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7권 농업과 농민, 천하대본의 길
  • 제1장 철제 농기구의 보급과 농사의 혁명
  • 2. 삼국시대의 밭농사
  • 삼국시대 중·후반기 밭농사 체계
전덕재

1990년대 이래 삼국시대 중·후반기 및 통일 신라의 밭 유구가 다수 조사되었다. 최근까지 조사된 것을 정리한 것이 표 ‘삼국 및 통일 신라의 밭 유구’이다.

<표> 삼국 및 통일 신라의 밭 유구
유적 이름 규모 이랑 고랑 고랑 깊이 곡물 종류 기 타
화성 석우리
먹실
밭 유구 다섯
개소
  -고랑 사이의
간격 20㎝ 내

-고랑 사이의
간격 30㎝인
경우 일부 발견
5.5∼6㎝ 벼의 규
산체, 보
리, 기장
-구릉 말단부에 위치, 고랑과
이랑의 폭이 좁고 간격이 조
밀하며 방향을 달리하여 중복
된 양상을 보임
-동일 시기의 밭으로 보기 어
려움
의정부 민락동   이랑 너비
70∼80㎝
고랑 너비
50㎝
  수수 곡저에 위치
부여 구룡면
구봉리
B 지구 :
면적 50㎡,
고랑과 이랑의
길이 15m
  A지구 :
50㎝ 내외
이랑 깊이 :
10∼20㎝
  -A지구 : 이랑 내에서 직경
15㎝ 내외의 소형 수혈 관찰
-B지구 : 이랑과 고랑의 간격
일정한 편임
서천 송내리 길이 23.5m,
너비 3.20m
  상층 :
10∼25㎝
하층 :
14∼36㎝
상층 : 13㎝
하층 : 18㎝
  -이랑 방향은 등고선과 평행
-구릉 사면에 위치한 4세기
의 유적
국도 4호선
부여-논산 간
도로 확·포장
공사 구간
(부여 나성)
  제1 경작 유구
: 53∼68㎝
제2 경작 유구
: 43∼65㎝
제3 경작 유구
: 48∼60㎝
제1 경작 유구
: 50∼62㎝
제2 경작 유구
: 27∼52㎝
제1 경작 유구
: 7∼12㎝
제2 경작 유구
: 8㎝
제3 경작 유구
: 이랑 깊이
14㎝
  구릉 사이의 곡간 충적지
경기도 하남시
미사리 상층
동서 60×
남북 160m
70∼75㎝ 25㎝ 25∼30㎝   이랑과 고랑은 남북 방향으로
조성
경기도 하남시
미사리 하층
남북 110×
동서 50m
70∼80㎝ 70∼80㎝     고랑의 바닥 안쪽에 약 30㎝
간격으로 지름 20㎝가량의
구멍을 지그재그로 배치
광주 광역시
동림동
구(溝)의 길이
30m 이상
  구의 폭
10∼20㎝
구의 최대 깊이
15㎝
  단면 형태는 대부분 U자형에
가까우나 일부 수직으로 굴착
된 예와 V자형에 가깝게 좁아
드는 사례 발견
진주 대평리
어은 2지구
117×40m 30∼40㎝ 40∼60㎝      
진주 대평리
옥방 4지구
73×55m
(약 800평)
23∼60㎝ 24∼80㎝      
진주
대 평 리
옥방
3지구
1호 1600여 평
이상
40∼80㎝,
40∼60㎝
30∼70㎝,
40∼100㎝
  고랑 일부 W형 기경흔
2호 200평 이상 40∼80㎝,
40∼60㎝
30∼70㎝,
40∼100㎝
    고랑 일부 W형 기경흔
3호 15평 이상 40∼80㎝ 40∼60㎝     고랑 일부 W형 기경흔
4호 60평 이상 50∼70㎝ 50∼80㎝      
5호 30평 이상
40평 이상
40∼60㎝,
50∼90㎝
30∼50㎝,
20∼40㎝
   
진주 대평리
옥방 6지구
약 1000여 평 50∼60㎝ 50∼60㎝   보리, 벼,
수수, 피
 
진주 대평리
옥방 9지구
Ⅰ층 :
34×56m 이상
Ⅱ층 :
20×36m,
16×3m 이상
Ⅰ층 :
40∼50㎝,
60∼70㎝
Ⅱ층 :
