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7권 농업과 농민, 천하대본의 길
  • 제1장 철제 농기구의 보급과 농사의 혁명
  • 3.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의 수전
  • 수리 관개 시설의 확충과 수전의 확대
전덕재

소택지, 저습지, 용수의 공급이 용이한 지역을 벗어나 자연 제방 또는 저습지와 자연 제방 사이의 중간 지대, 비교적 높은 지형에 위치한 평탄한 구릉지 등에까지 수전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저수지 또는 대규모 수리 시설이 필요하다. 다음 기록은 신라가 4∼6세기에 이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기울였음을 알려 준다.

처음으로 벽골지(碧骨池)를 만들었는데, 둑의 길이가 1,800보였다.115)『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2, 흘해이사금(訖解尼師今) 21년.

시제(矢堤)를 새로 쌓았는데, 둑의 길이가 2,170보였다.116)『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3, 눌지마립간(訥祗痲立干) 13년.

담당 관청에 명하여 제방을 수리하게 하였다.117)『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법흥왕 18년 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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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벽골지
김제 벽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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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기사는 벽골지 축조에 관한 것이다. 오늘날 벽골지는 전북 김제 지역에 있다. 그래서 기존에 첫 번째 기사를 백제와 연관시켜 330년(흘해이사금 21) 무렵에 벽골제를 축조하였다고 이해하기도 하나,118)이광린, 1961 『이조 수리사 연구』, 한국 연구 총서 제8집, 한국 연구원, 1961 ; 윤무병, 「김제 벽골제 발굴 보고」, 『백제 연구』 7, 충남 대학교 백제 연구소, 1976. 여기에 언급된 벽골지의 정확한 위치는 재고할 여지가 있다. 다만 790년(원성왕 6)에 신라가 전주(全州) 등 일곱 주의 사람들을 징발하여 벽골제를 증축(增築)하였다.119)『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10, 원성왕 6년 봄 정월. 이때 전주를 중심으로 역부(役夫)를 동원하였으므로 이때 증축한 것은 김제에 소재한 현재의 벽골제임이 틀림없다. 여기서 ‘증축하였다’는 표현에 주목한다면, 그것은 삼국 통일 이전 백제에서 처음 쌓았을 가능성이 높다. 아마도 백제가 전북에 자리 잡고 있던 마한 세력을 지배 영역으로 편제한 6세기 전후에 그것을 축조하였을 것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벽골 지의 둘레가 1만 7026보이고 □□가 166보, 수전이 1만 4070(결)”이라고 기술하였다.120)『삼국유사(三國遺事)』 권1, 왕력(王曆)1, 제16 걸해니질금(乞解尼叱今). 벽골지의 축조로 상당한 수전이 개간되었음을 알려 준다.

두 번째 기사는 429년(눌지마립간 13)에 제방을 축조하였다는 것이다. 이때 쌓은 시제의 위치나 실체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명칭을 통해서 하천 가에 활처럼 휜 모양으로 쌓은 제방일 것이라고 추측할 수는 있다. 그 결과 제방 안쪽에 안정적인 경작지가 다수 확보되었을 것이다. 세 번째 기사는 신라 조정이 제방의 건설과 수리에 깊은 관심을 표명한 것이다. 실제로 536년(법흥왕 23)에 건립된 영천 청제비 병진명(永川菁堤碑丙辰銘)은 법흥왕대에 청제를 축조하였음을 알려 준다.

다음 기록은 백제에서도 5∼6세기에 수리 관개 시설의 확충에 관심을 기울였음을 알려 준다.

국인을 징발하여 흙을 쪄서 성을 쌓고, 안에서는 궁실(宮室), 누각(樓閣), 대사(臺榭, 돈대와 그 위의 건물)를 지었는데, 모두 장려하지 않음이 없었다. 또 욱리하(郁里河)에서 큰 돌을 취하여 곽(槨)을 만들어 부친의 유골(遺骨)을 안장하고, 강 연변을 따라 제방을 쌓았는데, 사성의 동쪽에서 숭산(崇山)의 북쪽까지 이르렀다.121)『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3, 개로왕 21년 가을 9월.

(왕이) 명령을 내려 제방을 완고하게 하고, 서울과 지방에서 유식(遊食)하는 자들을 몰아 귀농(歸農)하도록 하였다.122)『삼국사기』 권26, 백제본기4, 무령왕 10년 봄 정월.

