝나가는 때로, 국내에 있는 양곡이 거의 소진되는 시점이었다. 따라서 미 점령군이 진주하였을 때 조선의 식량 재고는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38도선 이남의 식량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던 요인은 전재민(戰災民)의 대거 귀환이었다. 일제 패망과 함께 일본, 만주, 중국 대륙 등에서 대략 250만에 달하는 동포들이 귀환하였다. 이는 남한 식량 소비 인구의 급증을 의미하였다. 귀환 전재민과 광복 후 혼란으로 양산된 실업자와 빈민 그리고 자연재해로 인해 발생한 이재민까지 포함하면 미군정 통치 3년 동안 내내 구 호(救護)를 필요로 하는 인구가 최소한 200만 명 이상이 존재하였다.289)황병주, 「미군정기 전재민 구호(救護) 운동과 ‘민족 담론’」, 『역사와 현실』 35, 한국역사연구회, 2000, 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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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 동포 천막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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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남한에서 발생한 식량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식량 소비 인구의 급증과 함께 일제 식민 지배가 대중에게 미쳤던 영향을 같이 검토할 필요가 있다. 1945년 직후 미군정하 남한 대중이 표출한 쌀에 대한 정서는 일제 식민 통치 아래서의 경험을 빼놓고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제는 대륙 침략 전쟁 수행을 위해 조선을 ‘대륙 병참 기지(大陸兵站基地)’이자 ‘동아 식량 기지(東亞食糧基地)’로 배치하였다. 달리 말하면 일제는 조선을 ‘일본’에 대한 ‘식량 공급 기지’로서만이 아니라 만주, 북중국을 포괄하는 동북아시아의 식량 기지로서 역할을 수행할 것을 강요하였다.290)金子永徽·岩田龍雄, 「戰時下朝鮮に於ける米穀政策の展開(上)」, 『殖銀調査月報』, 朝鮮殖産銀行調査部, 1943, 20∼21쪽.

‘식량 안전(食糧安全)’의 확보는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만큼 중요한 것이다. 중일 전쟁(中日戰爭)의 장기화는 일제로 하여금 미곡 정책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장기전은 ‘국력전(國力戰)’의 형태를 띠게 마련이고, 후방 경제의 안정은 전쟁의 승패와 직결되기 때문이었다. 식량(특히 주식인 쌀)의 생산 확대와 가격 안정은, 곧 경제 안정과 불가분의 관계였기에 식량 정책은 전시 경제 정책의 핵심 사안이었다.291)중일 전쟁 장기화에 따른 식량 문제 및 정책 강조는 다음 글을 참조. 山本尋己(조선 총독부 곡물 검사소장), 「帝國の食糧問題と朝鮮米」, 『朝鮮行政』 2卷 12號, 帝國地方行政學會, 1938. 12 ; 土井忠平, 「米穀問題の新登場と朝鮮米政の重點」, 『朝鮮行政』 18卷 203號, 帝國地方行政學會, 1939. 9. 일제는 태평 양 전쟁(太平洋戰爭)을 개시한 이후 1943년부터 ‘조선 식량 영단(朝鮮食糧營團)’을 설치하고 식량 공출과 배급 정책을 철저히 시행하였다. 쌀을 공출당한 조선인들은 매년 200만 석 안팎이 수입된 안남미(安南米), 만주산 조, 기타 잡곡 등을 대신 먹으며 허기를 채웠다.

일제의 패망과 함께 쌀 소비에 대한 철저한 통제가 사라졌다. 농촌과 도시에서는 새로운 국가 건설에 대한 장밋빛 기대와 함께 그동안 쪼그라들었던 부엌살림을 조금이나마 펴며 오랜만에 만족한 미소를 띨 수 있게 되었다.

