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7권 농업과 농민, 천하대본의 길
  • 제1장 철제 농기구의 보급과 농사의 혁명
  • 1.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농경
  • 청동기시대의 농경
전덕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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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반달 돌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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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달 돌칼 사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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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에 들어서면 생업 활동에서 농경이 채집과 수렵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밭에서 조, 기장을 비롯하여 보리, 밀, 콩, 팥, 피 등 다양한 잡곡을 재배하고, 수전에서 벼를 본격적으로 재배한 것에서 힘입은 결과이다. 청동기시대 밭농사에서 사용한 석제 농기구는 신석기시대와 크게 차이가 없었다. 여전히 돌보습, 돌괭이, 곰배괭이 등이 청동기시대 유적에서 출토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신석기시대에 비하여 갈이 작업에 활용된 석제 농기구의 비율은 줄어든다.21)이현혜, 앞의 글, 1995 ; 앞의 책, 14쪽. 다만 반달 돌칼은 크게 늘어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앞서 말하였듯이 반달 돌칼은 동아시아에 널리 퍼진 수확구의 일종으로, 곡물 이삭을 절단하는 데에 사용하였다. 현재까지 발굴된 자료를 정리해 보면 각 지역마다 형식상에 차이가 컸고, 시기에 따라 형식이 변화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22)안승모, 앞의 글 ; 앞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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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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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에 석제 농기구를 대신하여 갈이 작업에 널리 활용된 것이 바로 목제 따비이다. 청동기시대의 유적에서 실물 목제 따비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농경문 청동기에 목제 따비로 밭을 가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고, 평북 염주군 주의리 이탄층에서 갈이 작업에 활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목제 후치가 발견되어23)사회 과학원 력사 연구소, 『조선 전사』 2, 과학·백과사전 출판사, 1979, 30쪽.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해 준다. 농경문 청동기에 보이는 따비는 중국의 뇌(耒)와 통하는 것이다. 중국에서 그것은 단치뢰(單齒耒)에서 쌍치뢰(雙齒耒)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24)陳文華, 앞의 책, 1991, 13쪽. 한반도에서도 신석기시대 말기에서 청동기시대 초기에 하나의 날을 가진 것, 즉 굴봉(掘棒) 형태의 따비로 밭을 갈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농경문 청동기에 묘사된 따비는 두 개의 날을 가진 것이다. 따비는 땅을 일구어 고랑과 이랑을 만드는 농기구인데, 농경문 청동기에서는 한 사람이 따비의 날과 자루가 만나는 부분에 연결된 횡목(橫木)을 밟으며 뒤로 가면서 땅을 일구는 작업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아울러 목제 괭이를 가지고 땅을 파거나 공그르는 모습도 새겨져 있다. 당시 갈이 작업에는 주로 목제 따비를 이용하였으며, 씨앗을 고랑이나 이랑에 점묘식으로 파종하여 흙을 덮거나 공그르는 작업에는 주로 목제 괭이를 이용하였다는 것을 알려 주는 그림이다.