첫 번째 기사는 백제가 475년(개로왕 21)에 한강 변에 제방을 쌓았음을 알려 주는 자료이다. 제방의 기능은 한강의 범람으로 인한 가옥이나 농토의 유실을 막는 데 있었을 것이다. 이때 제방 안쪽의 저습지나 평탄한 구릉지를 경작지로 개간하였을 것이다. 두 번째 기사는 510년(무령왕 10)에 백제가 제방의 축조와 수리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음을 전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제방은 하천의 범람을 막기 위하여 하천 변에 설치한 것과 아울러 저수지나 소하천에 설치한 작은 수리 시설 등을 포괄하였을 것이다.

신라와 백제가 4∼6세기에 수리 관개 시설을 확충한 배경과 관련하여 철제 농공구의 보급에 따른 축제 기술의 향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서기』에는 323년에 “궁전 북쪽의 하천을 막아서 자전제(茨田堤)를 쌓으려고 하였으나 여러 번 실패하였다가 마침내 무사시(武藏) 사람 코하쿠비(强頸)와 카우치(河內) 사람 마무타노무라지코로모노코(茨田連衫子) 두 사람의 힘을 빌려 그것을 완성하였고,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된 신라인들을 그것을 쌓는 데에 동원하였다.”라는 내용이 전한다.123)『일본서기(日本書紀)』 권제11(卷第十一) 인덕 천황(仁德天皇) 11년 겨울 10월. “掘宮北之郊原 引南水以入西海 因以號其水曰堀江. 又將防北河之 以築茨田堤. 是時有兩處之築而乃壤之難塞. 時天皇夢 有神誨之曰 武藏人强頸 河內人茨田連衫子 二人以祭於河伯 必獲塞. 則覓二人而得之 因以禱于河神. 爰强頸泣悲之 沒水而死 乃其堤成焉. 唯衫子取全匏兩箇 臨于難塞水 乃取兩箇匏投於水中請之曰 河神崇之 以吾爲幣 是以令吾來也 必欲得我者 沈是匏而不令泛 則吾知眞神 親入水中. 若不得沈匏者 自知僞神 何徒亡吾身. 於是飄風忽起 引匏沒水 匏轉浪上而不沈 則瀚瀚汎以遠流. 是以衫子雖不死 而其堤且成也. 是因衫子之幹 其身非亡耳. 故時人號其兩處 曰强頸斷間 衫子斷間也. 是歲 新羅人朝貢則勞於是役.” 일본인들이 제방을 쌓다가 여러 번 실패하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에 하천의 물을 막아서 제방을 쌓는 일본인의 기술은 미숙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신라인이 자전제의 축조에 관여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124)한편 『고사기(古事記)』 권하(卷下)에서는 “又役秦人作茨田堤及茨田三宅.”이라고 하였다. 『일본서기』에서는 단지 신라 사신을 자전제의 축조에 동원하였다고 간단히 언급하였지만, 신라 사신이 선진 축제 기술을 전수하였기 때문에 자전제를 완성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자전제 축조가 323년의 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일본서기』의 백제 관계 기사는 대개 기년(紀年)을 120년 정도 내려 잡아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적용하면,125)이병도, 「백제 칠지도고(百濟七支刀考)」, 『한국 고대사 연구』, 박영사, 1976 ; 그러나 웅략기(雄略紀) 이전 『일본서기』에 나오는 신라 관계 기사를 120년 기년을 인하하여 『삼국사기(三國史記)』와 대비할 때, 맞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관점을 가지고 『일본서기』에 나오는 신라 관계 기사의 기년을 일괄적으로 조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겠다. 자전제를 쌓은 시기는 대략 5세기 중반으로 볼 수 있다. 이 무렵 신라에서는 U자형 따비를 비롯한 철제 농기구가 널리 보급되었고, 철제 도구를 이용하여 시제와 같은 비교적 규모가 큰 제방 등을 축조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따라서 5세기 중반에 신라인이 일본에 선진 축제 기술을 전해 준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라만 일본에 선진 축제 기술을 전해 준 것은 아니다. 『일본서기』 응신기(應神紀)와 인덕기(仁德紀)에 치수(治水)와 관련된 기사가 자주 보인다.126)치수(治水)와 관련된 기사는 응신 천황(應神天皇) 7년 가을 9월조, 11년 겨울 10월조, 인덕 천황(仁德天皇) 11년 여름 4월조, 겨울 10월조, 12년 겨울 10월조, 13년 겨울 10월조에 보인다. 특히 『일본서기』에 따르면 요진 천황(應神天皇) 7년에 “고구려·백제·신라·임나가 일본에 조공을 바쳤는데, 이때 여러 한인(韓人)을 이끌고 한인지(韓人池)를 만들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127)『일본서기』 권10, 응신 천황(應神天皇) 7년 가을 9월. “高麗人 百濟人 任那人 新羅人 並來朝 時命武內宿禰 領諸韓國人等作池 因以名池號韓人池.” 『고사기(古事記)』에는 “이때에 다수의 신라인이 일본에 도래(渡來)하여 백제지(百濟池)를 만들었다.”라고 전한다.128)『고사기(古事記)』 권중(卷中) 응신조(應神朝). “亦新羅人參渡來 是以建內宿禰命引率 爲役之堤池 而作百濟池.” 이 밖에 여러 치수 공사에 한인들을 동원한 언급은 보이지 않지만, 거기에서도 한인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을 것이다. 5세기에 신라만이 아니라 백제 역시 선진 축제 기술을 전수하였음을 알려 준다.129)참고로 일본 오사카부(大阪府) 사야마이케(狹山池)는 616년에 백제 토목 기술을 기초로 축조하였고, 또 나라 현 고세시(御所市) 난고다이토우(南鄕大東) 유적의 소형 저수 시설은 백제 도래인(渡來人)과 관련된다고 이해되고 있다(성정용, 「김제 벽골제의 성격과 축조 시기 재론」, 『한·중·일의 고대 수리 시설 비교 연구』, 계명 대학교 출판부, 2007). 5세기에 백제에는 이미 삽과 가래, 철제 괭이와 낫, U자형 따비 등 철제 농기구가 널리 보급된 사실로 보아 축제 기술도 상당히 발전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5세기에 새로 개발된 축제 기술과 관련하여 개로왕대에 “증토(烝土)하여 성을 쌓았다”는130)『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3, 개로왕 21년 가을 9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증토축성(烝土築城)’은 진흙을 쪄서 굳게 성을 쌓는다는 의미이다. 4세기나 그 이전 시기에 쌓은 풍납리 토성은 모래와 진흙을 판축법(版築法)으로 두들겨 층층이 쌓았다.131)김원룡, 『한국 고고학 개설』, 일지사, 1973, 176쪽. 