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7권 농업과 농민, 천하대본의 길
  • 제1장 철제 농기구의 보급과 농사의 혁명
  • 1.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농경
  • 신석기시대의 농경
전덕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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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탑리 유적 출토 돌보습 도면
지탑리 유적 출토 돌보습 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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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서 농경은 신석기시대 중기부터 시작되었다. 황해도 봉산군 지탑리 2지구 2호 주거지에서 피 또는 조로 추정되는 탄화된 곡물과 아울러 돌낫, 돌보습, 갈돌 등이 발견되었다.1)도유호·황기덕, 『지탑리 원시 유적 발굴 보고』, 과학원 출판사, 1981. 이것은 대체로 기원전 3000년대2)황기덕, 『조선 원시 및 고대 사회의 기술 발전』, 과학원 출판사, 1984, 74쪽 ; 정징원, 「신석기시대의 유적과 유물」, 『한국사』 2, 국사 편찬 위원회, 1997, 375쪽. 또는 기원전 3500년 이전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어3)안승모, 「재배 작물로 본 동아시아의 신석기시대 농경」, 『동아시아의 신석기 문화』, 문화재 연구소, 1994 ; 『동아시아 선사시대의 농경과 생업』, 학연 문화사, 1998, 383쪽. 여기서 안승모는 지탑리 2지구를 기원전 3500년 이전 전기 후엽(前期後葉)으로 편년하였다. 한반도 농경의 시작을 알려 주는 자료로 평가 된다. 지탑리 2지구 2호 주거지와 같은 시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황해도 봉산군 마산리 7호 주거지,4)변사성·고영남, 「마산리 유적의 신석기시대 집자리에 대하여」, 『조선 고고 연구』 4, 사회 과학원 고고학 연구소, 1989, 17∼19쪽. 신석기시대 후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평양 남경 31호 주거지에서도 조가 출토되었다.5)김용간·석광준, 『남경 유적에 관한 연구』, 과학·백과사전 출판사, 1984. 근래에 부산 동삼동 패총 1호 주거지에서 조와 기장,6)하인수, 「동삼동 패총 1호 주거지 식물 유체」, 『한국 신석기 연구』 2, 한국 신석기 학회, 2001, 43쪽. 진양 댐 수몰 지구 내의 상촌리 B지구 및 어은 1지구, 경남 창녕 비봉리 유적에서도 조가 발견되었다.7)임상택, 「신석기시대」, 『한국 고고학 강의』, 사회 평론, 2007, 60쪽. 충북 옥천 대천리 유적에서 쌀, 보리, 밀, 조가 출토되었고,8)한창균 등, 「옥천 대천리 유적 신석기시대 집자리 발굴 성과」, 『한국 신석기 연구』 3, 한국 신석기 학회, 2002. 한강 하류에 위치한 김포와 일산의 토탄층(土炭層)에서 볍씨가 발견되었다는 보고도 있다.9)임효재, 「경기도 김포 반도의 고고학적 연구」, 『서울 대학교 박물관 연보』 2, 서울 대학교 박물관, 1990 ; 한국 선사 문화 연구소·경기도, 『일산 새도시 개발 지역 학술 조사 보고』 1, 1992 ; 손보기·신숙정·장호수, 「일산 1지역 고고학 조사」, 『일산 새도시 개발 지역 학술 조사 보고』 1, 한국 선사 문화 연구소·경기도, 1992 ; 이융조 등, 「한국 선사시대 벼농사에 관한 연구-고양 가와지 2지구를 중심으로-」, 『성곡 논총』 25, 성곡 학술 재단, 1994 ; 박태식·이융조, 「고양 가와지 1지구 출토 벼낟알들과 한국 선사시대 벼농사」, 『농업 과학 논문집』 37-2, 농업 진흥청 농사 시험 연구소, 1995. 이들 보고는 신석기시대 후기에 한반도에서 벼를 재배하였음을 알려 주는데, 현재 학계에서 쌀이나 볍씨가 출토된 층위를 신석기시대의 것으로 볼 수 있는가를 둘러싸고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10)이에 관해서는 안승모, 「한국 선사 농업 연구의 성과와 과제」, 『선사와 고대』 7, 한국 고대 학회, 1996 ; 『동아시아 선사시대의 농경과 생업』, 학연 문화사, 1998, 17∼18쪽이 참조된다. 신석기시대 후기에 벼를 재배하였을 가능성은 열어 둘 수 있지만, 그것을 확증할 만한 유적의 발굴이 더 필요한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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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배괭이(회령 출토)