청동기시대의 밭에서 재배하던 대표적 곡식은 보리, 조, 수수, 기장, 콩, 피 등이다. 함북 무산 호곡동 유적에서 조와 수수가 출토되었고, 평양 남경 유적에서 쌀과 더불어 조, 콩, 수수, 기장이 나왔다. 한편 한반도 중남부 지역인 경기도 여주시 흔암리 유적, 충남 부여군 송국리 유적, 경남 진주시 대평리 유적에서 쌀과 더불어 보리, 조, 수수, 밀 등이 출토되었다. 근래에 들어서는 청동기시대 유적에서 출토되는 잡곡의 종류도 점차 증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25)청동기시대 유적에서 출토된 잡곡의 종류에 대해서는 안승모·지건길, 「한반도 선사시대 출토 곡류와 농구」, 『한국의 농경 문화』 1, 경기 대학교 박물관, 1983 ; 안승모, 『동아시아 선사시대의 농경과 생업』, 학연 문화사, 1998, 61∼62쪽 ; 이현혜, 「한국 청동기 문화의 경제적 기반」, 『한국사 연구』 56, 한국사연구회, 1988 ; 앞의 책, 77쪽 ; 後藤直, 「무문 토기 시대의 농경과 취락」, 『한국 농경 문화의 형성』, 학연 문화사, 2002, 178쪽 참조. 청동기시대에 다양한 잡곡을 재배하였다는 사실은 신석기시대 이래 밭농사 경작 기술이 점진적으로 진전되고, 아울러 토지의 생산성이 꾸준하게 증대되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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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문 청동기의 따비
농경문 청동기의 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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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문 청동기의 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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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문 청동기의 따비
농경문 청동기의 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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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에 잡곡을 재배한 구체적인 경작 모습은 농경문 청동기와 근래에 발견된 여러 경작 유구를 통하여 살필 수 있다. 먼저 농경문 청동기에는 가지런한 고랑과 이랑이 있는 장방형의 밭이 묘사되어 있어 청동기시대에 고랑과 이랑을 조성하여 작물을 재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당시 경작 유구를 통해서도 이러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표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의 주요 경작 유구’는 청동기시대 주요 경작 유구를 정리한 것이다. 진주 대평리 유적에서는 삼국시대의 경작 유구도 함께 발견되었는데, 청동기시대의 경작 유구와 고랑과 이랑의 방향이 서로 다르다. 청동기시대에는 대체로 강의 흐름이나 등고선(等高線)과 직교하는 방향으로 고랑과 이랑을 조성하였다.26)강의 흐름이나 등고선과 직교하여 이랑과 고랑을 조성한 경작지는 옥방 2지구, 4지구, 6지구에서 발견되었다. 진안 여의곡 경작 유구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반면에 삼국시대의 경작 유구는 강의 흐름이나 등고선과 동일한 방향으로 고랑과 이랑을 조성하였다.27)어은 2지구, 옥방 6지구, 옥방 4지구, 옥방 9지구 2층에서 강의 흐름이나 등고선과 일치하는 방향으로 고랑과 이랑을 조성한 경작지가 발견되었다. 한편 어은 2지구와 옥방 4지구에서는 강의 흐름과 직교하여 고랑과 이랑을 조성한 경우도 발견된다. 두 시기의 경작 유구에 차이가 있는 까닭은 고랑의 기능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진주 대평리 유적의 삼국시대 경작 유구 가운데 일부는 이랑과 고랑이 각이 없이 파상(波狀)으로 연결되고, 고랑의 폭이 규칙적이며, 깊이도 일정하였다. 축력을 이용한 쟁기로 갈이 작업을 하였음을 보여 주는 증거이다.28)동의 대학교 박물관, 「진주 대평리 옥방 4지구 유적 발굴 조사(3차)-지도 위원회 및 현장 설명회 자료-」, 1999. 반면에 청동기시대의 경작지는 주로 석제와 목제 농기구로 이랑과 고랑을 조성하였다. 실제로 진주 대평리 옥방 2지구 경작 유구에서 목제 농기구의 굴지흔(掘地痕)이 발견되었다.29)공지현, 「진주 대평리 옥방 2·3지구 선사 유적」, 『남강 선사 문화 세미나 요지』, 1999, 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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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제 괭이를 이용한 경작 흔적
목제 괭이를 이용한 경작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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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력을 이용하면 쟁기로 밭을 깊이 갈 수 있다. 이 때문에 고랑의 골을 깊게 조성하고 두둑을 높이 쌓을 수 있다. 그러나 목제나 석제 농기구로 밭을 갈면 깊이 갈기가 어렵다.30)진주 대평리 청동기시대 경작지에 보이는 고랑의 깊이는 대략 10㎝ 내외였다. 따라서 고랑을 깊게 만들거나 두둑을 높이 쌓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름철에 집중 호우(集中豪雨)가 내리면 두둑이 허물어지는 경우가 다반사(茶飯事)였을 것이다. 결국 고랑과 이랑의 방향을 강의 흐름이나 등고선과 직교하여 만든 이유는 바로 한꺼번에 비가 많이 내릴 경우 배수를 원활하게 하여 두둑이 허물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31)경상남도·경상 대학교 박물관, 『진주 대평리 옥방 2지구 선사 유적』, 1999, 232쪽. 삼국시대에는 고랑의 골을 깊게 만들거나 두둑을 높이 쌓을 수 있었기 때문에 집중 호우가 내려도 청동기시대처럼 두둑의 훼손이 흔하게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당시에 고랑과 이랑의 방향을 반드시 강의 흐름이나 등고선과 직교하여 만들지 않았던 배경도 이와 관련이 깊은 것이다.