판축법은 이미 낙랑시대에 쌓은 지탑리 토성이나 성현리 토성 등에서도 확인되는132)윤용구, 「한국 고대의 ‘중국식 산성’에 대하여」, 『한국 고대사 논총』 8, 한국 고대 사회 연구소, 1996, 332쪽 것으로 보아 일찍이 토성 축조 기법으로 널리 보급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흙을 쪄서 토성을 쌓는 방식은 판축법보다 더 진보된 축조 방식이라고 여겨지며, 제방을 쌓을 때에도 역시 이러한 방식이 활용되었을 것이다.133)5호 16국의 하나였던 혁련하(赫連夏)의 수도 통만성(統萬城, 중국 섬서성 정변현)을 만들 때, “땅을 쪄서 만들었다.”고 전하는데, 성벽의 화학 감정에 따르면, 그 성토의 주성분은 모래(석영), 점토, 탄산칼슘(석회)이라고 한다. 여기서 “땅을 쪄서 만들었다.”는 것은 이 세 가지가 합쳐졌을 때 증기를 내면서 갑자기 체적이 팽창함으로써 모래와 진흙이 압축되는 공법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며, 이 공법으로 쌓은 통만성은 콘크리트와 같이 매우 단단하다고 알려져 있다(박한제, 『영웅시대의 빛과 그늘』, 사계절, 2003, 259쪽). 흙을 쪄서 성을 쌓는 백제의 방식이 통만성과 같았다고 단언하기 곤란하지만, 일단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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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야마이케의 부엽토층
사야마이케의 부엽토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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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과 초본류(草本類)를 교대로 깔고 판축법으로 쌓아 올라가는 축제 방식, 즉 부엽 공법(敷葉工法)도 아울러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오사카부(大阪府) 카메이(龜井) 유적에서 5세기 말∼6세기 초의 제방 유구가 발견되었는데, 부엽 공법으로 하천을 막고 제방을 쌓은 것이다.134)廣瀨和雄, 「耕地と灌漑」, 『古墳時代の硏究』 4(生産と流通Ⅰ), 1991, 雄山閣, 22쪽. 우리나라는 조선시대 초기에 벽골제의 제방을 견고히 하 기 위하여 먼저 목책(나무 울타리)을 세우고 거기에 흙을 메워서 제방을 더 쌓았으며, 제방 안팎에는 버드나무를 두 줄로 심어서 기반을 튼튼히 하고 수문을 다섯 곳에 만들었다. 제방이 파괴된 곳에는 나무를 가로와 세로로 연결하여 움직이지 않게 튼튼히 세우고 제방 밑에는 돌을 많이 깔고, 돌이 없을 때는 소나무 가지를 많이 쌓아 물이 새지 않게 하였다.135)이광린, 앞의 책, 1961 ; 최상준 외, 『조선 기술 발전사』 4(리조 전기편), 과학·백과사전 종합 출판사, 1996, 214쪽. 우리나라에서도 전통적으로 부엽 공법으로 제방을 쌓은 사실을 알려 주는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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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엽 공법 재현
부엽 공법 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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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엽 공법 재현
부엽 공법 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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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엽 공법 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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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와 신라는 5세기부터 향상된 축제 기술을 바탕으로 저수지와 대규모 수리 시설의 축조에 관심을 기울여 수전의 비중이 높아졌을 것이다. 이때에 축조한 저수지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벽골지이다. 벽골지는 백제가 전라북도 지역의 마한 세력을 그 영역으로 편제한 6세기 전후에 축조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중국의 피(陂·坡)와 같이 하천이 산곡에서 평지에 흘러가는 지점에 제방을 쌓은 산곡형(山谷型) 저수지에 해당한다. 이런 유형의 저수지는 경사면을 제방으로 막는 것이기 때문에 비교적 적은 노력으로 쌓을 수 있다. 게다가 경사를 이용하므로 면적은 좁지만 수심이 깊어 충분한 저수량을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반면에 하천이 운반하는 대량의 토사로 빨리 매몰될 수 있어 자주 준설(浚渫)을 해주어야 한다. 백제와 신라에서도 여러 가지 장점을 지닌 산곡형 저수지를 다수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136)이 밖에 구체적인 실례는 발견되지 않지만, 삼국시대에 평지형(平地型) 저수지도 축조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유형의 저수지는 중국의 당(塘)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평지를 파고 그 파낸 흙을 둑으로 쌓아 올려 만들었다. 처음 만들 때에 노력이 많이 들고, 저수량이 상대적으로 적어 전체 저수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높지 않았을 것이다.