40∼60㎝(동
서 방향),
60∼70㎝(남
북 방향)
Ⅰ층 :
50∼60㎝,
30∼40㎝
Ⅱ층 :
40∼50㎝(동
서 방향),
40∼45㎝(남
북 방향)
Ⅰ층 :
10∼13㎝
Ⅱ층 :
5∼10㎝(동서
방향),
10∼13㎝(남
북 방향)
Ⅱ층 : 벼
, 조, 기장
, 팥
 
대구 서변동 27×10.5m   20∼50㎝     -고랑 사이에 폭 20㎝, 깊이
10∼15㎝의 구 존재
-삼국 초기의 유적
창원 반계동   11층 밭 :
28∼51㎝
12층 밭 :
8∼15㎝
11층 밭 :
18∼20㎝
12층 밭 :
8∼10㎝
  식물규산
체 : 벼,
삼, 기장
-두둑, 고랑에 파종흔, 등고
선과 직교
-논밭 전환 가능성
김해 봉황동 16×9m
이상
40∼70㎝ 35∼60㎝   식물규산
체 : 벼,
피, 맥류
논밭 전환 가능성
울산 어음리 72×12m
이상
  20㎝,
14∼16㎝
     
대구 동천동   40∼60㎝ 60∼80㎝,
40∼60㎝
    청동기시대의 밭도 함께 발
대구 진천동 34×10m
이상
30㎝ 22㎝     청동기시대와 고려시대 사
이의 경작 유구
경산 임당동   15∼20㎝       삼국·통일 신라(6∼8세기)의
경작 유구
산청 묵곡리 68×40m
이상
50∼80㎝? 40∼50㎝?      
진주
평거동
Ⅰ지구 이랑 길이
65m 이상
45∼55㎝ 45∼50㎝     -밭은 미고지에 분포하며 폭 70∼90㎝의 둑을 경계로 삼국시대 논과 남북으로 경계
를 이룸
-밭은 중간에 위치한 남북 방
향의 구(폭 2m)에 의하여 두 개
의 단위로 구분
-고랑 내부에 작물을 재배한
흔적으로 추정되는 소혈과 경
작구흔 발견
Ⅱ지구   상면과 후사면
밭 : 35∼60㎝
전사면 밭 :
50㎝
상면과 후사면
밭 : 30∼60㎝
전사면 밭 :
50㎝
상면과 후사면
밭 : 5∼20㎝
전사면 밭 :
20㎝
  -전사면 밭은 하층 밭의 두둑
을 파서 원래 하층 밭의 고랑
자리에 퇴적된 모래와 함께
두둑을 만들어서 연작(連作)의
흔적을 보여 줌
-밭의 경작 시기는 6∼7세기
경주 금장리 16,853㎡
(약 5,098평)
40∼60㎝,
70∼110㎝
20∼35㎝,
30∼60㎝
4∼22㎝ 겉보리,
쌀, 팥, 콩
, 밀
밭 유구는 크게 Ⅰ∼Ⅲ기로
구분되며, Ⅰ기는 5∼6세기
초, Ⅱ기는 6세기 전반∼후반,
Ⅲ기는 6세기 후반∼8세기경
으로 추정
원주 학성동 200㎡ 정도 20∼30㎝ 50∼70㎝     7∼8세기의 경작 유구로 추정
✽다음과 같은 논고를 참조하여 작성하였다. 김병섭, 「한국의 고대 밭 유구에 대한 검토」, 『고문화』 62, 한국 대학 박물관 협회, 2003, 5∼7쪽 ; 기전 문화재 연구원·한국 토지 공사, 「화성 동탄 지구 내 석우리 먹실 유적 발굴 조사」, 현장 설명회 자료 18, 2004 ; 충남 대학교 백제 연구소, 「구룡-부여 간 도로 확장 및 포장 구간 내 문화 유적 발굴 조사 약보고서」, 2001 ; 서울 대학교 박물관, 『미사리』 4, 1994 ; 호남 문화재 연구원, 「광주 동림리 유적」, 3차 지도 위원회 및 현장 설명회 자료, 2005 ; 경남 발전 연구원 역사 문화 센터, 「진주 평거동 유적」, 진주 평거 3지구 택지 개발 사업 지구(1구역) 내 문화 유적 추가 발굴 조사 지도 위원회 및 현장 설명회 자료, 2007 ; 성림 문화재 연구원, 『경주 금장리 유적』, 2006 ; 연합뉴스, 「강원 지역 통일신라시대 경작 유구 첫 발굴」, 2005년 3월 17일자.