<표>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의 주요 경작 유구
유적 이름 규모 이랑 고랑 고랑 깊이 곡물 종류 기 타
진안 여의곡 -6고랑, 길이 4m
-56고랑, 길이 20m
  -65㎝
-35∼40㎝
  조, 피, 율무, 기장 밭고랑의 방향은 금강의 흐름이나 등고선과 직교하는 모습
논산 마전리   -구릉 사면 :
이랑 50㎝
내외
-구릉 말단
부 개석곡저(
開析谷底) :
46∼60㎝
-구릉 사면 : 30∼50㎝ 정도이고, 대략 50㎝ 내외의 폭 유지
-구릉 말단부 개
석곡저 : 40∼60㎝
구릉말단부
개석곡저 :
8㎝
  -구릉 사면 : 유구 전면에 불규칙적으로 폭 20∼60㎝의 수혈 및 소공 확인
-구릉 말단부 개석곡저 : 고랑 일곱 개 발견, 수전과 연접하여 위치. 고랑은 수전면과 직교한 형태로 조성
진주 대평리
어은 1지구
120×50m
(약 2000평)
50㎝ 35㎝ 10㎝ 조의 탄화물 고랑에서 무더기로 발견
진주 대평리
옥방 1지구
42×24m 45㎝ 40㎝ 10㎝   고랑과 이랑은 각이 없이 파상(波狀)으로 연결. 옥방 8지구 밭 북쪽 끝으로 추정
진주 대평리
옥방 2지구
남북 33×
동서 152m
28∼44㎝ 28∼40㎝ 8∼10m   목제 농기구로 경작한 굴지흔 발견
진주 대평리
옥방 4지구
남북 39×
동서 30m
60∼80㎝ 40∼50㎝     이랑과 고랑의 방향은 강과 직교되는 방향으로 조성
진주 대평리
옥방 6지구
        탄화된 보리, 수수, 조나 피로 추정되는 곡물 발견 130㎝ 간격으로 깊은 골을 파고, 그 사이에 다시 동일한 수법으로 얕게 파 작은 골을 만들어 이랑을 2분할함
진주 대평리
옥방 8지구
  40㎝ 30∼40㎝     자연 풍화에 의하여 훼손되어 두둑의 높이가 낮음
진주 대평리
옥방 9지구(3층)
남서 구간 70㎝ 90㎝ 17㎝    
북동 구간 80㎝ 45㎝ 12∼15㎝    
진주 평거동 길이 60m
이상
35∼40㎝ 35∼40㎝   15㎝ 1층과 2층 밭 조사. 전사면(경사면) 밭의 이랑 방향은 등고선과 직교, 상면과 후사면(평탄면)은 남북 방향, 동서 방향 등 다양. 고랑과 두둑 위에 작물을 심었던 흔적으로 보이는 소혈(小穴) 일부 확인
광주 신창동 이랑 길이 9.2m 40∼70㎝ 10∼25㎝   볍씨, 밀, 호밀, 보리 너비 25∼70㎝의 모래 띠로 이루어진 다섯 줄의 골이 40∼70㎝ 간격으로 구획된 모습
✽다음과 같은 논고에 기초하여 정리하였다. 전북 대학교 박물관, 「용담 댐 수몰 지구 문화 유적 발굴 조사(3차) 현장 설명회 및 지도 위원회 자료」, 2000 ; 고려 대학교 매장 문화재 연구소·한국 도로 공사, 『마전리 유적-C지구-』, 2004 ; 경상남도·남강 유적 발굴 조사단, 『남강 선사 유적』, 1998 ; 동아 대학교 박물관, 『남강 선사 문화 세미나 요지』, 1999 ; 경상남도·동아 대학교 박물관, 『남강 유역 문화 유적 발굴 도록』, 1999 ; 경상남도·경상 대학교 박물관, 『진주 대평리 옥방 2지구 선사 유적』, 1999 ; 조현종·장제근, 「광주 신창동 유적-제1차 조사 개보-」, 『고고학지』 4, 한국 고고 미술 연구소, 1992 ; 양기석, 『백제의 경제 생활』, 주류성, 2005, 129∼130쪽 ; 경남 발전 연구원 역사 문화 센터, 「진주 평거동 유적」, 진주 평거 3지구 택지 개발 사업 지구(1구역) 내 문화 유적 추가 발굴 조사 지도 위원회 및 현장 설명회 자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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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 경작 유구
