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7권 농업과 농민, 천하대본의 길
  • 제1장 철제 농기구의 보급과 농사의 혁명
  • 4. 원시·고대 농경의 흐름
전덕재

이제까지 신석기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까지의 농경에 관하여 정리하였다. 이 글에서 검토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신석기시대 중기부터 농경이 시작되었다. 당시에는 주로 화경을 일삼았는데, 석제와 목제 농기구를 사용하여 조, 기장, 피 등 주로 잡곡을 재배하였다. 그러나 아직 농작물의 생산성이 매우 낮았으므로 경제생활에서 여전히 채집, 어로, 수렵이 차지하는 비중이 월등하게 높았다. 청동기시대에 보리, 밀, 콩 등 다양한 잡곡이 재배되기 시작하였고 벼농사도 보급되었다. 농경문 청동기와 진주 대평리 유적의 경작 유구를 통하여 당시에 경작지에 고랑과 이랑을 만들고, 비교적 넓은 이랑에 조파하여 잡곡을 재배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갈이 작업에는 목제 따비와 괭이를, 수확 시에는 반달 돌칼을 널리 활용하였다. 석제 농기구도 농사에 이용되었으나 그 빈도는 신석기시대에 비하여 낮은 편이었다.

청동기시대 농경에서의 커다란 변화는 벼농사의 보급에서 찾을 수 있다. 여주 흔암리 유적을 비롯하여 여러 청동기시대 유적에서 탄화미 및 볍씨가 박힌 토기가 발견되었고, 울산 무거동 옥현 유적과 논산 마전리 유적 등에서 당시의 수전 유구가 발견되어 벼농사가 한반도 중·남부 지방을 중 심으로 널리 보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청동기시대의 수전은 수심을 고르게 하기 위하여 소구획으로 조성하였고, 계곡이나 하천을 보 같은 간단한 시설로 막고 관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수전은 밭보다 생산성이 높았다. 또 보와 같은 관개 시설의 축조나 수전의 관리에 지속적이고 많은 노동력이 요구되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벼농사의 보급 이후 농경 활동에서 읍락 주민 상호 간의 결속력이 높아졌고, 그 결과 정주성이 크게 강화되었다.

기원전 4세기에 철기가 보급되면서 일부 농기구를 철제로 만들기 시작하였으나 삼국시대 초기까지는 농기구의 효율성이 높지 않았고 보급도 제한적이었다. 이 때문에 파종, 수확 등 농사철을 제때에 맞추려면 노동력을 집중적·집단적으로 투입해야 하였다. 이에 따라 당시 사람들의 사회생활이 집단적이고 공동체적인 모습을 띠게 되었다. 4세기 이후 철제 농기구의 보급이 확대되었다. 이때에 갈이 도구로 U자형 따비를, 수확 도구로 낫을 널리 이용하였다. 이 밖에 철제 괭이나 쇠스랑 등도 농사에 사용하였다. 그러나 U자형 따비는 인력을 이용하여 갈이 작업을 한다는 점에서 농업 생산 증대에 한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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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발자국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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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경은 축력을 이용하여 갈이 작업을 하는 것으로 농업 기술상의 의미 있는 진전이었다. 삼국 가운데 고구려에서 가장 먼저 우경을 이용하여 농사를 지었다. 고구려에서는 대략 후한시대, 즉 2세기 중·후반부터 우경을 이용하였다. 신라와 백제는 4∼5세기경에 우경을 농사에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갈이 작업에 우경을 이용함으로써 노동 생산성의 증 대와 더불어 토지 생산성의 증대를 꾀할 수 있었다. 토지 생산성의 증대는 깊이갈이나 개간의 확대를 통하여 수확량의 증대를 꾀한 측면을 의미하고, 노동 생산성의 증대는 축력을 이용하여 밭을 갈아 결과적으로 노동력 절감 효과를 가져왔음을 의미한다. 소와 보습을 모두 갖출 수 없는 농민들은 인력경으로 농사를 짓기도 하였다. 우경의 도입으로 농업 생산에서 개별 가호 단위의 농업 경영 방식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집단적이고 공동체적인 농업 생산에 기초한 읍락 사회를 해체시키는 동인으로 작용하였다.

철제 농기구와 우경의 보급은 또한 경지의 이용 방식도 변화시켰다. 경기도 하남 미사리 유적에서 백제시대의 경작 유구 두 개가 발견되었는데, 상층 유구는 대략 6세기경에, 하층 유구는 4∼5세기나 그 이전 시기에 조성된 경작지였다. 하층 경작 유구는 1∼2년 동안 밭 전체를 묵혔다가 경작하는 휴한 농법 단계의 경작지로 추정되고, 상층 경작 유구는 한대 대전법 단계와 마찬가지로 고랑과 이랑을 매년 교대로 파종처로 삼는 초보적인 수준의 상경전일 가능성이 높은데, 이것은 축력을 이용한 밭갈이에 힘입은 결과였다. 최근에 진주 평거동 유적의 경작지에서 연작하였음을 알려 주는 증거가 발견되어 주목을 끌었다.