소하천의 분류나 지류를 차단하여 주변의 경작지에 물을 공급하는 관개 시설도 보인다. 보는 물의 수위를 높이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하천 연변의 제한된 범위의 수전에만 혜택을 줄 수 있었다. 그보다 규모가 큰 관개 시설을 만든 단계에는 수위를 더 높이는 것이 가능하였으므로 더 넓은 범위의 경작지가 혜택을 받았을 것이다. 이때 물을 공급할 수 있는 대상지로 자연 제방 또는 그것과 배후 저습지 사이의 중간 지대, 비교적 높은 지형에 위치한 평탄한 구릉지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산곡형 저수지는 영천 청제에서 보듯이137)영천 청제(菁堤)는 해발 500m가량 되는 채약산(菜藥山)에서 흘러내리는 계수(溪水)를 막아 만든 저수지로서 그 아래의 완만한 경사지에 조성된 경작지에 물을 공급하였다. 골짜기의 흐르는 물을 저장하여 그 아래의 완만한 경사지에 조성된 경작지에 수로를 통하여 물을 공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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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청제 전경
영천 청제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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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세기 삼국에서 수리 관개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초기에 관개가 불가능하였던 반건전(半乾田)이나 건전 지역에도 물을 공급하여 수전으로 조성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이러한 지역은 소택지나 저습지 근처의 수전과 달리 배수가 양호하였기 때문에 근부(根腐)의 피해를 줄일 수 있다. 더구나 이러한 지역에 위치한 수전은 일반적으로 급수와 배수가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급수와 배수가 원활하면, 산소가 충분히 공급되어 미생물의 유기 물질 분해가 왕성해져138)유기물의 분해 소모는 주로 호기성 세균에 의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공기의 유통이 좋을수록 분해는 왕성하여 부식의 집적량이 적어지는데, 산소와 공기의 혼합 가스 중 산소가 6∼8% 이하가 되면 유기물의 분해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한다고 한다(곽판주·노신규, 앞의 책, 1974, 60쪽). 벼가 생육하는 데에 필요한 영양소를 충분히 제공하는 이점이 생긴다. 대규모 저수지와 수리 시설을 만들어 건전 지역에 물을 공급하여 수전을 조성하는 것 역시 토지 생산성의 증대, 즉 단위 면적당 수확량의 증대와 직결되었다.139)八賀晋, 「古代における水田開發-その土壤的環境」, 『日本史硏究』 96, 1966 ; 八賀晋, 「古代の農耕と土壤」, 『古代の日本』 2,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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