청동기시대 밭 유구의 이랑과 고랑은 울퉁불퉁하고 굽었으며 정연하지 않은 모습이고, 고랑의 깊이는 비교적 얕은 편이었다. 반면에 삼국시대 밭 유구의 이랑과 고랑은 비교적 직선으로 이루어졌으며, 평면 형태는 완만한 S자형의 정연한 파상 모습이고, 고랑은 깊고 일정한 편이었다. 이것은 삼국시대 기경 기술(起耕技術)의 발달에 힘입은 결과였다. 특히 축력을 이용한 쟁기로 밭갈이를 하면서 나타난 현상과 관련이 밀접하다. 진주 대평리와 평거동, 하남시 미사리 유적에서 대규모 밭 유구가 조사되었고, 나머지는 규모가 작거나 잔존 상태가 불량한 편이다. 진주 평거동 유적의 밭 유구는 아직까지 전면적인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전모를 파악하기 곤란하고, 진주 대평리 유적 삼국시대 밭 유구는 시기에 따른 밭농사 체계를 살필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정보를 주지 못한다. 이와 달리 하남시 미사리 유적의 밭 유구는 규모도 비교적 크고 잔존 상태도 양호할 뿐만 아니라 시기가 다른 상층과 하층의 밭이 함께 발견되어 시차에 따른 작무법(作畝法)의 변화를 살피는 데에 적합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1992년에 미사리 유적을 대대적으로 발굴한 결과, 대규모 취락지와 아울러 상층과 하층의 밭 유구가 발견되었다. 상층의 밭 유구에 남북 방향으로 고랑과 이랑을 만들었는데, 현재 남아 있는 이랑의 폭은 70∼75㎝, 고랑의 폭은 25㎝ 정도이고, 그 폭은 비교적 일정한 편이다. 고랑의 깊이는 25∼30㎝ 정도이다.81)서울 대학교 박물관, 『미사리』 4, 1994, 208쪽. 여기서는 단지 이랑과 고랑을 합한 폭이 100㎝였다고 기술하였다. 한편 숭실 대학교 박물관, 『미사리』 3, 1994, 358∼359쪽에서 이랑의 폭은 70∼75㎝, 고랑의 폭은 25∼27㎝ 정도이고, 양자를 합한 폭은 1m 남짓 된다고 하였다. 현재까지 확인된 상층 밭 유구의 범위는 동서로 60m, 남북으로 160m이며, 중간에서 끊어지거나 별도의 밭으로 구획된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을 면적으로 계산하면 약 9,900㎡가 된다. 보고자는 이 밭의 사용 시기를 밭고랑 사이에서 출토되는 유물을 근거로 대략 6세기경으로 추정하였다.82)서울 대학교 박물관, 앞의 책, 208쪽과 258∼259쪽.