곰배괭이(회령 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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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시대의 농기구는 주로 석제(石製)이고 뼈, 뿔, 이빨 등으로 만든 것도 발견되었다. 농기구는 크게 굴지 경작구(掘地耕作具)와 수확구(收穫具)로 분류할 수 있으며, 이 밖에 갈돌과 같은 도정구(搗精具)와 조리구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굴지 경작구에는 보습과 삽, 괭이, 곰배괭이 등이 있다. 돌보습과 돌삽은 신의 바닥 모양이나 유엽형(柳葉形)으로 모양이 서로 비슷하다. 대체로 길이 30∼40㎝, 너비 15∼20㎝ 정도의 소형은 돌삽으로, 길이 50∼60㎝ 정도의 대형은 돌보습으로 분류한다.11)안승모·지건길, 「한반도 선사시대 출토 곡류와 농구」, 『한국의 농경 문화』 1, 경기 대학교 박물관, 1983 ; 안승모, 『동아시아 선사시대의 농경과 생업』, 학연 문화사, 1998, 67쪽. 보습과 삽은 모두 나무 자루를 일직선으로 연결하여 밭을 갈아 흙덩이를 일으키거나 흙을 파는 데에 사용하였는데, 신석기시대에 보습을 사용한 밭갈이는 아직 소나 말 등의 가축을 활용하였다고 보기는 어렵고 인력경(人力耕) 즉 사 람의 힘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괭이는 날과 손잡이 나무자루가 ‘ㄱ’ 자 모양을 이루어서 몸 쪽으로 끌어당기며 작업하는 농기구로, 땅을 일구거나 씨앗을 심을 구멍을 파는 데에 썼다. 아울러 정지 작업(整地作業)이나 제초 작업에도 사용하였고, 야생 식물의 뿌리를 캘 때에도 널리 이용하였다. 현재까지 발견된 괭이는 대부분 석제인데, 서포항과 궁산 패총 유적에서 골제(骨制)가 출토되었다.12)고고학·민속학 연구소, 『궁산 원시 유적 발굴 보고』, 유적 발굴 보고 제2집, 1957 ; 김용간·서국태, 「서포항 원시 유적 발굴 보고」, 『고고 민속 론문집』 4, 과학·백과사전 출판사, 1972. 곰배괭이는 돌괭이와 달리 어깨가 매우 뚜렷하며 날 폭이 넓은 것이 특징이다. 사용법은 돌괭이와 달리 삽처럼 나무자루를 일직선상으로 연결하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며, 자루를 단단히 묶을 수 있어 갈이 작업에서 좀 더 강한 힘을 가할 수 있고, 날이 크고 무겁지 않아 기능 면에서 더 효율적이었다.13)안승모·지건길, 앞의 글 ; 안승모, 앞의 책, 69∼70쪽 ; 이현혜, 「한국 고대의 밭농사」, 『진단학보』 84, 진단학회, 1997 ; 『한국 고대의 생산과 교역』, 일조각, 1998, 223쪽. 곰배괭이는 신석기시대 후기에 처음으로 나타나는데, 당시에 경작 기술이 발달하였음을 반영하는 농기구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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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낫(대전 둔산 출토)
뼈낫(대전 둔산 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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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달돌칼(청원 쌍청리 출토)
반달돌칼(청원 쌍청리 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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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시대에 수확구로서 낫과 반달 돌칼이 널리 사용되었다. 대전 둔산과 궁산 패총에서 멧돼지 어금니로 만든 뼈낫이 발견되었고,14)국립 중앙 박물관, 『겨레와 함께한 쌀』, 새천년 특별전 도작 문화 3000년, 2000, 16쪽. 지탑리와 암사동 등지의 유적에서 돌낫이 여러 점 출토되었다.15)안승모·지건길, 앞의 글 ; 안승모, 앞의 책, 71∼72쪽. 낫은 주로 곡물의 이삭을 벨 때 사용한 수확구였지만, 그 밖에도 실생활에 여러 용도로 두루 사용하였다. 낫과 더불어 청동기시대까지 널리 수확구로 사용된 것이 바로 반달 돌칼이다. 웅기 서포항 5기층에서 출토된 조가비로 만든 반달 돌칼 한 점을 제외하고 현재까지 발견된 것은 모두 석제이다. 신석기시대의 곡물인 조, 기장 등은 낟알이 잘 흩어지고 익는 시기가 불규칙하여 이삭을 익는 순서대로 따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에 신석기나 청동기시대에는 대개 낫보다 반달 돌칼을 수확구로 더 선호한 것으로 보인다.16)국립 중앙 박물관, 앞의 책, 16쪽. 