청동기시대 경작 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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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청동기시대에는 고랑이 배수구로 기능하였으므로 자연히 작물의 씨앗은 이랑에다 심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진주 대평리 어은 1지구 경작 유구의 고랑에서 반달 돌칼, 돌도끼, 돌낫 등이 발견되었다.32)경상남도·남강 유적 발굴 조사단, 『남강 선사 유적』, 1998, 32쪽. 또 진주 대평리 옥방 6지구에서 130㎝ 간격으로 깊은 고랑을 파고, 그 사이에는 다시 동일한 수법으로 골을 얕게 파 작은 고랑을 만들어서 이랑을 전체적으로 2분할한 모습도 확인된다.33)동아 대학교 박물관, 「남강댐 수몰 지구 내 진주 옥방 6지구 선사 유적 추가(3차) 발굴 조사 현장 설명회 자료」, 1999. 특히 이랑의 남쪽 지점 두둑마다 발자국 흔적과 같은 타원형의 작은 수혈(竪穴)들이 규칙적으로 나타난 점이 주의를 끈다. 이랑의 작은 골에 파종하면서 남긴 흔적으로 추정되기 때문이 다. 여기서 청동기시대에 넓은 이랑 위에 작은 골을 내고, 거기에 작물을 조파(條播)한 흔적을 유추할 수 있다. 대체로 청동기시대의 밭은 대부분 이랑의 폭이 넓고 고랑의 폭이 좁은 특징을 지닌다. 고랑과 고랑 사이의 폭도 비교적 넓은 편이다. 이러한 특징은 당시에 해마다 이랑과 고랑을 교체하여 작물을 파종하지 않은 것과 관련이 있다. 이랑과 고랑의 폭이 다르고, 또 석제나 목제 농기구로 밭을 갈았으니, 해마다 이랑과 고랑을 교체하여 작물을 파종하는 방식인 대전법(代田法)을 시행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더구나 당시에는 시비(施肥) 기술이 매우 저급하였기 때문에 매번 같은 이랑에 작물을 파종하였다면, 지력의 소모가 심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까지 학계에서 청동기시대에는 장기간 휴경하고 다시 경작하는 관행이 보편적이었다고 추정한34)이현혜, 앞의 글, 1998 ; 앞의 책. 사실을 고려하면 이 견해는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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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신창동 밭 유구
광주 신창동 밭 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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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철기시대의 대표적인 경작 유구는 바로 광주 신창동 밭 유구이다. 신창동 유적은 잔구성(殘丘性) 저구릉(低丘陵)과 영산강 범람에 의하여 형성된 충적 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 구릉 지대에는 주거와 공방(工房)이 위치한 생활 공간과 아울러 생산 공간인 밭이, 구릉지 하부에는 저습지(低濕地)와 그 근처에 조성된 논이 배치된 모습이다. 밭 유구는 이 유적의 지표에 서 50㎝ 아래의 흑갈색 부식토 층에서 발견되었다. 밭의 모습은 너비 10∼25㎝가량의 모래 띠로 이루어진 다섯 줄의 골이 40∼70㎝ 간격으로 일정하게 구획된 형태이다. 현재까지 비교적 잘 남아 있는 모래 띠의 길이는 9.2m이다. 여기서 모래로 채워진 부분은 고랑으로, 그 사이는 이랑으로 추정된다.35)조현종·장제근, 「광주 신창동 유적-제1차 조사 개보-」, 『고고학지』 4, 한국 고고 미술 연구소, 1992. 신창동 유적 발굴 보고자는 밭의 이랑에 작물을 파종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36)신창동 유적 발굴 보고자는 이랑에 작물을 조파(條播)하여 재배함으로써 수해를 방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배토 및 묘의 효율적인 관리가 가능하였을 것이라고 이해하고, 이러한 점에서 이전 단계의 산파(散播)와 같은 재배 방법에 비하여 한층 진보된 경작 기술이 이때에 개발되지 않았을까 추정하였다(조현종·장제근, 앞의 글, 60∼62쪽). 한편 이현혜, 앞의 글, 1995 ; 앞의 책, 19쪽에서는 좁게 파진 고랑이 파종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였다. 