하층 밭 유구는 상층보다 약 20∼30㎝가량 아래층에서 발견되었는데, 현재 남아 있는 전체 범위는 남북 110m, 동서 50m가량이며, 이를 면적으로 계산하면 약 5,610㎡가 된다. 이 경작 유구의 고랑과 이랑은 동서 방향인 섬 안쪽으로 계속되고, 전체가 하나의 직선을 이루는데, 고랑과 이랑은 각각 70∼80㎝ 정도이고, 합한 폭은 150㎝ 정도이다. 고랑의 깊이는 현재 15㎝가량이다. 보고자는 이 밭의 사용 시기를 늦어도 4∼5세기경 또는 그 이전으로 추정하였다.83)서울 대학교 박물관, 앞의 책, 209∼214쪽, 258∼259쪽. 한편 숭실 대학교 박물관에서 편찬한 보고서에서는 하층 경작 유구는 4세기 초, 상층 경작 유구는 5세기 전반경에 사용된 것으로 기술하였다(숭실 대학교 박물관, 앞의 책, 396∼3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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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층 경작 유구는 남북 방향으로 160m에 이르는 고랑과 이랑을 만들고, 또 고랑의 깊이도 30㎝ 내외인 점으로 미루어 보아 축력을 이용하여 밭갈이를 한 것으로 보인다.84)김기흥, 「미사리 삼국 시기 밭 유구의 농업」, 『역사학보』 146, 역사학회, 1995, 33∼34쪽. 하층 유구는 비교적 짧은 방향으로 이랑과 고랑을 만들고, 고랑 깊이가 겨우 15㎝ 내외에 불과하므로 축력을 이용하여 밭갈이를 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고대 중국에서 한대 대전법 실시 이전에 뇌사(耒耜)로 고랑과 이랑을 만들었음을 고려하면,85)최덕경, 「제철 농구(製鐵農具) 출현 후의 토지 이용법 변화」, 『중국 고대 농업사 연구』, 백산 서당, 1994, 221∼222쪽. U자형 따비로 갈이 작업을 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U자형 따비로 밭을 갈다가 우경으로 밭을 갈게 되면서 농법은 크게 발달하였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중국의 사례가 참조된다.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비교적 넓은 이랑과 고랑을 만들고 이랑에다 작물을 산파(散播)하여 경작하다가 한대 대전법 단계에 1척(23㎝ 내외)의 고랑과 두둑(이랑)을 만들고 고랑에 작물을 조파(條播)하여 경작하는 것으로 발전하였다.

이런 변화는 작물의 파종처, 즉 경작면의 확대와 직결되었을 뿐만 아니 라 갈이 도구의 개량과 관계되었다. 전국 말기 『여씨춘추(呂氏春秋)』 단계까지 주로 뇌, 사(耜) 등의 철제 수농구(鐵製手農具)를 가지고 밭갈이를 하다가 한대에 우경으로 밭갈이를 하게 되면서 고랑과 이랑을 해마다 교대로 번갈아 경작하는 대전(代田)이 가능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한대 조과(趙過)의 대전법은 해마다 교대로 농(壟, 이랑)과 견(甽, 고랑)을 바꾸어 파종하는 상경 농법(常耕農法)으로 연결됨으로써86)中國農業科學院·南京農學院 中國農業遺産硏究室, 『中國農學史』(上冊), 科學出版社, 1959, 151∼153쪽 ; 西山武一, 「齊民要術の農學」 『アジア的農法と農業社會』, 東京大學出版會, 1969, 61∼63쪽. 무간(畝間)의 휴한지(休閑地)인 견(甽) 또는 배수구나 도로의 폭이 줄어들어 파종처를 극대화시킨 데서 나아가 땅을 놀리지 않고 해마다 경작할 수 있는 상경 농법을 확립시켰다는 점에서 농업 기술의 획기적 진전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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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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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의 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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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력을 이용한 대전법 단계에서 상경 농법이 확립된 사실은 6세기경 미사리 상층 경작 유구의 농법 수준을 추정하는 데 많은 참고가 되고 있다. 『농사직설(農事直說)』의 내용을 통하여 조선 전기에 2∼3척(尺)의 넓은 이랑과 1척 이상의 고랑을 만들고 조, 기장, 수수 등을 이랑에 파종하였음을 알 수 있다.87)민성기, 「동아시아 고농법상(古農法上)의 누려고(耬犁考)-중국과 조선의 경종법(耕種法) 비교-」, 『성곡 논총』 10, 성곡 학술 재단, 1979 ; 『조선 농업사 연구』, 일조각, 1988, 29쪽. 