삼국시대 초기에 소하천이나 계곡에 보 같은 시설을 설치하여 관개한 수전을 널리 개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설로 관개할 수 있는 면적은 비교적 좁은 편이었고, 가뭄이 들면 물이 부족하여 안정적으로 벼를 재배하기가 쉽지 않았다. 한편 백제 초기에 주로 물의 공급이 용이한 지역인 소택지나 저습지 부근에 수전을 개발하였다. 대체로 이곳에 조성된 수전은 지하수 수위가 높고, 배수가 불량한 담수전이다. 그 때문에 산소의 공급이 원활하지 못하여 벼의 생육에 필요한 영양분을 충분하게 공급받지 못하고, 담수 상태에서 환원 작용이 강하게 일어나 벼의 뿌리가 썩는 근부 현상이 나타나 다수확에 지장을 받았다. 근부 현상에 따른 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논물을 모두 빼고 건조시킬 수 있는 건전 지역에 수전을 조성하는 것이 요구된다.

건전 지역을 수전으로 개발하기 위해서는 저수지나 거대한 수리 시설의 축조가 요구된다. 철제 농공구가 보급된 5세기에 축제 기술이 한 단계 더 향상되었는데, 흙을 쪄서 제방을 쌓는 방법이라든지 흙과 초본류를 교대로 깔고 판축상 기법으로 제방을 쌓는 부엽 공법이 바로 그에 해당한다. 백제와 신라는 향상된 축제 기술을 기초로 거대한 수리 시설을 건립하였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김제의 벽골제이다. 거대한 수리 시설을 건설함에 따라 경사지를 비롯한 건전 지역이 수전으로 널리 개발되었다. 이곳에 위치한 수전은 배수가 원활하였다. 이러한 조건 때문에 경사지 등에 조성된 수전에 벼를 재배하면 근부 현상의 피해를 크게 줄일 수 있었다. 건전 지역의 수전화 역시 농업 생산성의 증대와 직결되었다.

수전의 확대와 더불어 수전 농법에도 진전이 있었다. 삼국시대의 수전 유구에서 고랑과 이랑의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기존에 이것을 회환 농법과 관련지어 이해하였으나 그대로 수긍하기 어렵다. 조선시대에는 일반적으로 수경 직파법으로 벼를 재배하였으나 물이 부족한 경우에 건경 직파법으로 벼를 재배하기도 하였다. 건경 직파법은 논에 고랑과 이랑을 조성한 다음, 고랑에 볍씨를 뿌려 재배하다가 우기에 빗물을 담아 일반 수도(水稻)와 같이 재배하는 방식을 말한다. 삼국시대 수전 유구에 전하는 고랑과 이랑의 모습은 당시에 건경 직파법으로 벼농사를 지은 유력한 증거가 아닐까 한다. 나아가 『수서』에 언급된 ‘수륙 겸종’ 역시 신라에서 건경 직파법으로 벼농사를 지은 사실을 반영한 것일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한다.

그런데 건경 직파법은 숙치와 김매기에 상당한 노동력이 소요되고, 또 묘의 뿌리가 깊이 들어가지 않아서 가뭄이 들면 쉽게 말라 버리기 때문에 수경 직파법에 비하여 생산성이 높지 않았다. 수경 직파법으로 벼를 안정적으로 재배하려면 관개와 배수가 원활한 수리 안전답이 요구된다.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는 수리 안전답의 면적을 늘리기 위하여 저수지의 축조나 수리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게다가 통일 신라에서는 제언에 수통을 설치하여 관개하는 기술을 개발하였다. 수통으로 배수하기 이전 시기의 제언이나 수통을 설치하지 않은 제언은 제방을 터서 관수하였다. 이렇게 하면 물의 낭비가 심하고 제방의 수리에 많은 노동력이 투여되었으며, 적절할 때에 수전에 물을 공급하기 어려웠다. 물을 충분하게 저장할 경우, 수통으로 배수하면 적절할 때에 물을 공급할 수 있기 때문에 수전에서 자유롭게 물을 뺄 수 있었다. 따라서 제언에다 수통을 설치하여 배수하는 방법을 개발함으로써 수경 직파법으로 벼농사를 짓는 수리 안전답의 비중도 더 높아졌음은 물론이다. 제언에다 수통을 설치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수리 관개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통일신라시대에 농업 생산성이 증대되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청동기와 삼국시대 경작 유구에 대해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분석을 하지 못하였다. 지금까지 발굴된 경작지의 면적이 대부분 좁을 뿐만 아니라 일부는 발굴이 진행 중이거나 아직 보고서가 발간되지 않아서 연구 자료로 삼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농경에 관하여 세밀하게 검토하지 못한 탓도 있다. 또 ‘개선사석등기(開仙寺石燈記)’에 보이는 저답(渚畓)과 오답(奧畓)이란 표현에 주의하여 그 부근의 수리 관개 시설에 대한 추론이 가능하지만, 여기서는 그에 관하여 자세하게 검토하지 못하였다. 앞으로 이들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여 이 글의 한계를 보완하도록 하겠다. 이 글이 향후 선사 및 고대 농경에 대한 연구의 진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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