사실 고랑은 통상 배수구로 기능하였고, 게다가 그것의 밑바닥은 딱딱한 생토층이다. 따라서 그곳에 작물을 파종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진주 대평리 유적 경작 유구의 사례를 참조하면, 광주 신창동 유적 밭 유구도 조파법(條播法)으로 이랑에 작물을 파종한 것으로 보인다. 신창동 유적에서 벼와 탄화미 그리고 밀, 호밀, 보리 등의 맥류(麥類)가 발견되었다.37)국립 광주 박물관, 『광주 신창동 저습지 유적』 Ⅰ, 1997, 131쪽. 밭에서 밭벼와 다양한 잡곡류를 재배하였음을 알려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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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화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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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화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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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신석기시대 말기에 벼농사가 전래되었는가의 여부를 둘러싸고 논란이 진행되고 있다. 대체로 아직까지 이때에 벼농사가 시작되었음을 입증해 주는 자료가 불충분하다고 보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청동기시대에 본격적으로 수전에다 벼를 널리 재배하였음은 여러 유적에서 수전 유구뿐만 아니라 탄화미, 볍씨가 박힌 토기 등이 발견되는 것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경기도 여주시 흔암리 유적의 12호와 14호 주거지 노지(爐址) 부근과 토기 내부에서 탄화미가 출토되었고, 이 밖에 조, 수수, 보리 등의 곡물과 더 불어 반달 돌칼, 갈돌, 괭이, 보습 등의 농기구도 함께 발견되었다.38)서울 대학교 박물관, 『흔암리 주거지』 4, 1978. 평양 남경 유적 청동기시대 주거지에서 탄화미와 더불어 조, 콩, 기장, 수수가 발견되었고,39)김용간·석광준, 앞의 글, 1984. 부여 송국리 유적의 주거지에서도 탄화미가 발견되었다.40)국립 중앙 박물관, 『송국리』 Ⅰ, 국립 박물관 조사 보고 제4집, 1981. 이 밖에 진주 대평리 유적과 부안 소산리 유적, 경북 경산 성동 유적, 경남 산청 강루리 유적에서 볍씨 자국 토기가 출토되었다.41)안승모·지건길, 앞의 글 ; 안승모, 앞의 책, 65쪽. 모두 청동기시대에 수전에서 벼를 재배하였음을 알려 주는 자료이다.

근래에 청동기시대 수전 유구가 발견되면서 당시 수전 경영의 구체적인 모습을 살필 수 있게 되었다. 현재까지 울산 야음동 유적, 울산 굴화 유적, 울산 무거동 옥현 유적, 울산 발리 유적, 울산 천상리 유적, 논산 마전리 유적, 부여 구봉리 유적, 보령 관창리 유적, 진해 자은동 유적, 대구 칠곡 3-3 구역, 밀양 금천리 유적에서 청동기시대의 수전 유구가 발견되었다.42)곽종철·이진주, 「우리나라의 논 유구 집성」, 『한국의 농경 문화』 6, 경기 대학교 박물관, 2003 ; 곽종철, 「우리나라 선사∼고대 논밭 유구」, 『한국 농경 문화의 형성』, 학연 문화사, 2002. 대체로 청동기시대에는 소하천이나 계곡의 물을 막는 보(洑)와 같은 간단한 관개 시설을 설치하여 물을 공급할 수 있는 곡지(谷地)에다 방형(方形) 또는 부정형(不定形)의 소구획 수전을 조성하는 경향이 있었다.43)김도헌, 「선사·고대 논의 관개 시설에 대한 검토」, 『호남 고고학보』 18, 호남 고고학회, 2003. 여러 유적 가운데 대규모 수전 유구가 발견된 곳이 울산 무거동 옥현 유적과 논산 마전리 유적이다.