서유구(徐有榘)는 『행포지(杏浦志)』에서 조선 후기에 1농(壟)·1견(畎)의 폭이 중국의 3농·3견(당척(唐尺) 5척)에 해당한다고 하여서 고랑과 이랑의 넓이가 대략 2∼3척이 되었다고 본 바 있다(민성기, 앞의 글, 32∼34쪽). 미사리 상층 경작 유구도 너비 50㎝ 이상의 이랑을 만들고 거기에 작물을 파종하였다고 추정된다는 점에서88)상층 경작 유구에서 고랑과 이랑 어느 곳에서도 작물을 파종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한강의 범람으로 삭평(削平)되지 않고 토사(土砂)만 쌓인 고랑에서 작물을 파종한 흔적이 발견되지 않으므로 이랑이 파종처였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시대의 작무법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고랑의 골 깊이가 30㎝에 가까운 점이 주목을 끄는데, 당시에 깊이갈이가 가능해져 지력의 회복 기간이 상당히 단축되었음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미사리 상층 경작 유구는 한대 대전법 단계의 작무법과 비교되는데, 파종처가 이랑과 고랑이라는 차이가 있고, 또 이랑의 폭이 대전법 단계 중국보다 더 넓다. 그러나 고랑 골의 깊이가 거의 비슷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미사리 상층 경작 유구도 해마다 교대로 고랑과 이랑을 바꾸어 파종하는 방식, 즉 대전이 가능한 초보적인 상경전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89)그러나 당시 백제의 모든 밭들이 미사리 상층 경작 유구처럼 상경전이라고 단정하기는 곤란하다. 상경은 미사리와 같이 토질이 비옥한 충적사질토이고 축력을 사용하여 갈이작업을 할 수 있는 곳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에 발굴 조사된 진주 평거동 삼국시대 밭 유구에서 연작(連作)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평거동 Ⅱ지구 전사면(前斜面)에 위치한 삼국시대 밭은 등고선과 나란한 방향으로 이랑이 정연하게 조성되었다. 이랑과 고랑의 폭은 50㎝로 서로 비슷하고, 고랑의 깊이는 20㎝ 내외로 일정한 편이다. 또 단면 형태는 상면이 볼록하고 고랑은 비교적 편평한 편이다. 이와 같은 고랑과 이랑의 모습은 축력을 이용한 쟁기로 밭갈이를 하였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전사면의 상층 밭은 하층 밭의 두둑을 파서 원래 하층 밭의 고랑 자리에 퇴적된 모래와 함께 두둑을 만들었는데, 발굴 조사자는 이것을 매년 고랑과 이랑을 교대로 바꾸어 조성하여 작물을 연작하였음을 보여 주는 증거로 이해하였다.90)경남 발전 연구원 역사 문화 센터, 「진주 평거동 유적」, 진주 평거 3지구 택지 개발 사업 지구(1구역) 내 문화 유적 추가 발굴 조사 지도 위원회 및 현장 설명회 자료, 2007, 17∼18쪽. 화성 석우리 먹실 유적에서 발견된 밭 유구도 이랑의 폭이 비교적 좁은 편이어서 미사리 유적 상층 밭 유구와 유사한 단계의 농법 수준일 가능성이 높다.91)기전 문화재 연구원·한국 토지 공사, 「화성 동탄 지구 내 석우리 먹실 유적 발굴 조사」, 현장 설명회 자료 18, 2004. 휴한 농법의 극복, 즉 상경 농법의 개발로 토지 이용의 효율성이 높아졌을 것이다.

하층 경작 유구도 넓은 이랑과 고랑을 해마다 번갈아 교대로 대전하는 단계의 경작지였다고 볼 수도 있다.92)이현혜, 앞의 글, 1995 ; 앞의 책, 21∼23쪽. 또 한 가지 가능성은 밭 전체를 한두 해 동안 휴경한 다음에 다시 경작하였을 경우이다. 기존에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에는 장기간 휴경하고 다시 경작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가 4세기 이후 신라와 백제에서 1∼2년 동안 규칙적으로 휴경하는 휴한 농법이 성립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었다.93)이현혜, 앞의 글, 1995 ; 앞의 책, 12∼26쪽. 고랑의 깊이가 10㎝ 내외로 얕았고, 게다가 산림을 불태워 밭을 개간하는 방식이 보편화된 단계인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에 장기간 밭을 휴경하다가 다시 경작하였을 것이라는 견해는 경청할 가치가 있다. 이에 따른다면, 한두 해를 주기로 밭을 경작하는 농법은 초기철기시대 이후에 가서야 개발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미사리 하층 경작 유구는 신창동과 대평리(청동기시대) 일대의 밭 유구에 비하여 고랑과 이랑의 폭을 비교적 일정하게 만든 점, 고랑의 골이 15㎝ 내외인 점에서 차이가 난다. 