일제의 강력한 미곡 통제 정책과 공출제를 경험한 조선인의 쌀에 대한 애착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1945년 말 미 국무부 정치 고문 베닝호프(H. M. Benninghoff)는 남한에서 쌀 부족이 증대되는 이유 중에 ‘자유로운 쌀 소비의 비정상적인 폭발’과 쌀이 ‘일본으로 밀반출 된다.’고 믿는 농민들이 쌀을 잘 내놓지 않는다는 사실 등을 거론하였다.292)HUSAFIK 4, 42쪽. 베닝호프의 언급은 일제강점기 말에 강제 공출당하며 대신 잡곡을 소비해야만 하였던 경험이 ‘해방 공간’에서 대중의 쌀에 대한 정서에 강한 영향을 끼쳤음을 확인시켜 준다.

미군정은 1945년 10월 5일 자유주의 이념과 식량 통제에 대한 대중적 혐오감을 고려하여 식량에 대한 통제 정책을 철폐하고 ‘양곡 자유 시장 정책’을 취하였다. 미군정은 더 이상 일본으로 쌀이 수출되지 않는 점, 1945년 쌀 대풍이 예상된다는 점, 일제강점기와 동일하게 강력한 통제를 유지하면 민주주의적 절차를 유지하기 힘들다는 점 등을 고려하여 쌀의 자유로운 유통을 허용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이후 남한에서는 급증하는 쌀 수요를 안정적으로 뒷받침해 줄 수급 구조 체계가 잡혀 있지 않았다. 반면, 식량 소비 인구의 급증과 조선은행이 천문학적으로 발행해 놓은 화폐 등은 인플레이션의 경기 불안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햅쌀 출하기인 11월에 쌀값은 내려가지 않고 오히려 일제강점기 말의 암거래 시세인 150원까지 급등하였다. 이에 당황한 미군정은 ‘미곡 최고 가격제’를 실시하였다. 미곡 최고 가격제가 실시되자마자 시장에서는 오히 려 쌀이 자취를 감추었다. 쌀장수들이 쌀값이 더 폭등할 것이라 예상하고 가격이 규제된 시장에 쌀을 내놓지 않았던 것이다. 언론은 ‘쌀 기근’ 발생을 ‘사리사욕(私利私慾)에 어두운 모리배(謀利輩)의 소행’이라고 강력히 성토하였다. 미군정은 공권력을 동원하여 미곡상이 매점매석(買占賣惜)한 쌀을 압수하기도 하였으나, 농가에서마저 쌀을 출하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러한 조치가 효과가 있을 리 없었다.

1946년 1월 25일 미군정청은 ‘미곡 수집령’(법령 제45호)을 발포하고 쌀의 강제 수집에 들어갔다. 미군정은 상인, 지주, 농민을 가리지 않고 자가 식량 보유미를 제외한 미곡을 모두 강제 수매한다고 공포하였다. 이와 함께 미군정은 ‘조선 생활필수품 회사’라는 기구를 설치하여 미곡 수집을 담당하게 하고 2월부터 강제 수매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이 1945년에 수집한 양은 목표치의 12%에 그쳤고, 1946년 생산된 쌀의 수집도 미점령군과 지방 경찰의 강제력이 동원되어야 겨우 목표치를 달성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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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곡 수집 협조 전단
미곡 수집 협조 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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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의 미곡 수집 정책이 왜 성공하지 못하였을까? 그 까닭을 알기 위해서는 당시 쌀 수집 대상이었던 농촌의 실태를 명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미군정의 식량 수집이 본격적으로 시행된 1946년의 미곡 생산은 특히 저조하였다. 1946년 11월 21일 농무부장 이훈구(李勳求)의 발표에 따르면 1946년 쌀 생산고(生産高)가 1940∼1944년 연평균 생산량의 82% 정도에 불과하였다.293)HUSAFIK 4, 46쪽. 미곡의 생산고도 1940∼1944년 평균이 13석(石) 2두(斗) 6승(升)이었는데 1946년에 와서는 겨우 10석 8두 9승으로 생산량이 떨어졌다.294)김동호, 「남조선 농업의 참상」, 『조선 경제』 3권 2호, 조선경제사, 1948. 4, 17쪽.