먼저 울산 무거동 옥현 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 삼국시대, 조선시대의 수전 유구가 발견되었는데,44)경남 대학교 박물관·밀양 대학교 박물관, 「울산 무거동 옥현 유적」, 1999. 이곳에 있는 논은 동서로 길게 연결된 해발 35m 내외의 평탄한 구릉과 구릉 사이의 좁은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소하천에 설치한 보와 같은 시설에서 작은 수로를 통하여 관개하였다. 청동기시대부터 삼국시대 초기까지 사용된 수로는 골짜기의 경계부, 즉 논의 북단에 설치된 것으로 길이 45m, 최대 폭 2.6m, 깊이 85㎝ 전후이다. 이 수로는 수전을 개설한 청동기시대에 만들었고, 이후 일시적으로 방치되기도 하였으나 여러 차례 개수되어 삼국시대 일정한 시기까지 계속 사용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한편 현재 발견된 삼국시대와 조선시대 논은 이 수로가 폐기된 이후에 새로운 수로를 통하여 관개하였는데, 삼국시대의 수로는 발견 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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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 수전 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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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와 조선시대의 수전은 서북에서 동남 방향으로 낮아지는 골짜기 내의 미지형 경사(微地形傾斜)를 따라 계단상으로 배치되었다. 삼국시대의 것은 조선시대의 논에 비하여 논둑의 폭이 매우 조밀하며, 단위 면적이 105∼145㎡ 정도인 규모이다. 반면에 청동기시대의 수전은 지형의 경사가 상대적으로 완만한 곡의 중심부 쪽에 조성되었고, 모양은 방형, 장방형(長方形), 부정형 등으로 다양하며, 논둑에 의하여 구획된 수전의 단위 면적은 약 3∼10㎡ 정도였다. 삼국시대의 논은 지형의 경사를 활용하여 수전을 계단상으로 구획하여 배수가 비교적 용이하였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청동기시대에는 배후 습지 환경과 비교적 근접한 거리에 위치한 탓에 배수가 그리 원활하게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렵다. 발굴 과정에서 이곳의 배수가 매우 불량하였음이 확인되었다. 발굴 보고자는 수전 아래층에서의 산화철, 망간 분리 집적, 환원층까지의 깊이 등을 고려하여 반건답, 반습답, 습답으로 분류하였다.

1999년에 충남 논산 마전리에서도 청동기시대의 수전 유구가 발견되 었다.45)고려 대학교 매장 문화재 연구소·한국 도로 공사, 『마전리 유적-C 지구-』, 2004. 논은 마을의 노루목 근처 저지대 평탄면에 위치하였고, 구릉의 골짜기에서 자연적으로 흘러내리는 물을 막아서 관개하였다. 발굴 과정에서 막아 두었던 웅덩이에서 다시 인공으로 수로를 파서 논에 물을 대는 시설이 조사되었고, 또 저지대 평탄면에서는 둑으로 구획된 수전과 그 사이를 흐르던 소형의 수로들이 확인되었다. 지형이 경사진 곳에서는 수전을 계단식으로 조성하였고, 경사가 급하지 않은 곳에서는 수전 사이의 작은 구(溝)를 경계로 둑을 설치하여 구획하였다. 여기에서 조사된 수전 면은 15개의 소구획이다. 경사도가 거의 없는 구릉 사면(斜面)의 말단부로 내려가면서 규모가 더 커지는 양상을 보이는데, 한 변의 길이가 작은 것은 9∼15m, 큰 것은 17∼23m 정도이다. 한편 제14, 15논에 걸쳐 논둑 방향과 직교하여 밭고랑이 존재하였는데, 이것은 논과 밭의 경지가 전환 이용되었음을 유추하게 해 주는 것으로 주목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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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 수전 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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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부여군 구룡면 구봉리 유적에서도 청동기에서 백제시대에 이르는 수전이 발견되었다. 