반달 돌칼은 보통 등 쪽에 있는 구멍에 끈을 꿰어 손에 잡고 사용하는데, 주형(舟形), 삼각형, 직사각형 등 다양한 유형이 발견되었다.17)안승모, 「한국 반월형 석도의 연구-발생과 변천을 중심으로-」, 서울 대학교 대학원 석사 학위 논문, 1985 ; 『동아시아 선사시대의 농경과 생업』, 학연 문화사, 1995. 이 밖에 수확한 곡물이나 견과류(堅果類) 등을 탈각(脫殼)하고 전분(澱粉)을 만들 때 사용한 도정구(搗精具)로는 갈판, 갈돌, 돌공이, 돌절구 등이 있지만 지금까지 신석기시대의 유적에서 주로 발견되는 것은 갈판, 갈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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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돌과 갈판(강릉 지경동 출토)
갈돌과 갈판(강릉 지경동 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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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제 농기구는 신석기시대의 유적에서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덤불이나 수풀을 불로 태워서 경작지를 확보하였을 가능성이 높았음을 염두에 둘 때 목제 농기구도 농경에 적극 활용하였으리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청나라 말기에 윈난 성(雲南省) 남노강(南怒江) 가에 거주하던 독룡족(獨龍族)은 보습, 가래 같은 농기구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오직 칼로 나무를 베고 불을 질러 수풀을 태워 경작지를 확보한 다음, 끝이 뾰족한 대나무 즉 굴봉(掘棒)을 가지고 파종할 구멍을 만들고, 거기에 점묘식(點苗式)으로 보리, 피, 기장 등의 씨앗을 파종하여 흙을 다시 덮는 방식으로 경작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농경 방식을 일반적으로 ‘도경화종(刀耕火種)’이라고 한다.18)陳文華, 『中國古代農業科技史圖譜』, 農業出版社, 1991, 3∼4쪽. 『염철론(鹽鐵論)』과 『관자(管子)』 등에 석부(石斧)로 나무를 자르고 불을 질러 파종한다는 내용이 전하는데,19)『염철론(鹽鐵論)』 통유(通有) 제3(第三). “文學曰 荊揚南有桂林之饒 內有江湖之利 左陵陽之金 右蜀漢之材 伐木而樹穀 燔萊而播粟 火耕而水耨 地廣而饒財.” ; 『관자(管子)』 규도(揆度) 제17(第十七), 至於黃帝之王 謹逃其爪牙 不利其器 燒山林 破增藪 焚沛澤 逐禽獸 實以益人 然後天下可得而牧也. 이것은 화경(火耕)을 기초로 경작한 정황을 반영하는 것이다. 대체로 한 해 또는 두 해 동안 잡곡을 재배하고, 8년 또는 10년을 경과하여 초목이 무성해져 지력이 회복된 다음에 다시 화경으로 경작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20)陳文華, 앞의 책, 4쪽 ; 이현혜, 「한국 농업 기술 발전의 제 시기」, 『한국사 시대 구분론』, 한림 과학원, 1995 ; 『한국 고대의 생산과 교역』, 일조각, 1998, 10∼14쪽에서 신석기시대의 농경을 15∼25년 휴경 후 1∼2회 경작하는 단계와 5∼10년 정도 휴한한 후 2회 이상 수확하는 단계로 구분하여 이해하였다.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삼림을 개간하여 농경지로 이용하였기 때문에 나무를 채벌하고 불에 태우는 벌목 화경(伐木火耕)이 기본이었다고 주장하여 주목된다.

화경에 기초하여 경작할 때에 석부로 나무를 베었고, 불을 지른 후 파종할 때에 주로 끝이 뾰족한 나무막대기(굴봉)나 돌괭이(또는 뼈괭이)를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비록 파종에 사용한 나무막대기가 아직 발견되지 않 았지만, 신석기시대 초기 농경에서 가장 필수적인 농기구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돌보습이나 돌삽은 비교적 단단한 토양을 경작지로 활용할 경우에 땅을 일구거나 흙덩이를 파내고 덮는 데에 적절하였고, 곰배괭이는 신석기시대 후기에 그러한 작업의 효율을 배가시키는 농기구로 개발되었을 것이다.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출토되는 곡물이 조, 기장 등에 국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농사는 잡곡 중심이었을 것이다. 화경에 기초하여 잡곡을 경작한 시기에는 휴경 기간이 비교적 길었고, 토지의 생산성도 아주 낮았기 때문에 생업 활동에서 농경보다 수렵, 채집, 어로(漁撈) 등의 비중이 여전히 높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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