<표> 미군정기 식량 공출
단위 : 천석
연도 생산고 수집 목표량 생산고 대비 수집량 수집 목표량 대 실적비
1946년 추곡 12,050 4,295 35.6% 3,558 82.8%
하곡 4,126 1,289 31.2% 619 48.0%
1947년 추곡 13,850 5,156 37.2% 5,005 97.7%
하곡 3,719 707 19.1% 699 97.7%
✽대한 금융 조합 연합회 조사부, 『한국 농업 연감』, 1955, 523쪽.

쌀 생산이 저하된 상태에서 많게는 생산량의 절반 이상, 적어도 3분의 1 이상을 가져가는 미군정의 미곡 수집은 농민들에게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1946년의 경우 수확량이 감소하여 농가 쌀 보유량은 일제강점기 말과 거의 차이가 나지 않았다. 논농사를 짓는 농민의 식량 사정은 조금도 나아진 바가 없었다. 단지 전작(田作)에 있어서는 보리 이외에 공출이 없고, 소작료도 현금으로 낼 수 있게 된 점이 그나마 개선된 부분이었다. 하지만 수확고의 3분의 1을 넘게 수매를 당하는 상황에서 영세농은 식량난을 피할 수 없었다.

흥미롭게도 많은 농민이 미곡 수집에서 제외된 자가 보유의 쌀을 시장에 내다 팔았다. 그러나 이것은 식량에 여유가 있어서 내놓은 것이 아니라, 각종 조세 공과금 및 기부금 또는 부채 상환을 위한 현금 지출이 필요해 기아 판매(饑餓販賣)를 한 것에 불과하였다.295)1948년 농민이 냈던 각종 조세 공과금과 기부금 내역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지세 및 동 부가세(同附加稅), 호별세, 가옥세, 삼종 소득세, 차량세, 농회비, 수리 조합비, 기여 협조 회비(호적 협조 회비), 성인 교육 협회비, 축산 조합비, 후생 협회비, 보경(保警) 회비, 도로 수선비(砂利代金), 부락 회비, 미곡 수집비, 구장(區長) 생활 보장비, 지서 증축비, 지서 직원 생활 보장비, 지서 신탄비(薪炭費), 경관 조위금, 소방단비, 자경대비, 야경원 야식대, 독촉 국민회비, 건청(建靑) 회비, 대청(大靑) 회관 신축비, 대청 훈련 후원비, 학교 증축비, 학교 선생 생활 보장비, 고등 여학교 찬조금, 올림픽 채표(彩票), 군사 후원회비, 후생 복표(厚生福票) 등이다(김승준, 「적산 농지 ‘양도’에 대한 비판적 고찰-전 신한공사 소관 농장 내 농촌 실태 조사에 기(基)하여-」, 『농토』 3권 3호, 조선 수리 조합 연합회, 1948. 12, 61∼62쪽 ; 김승준, 「농촌 실태 조사 보고」, 『농토』 3권 1호, 조선 수리 조합 연합회, 1948. 2, 74∼75쪽). 이처럼 30종에 넘는 각종 조세 공과금과 기부금을 감당하며 농민은 대부분 적자를 보거나 잘해야 현상 유지를 하는 영농을 할 수 있을 뿐이었다.

1948년 1월 『동아일보』에 실렸던 경기도 식량과장의 실정 보고는 미곡 수집 아래 남한 농촌 실상이 어느 정도까지 심각하게 악화되고 있었는가를 짐작케 해준다.

심한 부락에서는 공출을 내기 위하여 가축을 방매한 부락도 있었다. 이들은 서울에 나와 잡곡을 사다 공출에 낸 것인데 이 잡곡은 서울의 자유 시장에서 암시장 값으로 사다가 공정 가격으로 공출하는 모순을 빚어내고 있다. 서울 시민은 공정 가격으로 사서 야미(암거래를 나타내는 일본어(やみ-とりひき)에서 나온 속어)로 잡곡을 판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유령 인구에서 나오는 잡곡이다. 도시와 농촌에 대한 식량 정책의 모순을 지적하면 중앙청 관리들이나 도시인들은 농촌에 무엇이든지 먹을 것이 있다고 하는 데는 아연치 않을 수 없다. 가축까지 팔아 공출한 농가에 은닉한 식량이 있을 리가 없고 푸른 풀이 날 때까지는 채취할 초근목피(草根木皮)도 없지 않는가?296)『동아일보』 1948년 1월 18일자.