구봉리 유적의 제1 경작면에서 청동기시대의 수전이 발견되었는데, 수전은 가로 세로 3×4m로 소구획이며, 북측에서 남측으로 갈수록 낮아지는 형태를 띠고 있다. 수전 면 내에서 수로, 둑, 발자국 등이 확인되었고, 수원(水源)은 북쪽 구릉의 계곡부에 존재하였다. 거기에서 안정적으로 물을 공급받기 위하여 관개 수로를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이 경작면 아래에서 환상 집수 유구(環狀集水遺構)가 확인되었는데, 이것은 청동기시대 초기에 지하수를 활용하여 수전에 물을 관개할 때, 물을 담아 두고 온도를 높이는 기능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제2 경작면에서 발견된 수전은 대략 3세기 말∼4세기 전반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한 구획 수전의 규모는 대략 8×6m 정도이다. 관개 방법은 청동기시대와 비슷하였으며, 수전 면 내에서 수로, 족적(사람, 동물), 도구흔, 고랑과 이랑 등이 확인되었다.46)충남 대학교 백제 연구소, 「구룡-부여 간 도로 확장 및 포장 구간 내 문화 유적 발굴 조사 약보고서」, 2001.

현재까지 발견된 청동기시대 수전은 대부분 소구획이다. 수전을 경영하려면 수심을 고르게 하여 일정한 수온을 유지하고, 벼의 생육 조건을 같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때문에 경사지에 위치한 곡지(谷地)의 수전은 구획을 작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한편, 청동기시대 수전의 관개는 일반적으로 계곡이나 하천을 보와 같은 시설로 막아 하였다. 예를 들어, 보령 관청리 유적에서는 물길을 가로지르는 방향으로 말목을 박고 횡 방향으로 나무를 덧대어 만든 보 시설과 함께 수로와 논의 경계에서 물꼬가 확인되었다.47)이흥종·강원표, 『관창리 유적-B·G구역-』, 고려 대학교 매장 문화재 연구소 연구 총서 제7집, 2001. 더구나 최근에 안동 저전리에서 청동기시대의 저수지와 수로가 발견되어 주목을 끌었다. 야트막한 구릉 사이의 곡간 지대 퇴적층을 파고 만든 유구인데, 바닥 면에서 상당량의 지하수가 용출되는 지형 조건이다. 저수지는 두 차례에 걸쳐 조성되었다. 2차 저수지는 1차 저수지가 폐기된 이후에 그것의 가장자리에 근접하여 수로를 팠고, 그것보다 20여m 상부에 저수 공간을 새로 만든 것이다. 저수지의 출수구에서 수전에 이르는 수로에서 그것을 지속적으로 관리하였 음을 입증해 주는 흔적이 발견되었다.48)이한상, 「청동기시대 관개 시설과 안동 저전리 유적」, 『한·중·일의 고대 수리 시설 비교 연구』, 계명 대학교 출판부, 2007. 이러한 측면에서 안동 저전리 저수지는 청동기시대에 상당 기간 안정적으로 수전에다 물을 관개하여 벼를 재배하였음을 알려 주는 유적으로 주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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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 저수지
청동기시대 저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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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은 밭보다 생산성이 높았다. 또 보와 같은 관개 시설을 만들 때에 대규모 인원이 동원되었고, 벼의 파종에서 수확까지 노동력을 지속적으로 투입하여야 했다. 따라서 벼농사를 본격적으로 짓기 시작하면서 정주성(定住性)뿐 아니라 농경 활동에서 읍락(邑落) 주민 상호 간의 결속력이 한층 더 강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생산성의 증대로 말미암아 부족 또는 읍락 사이에 약탈 전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 결과 청동기시대의 취락 주위에 목책(木柵)이나 환호(環壕)와 같은 방어 시설을 함께 설치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방어 시설의 존재는 청동기시대에 사람들이 일정한 지역에 정주하여 농경 중심의 생활을 영위한 당시 사회상의 일면을 보여 주는 측면으로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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