이것은 철제의 U자형 따비로 밭갈이를 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갈이 도구의 개선 결과 농법의 발달이 예상된다. 우경이 보급된 6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초보적인 상경이 가능하였으므로 하층 경작 유구는 그것보다 더 미숙한 수준의 농법 단계였을 것이다. 6세기 중엽의 고대 일본 쿠로이이네(黑井峯) 유적, 오다테바바(大館馬場) 유적에서 발견된 밭 유구는 일부 경지를 휴경하면서 경작한 모습이 이와 관련하여 참조된다.94)能登健, 「畑作農耕」, 『古墳時代の硏究』 4(生産と流通Ⅰ), 雄山閣, 1991, 93∼94쪽. 하남 미사리 유적 하층의 밭 유구 역시 휴경 농법으로 농사를 지었던 고대 일본의 밭 유구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6세기의 삼국시대와 조선시대에는 이랑에 작물을 파종하였다. 여름철의 집중 호우 때 배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렇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미사리 하층 경작 유구는 이랑에다 파종하지 않고 고랑에 파종하였다.95)하층 유구의 고랑 바닥 안쪽에 약 30㎝ 간격으로 지름 20㎝가량의 구멍이 지그재그로 배치되어 있다. 이것은 곡식을 고랑에 심었음을 알려주는 증거로 보인다. 그 이유는 먼저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보다 고랑의 골을 더 깊게 만들 수 있어서 더 효과적인 작물 재배를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또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에는 목제 따비나 괭이로 밭을 갈아서 깊이갈이가 어려웠으나 4∼5세기경에는 철제 U자형 따비, 삽, 괭이 따위로 갈이 작업을 수행하였으므로 이전보다 밭을 더 깊이 가는 것이 가능하였을 것이다. 미사리 하층 경작 유구의 고랑 깊이가 15㎝ 이상인 점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골이 깊은 고랑에 파종할 때, 어린 묘(苗)가 건조한 바람을 직접 피할 수 있어 묘 잎의 수분 증발을 줄일 수 있고, 또 동시에 고랑 바닥에 바람이 미치지 못하여 어린 묘가 충분한 수분을 흡수하여 튼튼하게 발육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랑의 흙을 고랑에서 자라는 묘의 뿌리 근처까지 두텁게 배토하여 줌으로써 보습 효과가 크게 증대되고, 나아가 묘가 쓰러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는 이점도 있다.96)國農業科學院·南京農學院 中國農業遺産硏究室, 앞의 책, 153쪽. 특히 건조한 지대에서는 옛날부터 고랑에 파종하는 것이 관례였다.97)『여씨춘추(呂氏春秋)』 임지편(任地篇)에 ‘上田棄畝 下田棄甽)’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상전(上田)은 고한전(高旱田)을, 하전(下田)은 습전(濕田)을 가리키는 표현이다(최덕경, 앞의 글, 1994, 212∼213쪽). 한강 유역이 건조한 지대라고 할 수는 없지만, 봄 가뭄에 백제 사람들이 수분 증발을 막으려고 작물을 고랑에 파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전적으로 이런 이유만으로 4∼5세기에 백제 사람들이 고랑에 파종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작물의 종류에 따라 파종법이 다양하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조선 전기에 보리는 이랑에 파종한 잡곡류와 달리 일찍부터 고랑에 파종하였다. 그러나 미사리 하층 경작 유구에 심은 곡식을 보리로 보기는 곤란하다. 왜냐하면 비교적 좁은 폭의 이랑과 고랑을 짓고, 고랑에 파종하였기 때문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여러 밭작물의 습성을 충분히 숙지할 필요가 있다. 기장과 조는 가는 모래나 검은흙이 반반인 토성이 건조한 데에서 잘 자라고 습한 데는 부적당하다고 한다.98)『농사직설(農事直說)』 종서속(種黍粟). 擇良田 細沙黑土相半者爲良 黍粟性宜高燥 不宜下濕. 미사리 지역은 여름철에 집중 호우가 내리는 곳이므로 물이 고랑에 자주 고였을 것이다. 건조한 곳에서 잘 자라는 기장, 조를 여기에 파종하였을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밭벼는 높은 지대나 수온이 낮은 곳이 적당하고, 너무 건조하면 좋은 수확을 기대하기 어렵다.99)『농사직설』 종도(種稻). 種稻甚多 大抵皆同 別有一種曰旱稻 鄕名山稻 徧宜於高地及水冷處 然土大燥則不成. 