<표> 남조선 미곡 생산량
종별
연차
경작면적 수확고 생산고
면적(정보) 지수(%) 정(町)당 수확고(석) 지수(%) 생산량(석) 지수(%)
1933∼1936년 평균 1,226,422 118.5 11.08 83.6 13,568,539 99.0
1940∼1944년 평균 1,034,797 100.0 13.26 100.0 13,718,156 100.0
1945년 1,054,704 101.9 12.17 91.8 12,835,827 93.6
1946년 1,076,761 104.0 11.19 84.4 12,047,123 87.8
✽조선은행 조사부, 『조선 경제 통계 요람』, 1949, 28쪽.

미군정이 준 미곡 수집의 대가는 농민들의 생계에 전혀 보탬이 되지 못하였다. 당시 벼 한 가마니의 생산비는 적게 잡아도 1,000원이 넘었다. 1947년 한 연구자가 계산한 벼 한 가마니의 생산비는 1,141원이었다.297)김준보, 「수집미가의 기준론」, 『식은 조사 월보』 2권 4호, 조선식산은행 조사부, 1947. 12, 88쪽. 따라서 한 가마에 640원이라는 미곡 수집 매상 가격은 농촌을 파멸시키는 살인적인 가격으로 농민들의 생존을 압박하였다.

저가의 미곡 수집 매상 가격은 광복 직후 벌어진 공산물과 농산물의 급격한 가격차와 맞물려 농민들에게 이중의 타격을 주었다.298)김원호, 「물가 폭등과 그 대책」, 『협동』 2권 2호, 대한 금융 조합회, 1947. 4, 22쪽. 광복 직후 농산물 가격과 공산물의 가격차가 급격히 벌어졌던 까닭은 많은 공장이 파괴되 어 공산품의 공급이 농산물의 공급보다 휠씬 더 많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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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곡 수집 관련 미군정 담화문
미곡 수집 관련 미군정 담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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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 쌀값이 10배 수준으로 상승하였다면 공산물 가격은 100배 이상 오르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가령 1948년 5월 시장 물가 지수를 비교해 보면(기준 1945년 8월 하순=100) 직물이 6,446이고 비료가 3,544임에도 불구하고 곡물은 1,205밖에 되지 않았다.299)조선은행 조사부, 『1949년 경제 연감』, 1949, I-9쪽. 이런 상황에서 저가의 미곡 수집 가격은 농민에게 이중으로 경제적 타격을 가하였다. 즉, 농촌에 있어서의 쌀값이 한 말에 300원∼400원인 데도 공출 가격은 118원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농민은 공출미 1석에 대하여 사실상 3,640∼5,640원의 손해를 보게 되는 셈이다. 농민은 쌀 한 말을 팔아서 양말 한 켤레도 사기 어려운 형편에 처하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도시민의 실정이 농민보다 좋은 것도 아니었다. 높은 물가고 앞에서 이들도 생계를 제대로 꾸려갈 수 없었다. 배급미(配給米)는 값이 저렴하여 그것만으로 살아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배급량이 너무나 적었다. 미곡 수집이 원활하지 못한데 배급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도시민은 비록 높은 값을 지불하고서라도 시장미를 암시장에서 구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가격에 구애받지 않고 암시장에서 쌀을 살 수 있는 도시민은 소수에 불과하였고, 대다수 대중은 굶기를 밥 먹듯 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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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하의 쌀 배급
미군정하의 쌀 배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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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례로 1946년 3월 대구 지역 소학교 학생의 절반은 점심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였고, 아침이나 저녁을 죽으로 때우는 실정이었다. 특히 쌀 배급에 전적으로 의존해야만 하였던 귀환 동포나 빈민층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식량 배급으로 인해 아사 직전까지 내몰렸다. 식량 배급의 열악한 상황은 미군정 통치 말기까지 지속되었다. 1948년 식량 배급 실정을 살펴보면 총배급량은 1일 1인당 최고 2홉 5작이었으나 실제 받은 양은 이 수치보다 적은 양이었다. 총배급량 중에서 백미량은 1홉 내지 1홉 4∼5작에 불과하였고, 기타는 잡곡과 밀가루 국수였다. 배급을 받는 대중들은 부족한 쌀을 5되에 600원 내지 750원까지 주며 사먹었다.300)배성룡, 「미곡 수급 정책의 검토와 제의」, 『개벽』 76호, 개벽사, 1948. 1, 40쪽.

미군정 통치 기간 3년 내내 시장의 쌀값은 보통 배급미 가격의 다섯 배가 넘었다. 식량 통제 정책 실시 와중에 미군정이 수집의 원활을 기한다는 목적으로 소량의 쌀 매매와 개인적인 반입을 일체 금지하면, 암시장의 쌀값은 곧바로 앙등하였고 이는 고스란히 도시민의 부담으로 돌아갔다.

일제의 식민 지배에서 해방된 이후에도 쌀은 여전히 부족하였고, 강제 수집을 당하는 상황에서 대중은 어떻게든 쌀을 움켜쥐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 과정에서 우리나라 사람의 주식인 쌀은, 곧 ‘배고픔’을 상징하는 것이자 또한 ‘분노’를 상징하는 것이 되었다.

당시 배고픔을 해결하지 못한 대중들의 현실이 어떠했는지 알려 주는 자료는 넘쳐 난다. 우선 농촌 소설가 이무영(李無影)은 광복 이후에도 삼시 세 끼를 해결할 수 없는 농민의 현실을 소설 속에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나라님은 이 세상에서 제일 참을 수 없는 것이 뭣이라고 생각해유. 이 사람두 오십 평생에 가진 곡경을 다 치루고 살었지만서두 이 세상에서 제일 못참을께 배고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라님 같은 어른은 그런 경우를 못 당해봤겠지만 이 사람은 대대손손 일 년 동안에 반은 굶고 살아왔서유. 그러구 지금도 반은 굶구 살고 있슴니다유. 하지만 배고픈 것보다도 더 못 참을 노릇이 또 있지유. 그것 철없는 어린것들이 배가 고파 죽노라고 울어 대면서 밥을 내라는데 줄밥이 없는 경우여유. “엄마 밥! 응 엄마 밥 좀 응 배고파 엄마”301)이무영, 「나라님 전상서(소설)」, 『농토』 6호, 대산 수리 조합 연합회, 1947. 11. 10, 114쪽.

다음은 1946년 중반 대구의 식량 상황을 보여 주는 지역 신문의 취재 기사이다.

대구역원: 이제는 참말 못 살겠소. 어제 저녁과 오늘 아침을 먹지 않아 허기가 나서 일을 못하겠소.

대구부청 직원: 이제까지는 그래도 희망을 가지고 왔으나 현재로선 장래에 대한 자신이 없습니다. 쌀 한 말에 천 원이 넘으니 천오백 원 월급으로 어찌 살겠습니까?

협동 조합 직원: 곡가를 올린다고 중간 모리배를 대량 검거한다 칩시다. 그렇다고 곡가가 내릴까요? 여하튼 식량이 나돌도록 해야지 이 대로는 다 살았소.

서문 시장 상인: 통제를 하려면 철저히 하든지, 않으려면 풀어 주든지 해야지 물에 물 탄듯이 물가만 올라갈 수밖에 더 있나요.302)정영진, 『폭풍의 10월』, 한길사, 1990, 242쪽.