수수나 피는 낮고 습한 곳이 좋고 메마른 곳에서는 잘 자라지 않는다.100)『농사직설』 종서속. 蜀黍 鄕名唐黍 宜下濕 不宜高燥 ; 『농사직설』 종직(種稷). 稷性宜下濕之地. 이 밖에 콩이나 팥은 아무 토양이나 잘 자라는 속성을 지닌 잡곡류이다. 여러 작물의 습성을 고려하면, 하층 경작 유구의 고랑에는 밭벼, 수수, 피 가운데 어느 하나를 파종하였을 것이다. 특히 이 가운데에서도 여름철의 아주 습한 시기에도 그리 많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여겨지는 수수나 피를 심었을 가능성이 높다.101)양기석, 앞의 책, 2005, 160쪽에서 하층 밭에 보리나 콩과 같은 작물을 재배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 가운데 삼국시대에 피를 널리 재배하였음을 함안 성산산성에서 근래에 발굴 조사된 목간(木簡)을 통하여 입증할 수 있다.102)함안산성 목간의 현황에 대해서는 국립 창원 문화재 연구소, 『한국의 고대 목간』, 2004 및 국립 창원 문화재 연구소, 「함안 성산산성」, 11차 발굴 조사 현장 설명회 자료, 2006 및 국립 가야(창원) 문화재 연구소, 「함안 성산산성 제12차 발굴 조사」, 현장 설명회 자료집, 2007이 참조된다. 그리고 최근까지 그것을 둘러싼 연구 동향에 대해서는 전덕재, 「함안 성산산성 목간의 연구 현황과 쟁점」, 『신라 문화』 31, 동국 대학교 신라 문화 연구소, 2008이 참조된다. 함안 성산산성 목간은 561년 무렵에 제작된 것으로 대부분은 상주(上州)의 여러 행정촌(行政村)에서 납부한 곡물을 표기한 하찰(荷札) 목간이다. 하찰 목간의 묵서는 곡물을 바친 사람의 주소, 이름, 납부한 공물의 종류와 수량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까지 발견된 목간에 보이는 곡물 가운데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패(稗) 즉 피이고, 이 밖에 보리(麥), 쌀보리를 가리키는 패맥(稗麥·稞麥), 쌀(米) 등이 보인다. 목간의 내용은 대부분 상주의 여러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피 1석(石)을 납부하였다는 것이다. 피를 납부한 사람의 주 소지를 보면, 고타(古阤, 경북 안동시), 구벌(仇伐, 경북 의성군 단촌면 일대), 추문(鄒文, 소문(召文)과 동일한 지명, 경북 의성군 금성면), 급벌성(及伐城, 경북 영주시 순흥읍), 이벌지(伊伐支, 경북 영주시 부석면), 매곡촌(買谷村, 경북 안동시 도산면과 예안면), 물사벌(勿思伐, 경북 예천군 예천읍) 등이다. 이 밖에 진성(陳城), 이진지(夷津支) 등의 지명이 보이나 현재 어느 곳에 해당하는지 비정할 수 없다. 목간에 보이는 지명은 현재 경북 북부 지방 일원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는데, 6세기 중반에 이 지역에서 피를 광범하게 재배하였음을 목간을 통하여 엿볼 수 있다. 이처럼 피를 수취물의 일부로 징수한 사실을 통하여 신라의 다른 지역에서도 마찬가지로 피를 널리 재배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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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간에 보이는 곡물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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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래에는 상층 경작 유구에 파종한 작물을 조라고 추정하였다.103)김기흥, 앞의 글, 1995, 20쪽. 그러나 조는 하천 가의 밭보다는 산전(山田)에서 많이 재배하였기 때문에 이 견해는 다시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6세기 고대 일본에서 밭벼를 많이 재배한 점이 참조되고,104)고분시대의 아리마(有馬) 유적이나 유우도우(雄野堂) 유적의 밭 유구에서 육도(陸稻)를 재배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能登健, 앞의 글, 1991, 98쪽). 진주 대평리 유적 삼국시대의 밭에서 벼가 발견되었다. 이와 같은 일본과 진주 대평리 유적의 사례를 감안할 때, 미사리 상층 밭에서도 밭벼를 재배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 밖에 삼국시대에 보리나 콩, 밀, 조 등의 잡곡을 널리 재배하였음은 『삼국사기』 등의 문헌 기록과 아울러 여러 유적에서 탄화된 잡곡이 조사된 사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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