대구에서는 굶주림을 참지 못한 대중들이 3월, 4월, 7월, 8월, 9월, 10월 무려 다섯 차례에 걸쳐 식량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탈진 직전의 상황에 처한 이들은 절박한 심정으로 관청 앞에 모여 “배고파 못 살겠소!”, “쌀을 주오!”라고 외쳤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구에서는 초여름부터 콜레라가 창궐하였다. 보건 당국이 대응 조치로 교통을 차단하자 뒷거래되는 쌀의 반입조차 매우 힘들어져 식량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303)정영진, 앞의 책, 239쪽. 대구 지역 민심은 날로 흉흉해졌고, 시민들이 미군정 식량 책임자의 해임을 공개적으로 요구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지역 농민은 쌀 반출을 반대하며 미군과 경찰에게 돌을 던졌다. 물론 이는 대구·경북 지역에서만 일어난 상황이 아니었다. 전북 지역 신한 공사 관리 농토에서 1946년 생산된 미곡 수집이 미진하자, 미군정은 1,000여 명의 농민을 공출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검거하였고, 이 과정에서 몇 명의 농민이 당국의 발포로 피살당하였다.

다음은 1947년 2월 미군정 당국이 서신 검열을 통해 확인한 쌀 수집에 대한 전라도 지역 농민의 반응이다.

우리 군에서는 쌀 수집 계획 완수를 위하여 미군 장교와 조선인 경찰이 동원되고 있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이런 배급 방식이 일본인 치하에서의 것보다 더 혹독하다고 말한다. 나주에서는 사람을 사살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 내 아저씨와 기타 교육받은 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미군 장교에 의해 체포되었다. …… 경찰은 우리에게 만일 할당량을 내놓지 않으면 군법 회의에 의해 처벌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며칠 전에 쌀 수집 활동을 벌이고 있는 미군 병사들이 한 조선인을 사살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이 우리 관할 구역에서 그리 대단한 문제를 야기시키지는 않았다.304)「쌀 수집과 관련한 농민들의 반응」, 『농정사 관계 자료집』 제6집(미군정 정보 보고서 1947. 2. 13), 71∼72쪽.

이 인용문은 미곡 수집에 미군이 직접 참여하며 농민과 격렬한 충돌을 하였음을 보여 준다. 특히 두 번째 인용문은 조선인 경찰관이 쓴 편지로 미군의 조선인 사살에 대해 담담하게 적고 있다. 미군정이 검열한 또 다른 서신에는 미군이 농민을 사살하는 것을 보고 다수의 농민이 “미군들을 무서워하며 몸을 숨겨버렸다.”라고 적혀 있다.305)「쌀 수집에 대한 비난」, 『농정사 관계 자료집』 제6집(미군정 정보 보고서 1947. 2. 20), 71∼72쪽. 1947년 미군정 장관의 발표에 따르면 남한에서 미곡 수집에 응하지 않다가 벌금 또는 체형을 받은 사람이 8,600여 명이 넘었다.

양곡 수집이 추곡(쌀) 수집에서 하곡(보리) 수집으로 이어지며 미군정 당국과 농민들 간의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그리고 점령 당국의 이와 같은 정책과 행동은 역설적이게도 농촌에서 공산주의자의 영향력이 지속되도록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지역 공산주의자는 미곡 수집을 반대하고 부당성을 선전하는 데 앞장섰기 때문이다.306)일례로 1947년 12월 안동군 경찰의 보고에 따르면 남로당원들이 미곡 수집을 방해하기 위해 안동군 내 면장들과 경찰관을 위협하는 한편 쌀 수집에 반대하는 선전을 하였다. 이에 경찰은 10일 동안 약 170여 명의 남로당 참가자를 체포하였다(“쌀 수집 사건”, 『농정사 관계 자료집』 제6집(미군정 정보 보고서 1947. 12. 23), 114쪽). 그 결과 미군정 당국은 1947년 12월 “농민들이 공산주의자들을 애국자로, 민족주의자들을 반역자로 보기 시작하였다.”는 지역 상황을 접하기도 하였다.307)「쌀 수집 반대 항의 집회」, 『농정사 관계 자료집』 제6집(미군정 정보 보고서 1947. 12. 8), 114쪽. 이러한 보고 내용을 놓고 농촌 지역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였다고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1947년 12월이면 미군정이 농촌에 대한 통치력을 확보하고 우익들도 영향력을 상당히 강화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보고는 식량 또는 쌀의 수집 문제가 미군정 당국과 농민 간의 갈등을 폭발시키는 민감한 문제이며, 농민의 정치적 성향을 결정하는 주요한 요인이었음을 잘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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