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7권 농업과 농민, 천하대본의 길
  • 제2장 고려시대 농업 기술 및 농민 생활, 국가 주도 권농 정책
  • 2. 중농 이념과 농경의례
  • 풍년 기도와 추수 감사의 농경의례
한정수

왕조의 통치 질서가 안정되고 지배 체계가 어느 정도 정비되면서 고려는 태조가 제시한 바 있는 농업을 중요시하는 중농 이념을 국가적 의례로 반영하였다. 말하자면 풍년을 기도하고 재해를 없애 왕조의 안정과 풍요를 바라는 의례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국가 의례로 정비하여 위로는 국왕으로부터 아래로는 농부들에 이르기까지 농상에 대해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으 며 또 이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이는 고려가 인식한 국왕의 신성성과도 관련되었다. 고려는 국왕권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며 부처의 가호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 하였다. 따라서 국왕은 덕을 닦고 올바른 정치를 행하여 음양을 조화하여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신하 및 백성들과 함께 부처를 잘 모시고 불법(佛法)을 널리 펴야 한다고 이해하였다. 국왕권의 신성성은 하늘의 뜻 즉 천의(天意)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국왕은 하늘이 인간 세상에 보이는 여러 가지 현상, 예컨대 하늘의 변화와 재이를 항상 주목하고 이를 조절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고려시대 국왕이 재이를 하늘이 내린 벌인 천견(天譴)으로 인식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고려는 국초부터 국왕을 중심으로 풍년을 기원하는 기곡(祈穀), 재이를 없애기 위한 기양(祈禳), 왕실과 국가의 복을 비는 기복(祈福)의 행사에 주목하였고, 이를 위한 의례는 국가적 제의(祭儀)와 축제로 마련되었다.201)한정수, 『한국 중세 유교 정치 사상과 농업』, 혜안, 2007 참조.

기곡을 위한 국가적 제의는 먼저 유교에 바탕을 둔 길례(吉禮)의 수용을 통해 정비되었다. 이는 천명을 대신하는 군주가 순천(順天)을 통해 시후 조절자로서의 능력을 확인하고 농본에 기초하고 있는 중농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성격을 띠고 있었다. 즉 시후의 조절과 농업을 제의를 통하여 직접 연결함으로써 농업 생산에 대한 군주의 역할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었다. 농본(農本)-민본(民本)-국본(國本)-왕도 정치로 연결되는 통치 기반을 표방하려는 의식의 결정체이기도 하였다.

원구(圓丘)에서의 제천·기곡·기우는 군주의 신성함과 절대성이 시후를 조절하며 그에 따라 풍흉을 조절할 수 있다고 본 데에서 이루어졌다. 대체로 기곡을 처음 행하는 시기는 정월 입춘 혹은 상신(上辛), 계칩(啓蟄, 경칩) 등이며, 제천은 수나라와 당나라 때 원구에서 제천하는 시점이던 11월 동지에 하였다.202)『수서(隋書)』 권6, 지(志)1 예의(禮儀) 1. 동지와 정월을 제천과 기곡의 제사 시기로 잡은 것은 천 시 및 시후를 하늘이 주관하고 있다는 인식하에서 그러한 호천(昊天)에 제사를 올려 시후의 순조로움과 풍년을 빌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이 시기에 주목한 것은 11월 동지와 정월이 모두 한 해의 시작으로서 양기(陽氣)가 일어나 인간 및 만물이 활동하기 시작하는 때이기 때문이었다.203)박미라, 『중국 제천 의례 연구』, 서울 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1997, 184∼192쪽 참조. 고려시대에 원구는 983년(성종 2) 정월 상신(上辛)에 처음으로 설치되고 제사가 시행되었다. 동지의 원구 제천이 보이지 않는 것은 중동 팔관회(仲冬八關會)와 겹치므로 팔관회로 대신하였기 때문이다.

1088년(선종 5) 4월 남교(南郊)에 나아가 비가 내리기를 비는 우사(雩祀)를 올렸다는 기록이나204)『고려사』 권10, 세가10, 선종 5년 4월 병신. 1144년(인종 22) 정월 신유(辛酉)에 원구에서 제사하기 하루 전에 남교에서 재계를 올리며 잤다는 기사,205)『고려사』 권17, 세가17, 인종 22년 정월 신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회빈문(會賓門) 밖에 고려의 교사지(郊祀地)가 있다고206)『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5, 개성부 하(開城府下), 고적(古蹟). 한 것을 보면 고려의 원구는 개경의 남교 회빈문 밖에 있었다. 여기서 고려 왕조는 매년 정월 상신이나 맹하 즉 4월에 길한 날을 택하여 기곡 성격을 갖는 제사를 올린 것이다.

땅에 대한 제사인 방택(方澤)도 마련되었다. 제천을 위한 장소로서 남교에 위치한 원구에 짝하여 방택은 북교(北郊)에 위치하여 땅에 대한 제사를 올리도록 하고 있어 천지 음양의 기운을 순조롭게 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그 위치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없고 개경의 북교에 있었다는 정도만 알 수 있다.

종묘(宗廟)는 왕실의 조상을 모시면서 선대 왕과 왕후의 제사를 올려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는 사당인데, 이곳에도 제의를 갖추었다. 고려의 태묘(太廟)는 992년(성종 11)에 완성되었는데, 개경의 황성 밖 숭인문(崇仁門) 안쪽에 자리 잡았다. 태묘는 특히 적전(籍田) 등에서 수확한 곡물 등을 제물 즉 자성(粢盛)으로 하게 되어 있어 농경 의례 중 중요한 속성인 ‘춘기추보(春祈秋報)’의 의미가 있다. 종묘만이 아니라 고려에서는 태조 이하 국왕들의 어진(御眞)을 모셔 놓고 제향하는 경령전(景靈殿)이 있어 태묘와 같은 역 할을 가지기도 하였다.

농업 및 토지와 관련한 신을 모신 사직(社稷)은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 대한 제사를 올리는 곳으로서 군주의 통치 기반이 결국 토지와 농업에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었다. 991년(성종 10) 윤2월에 사직단을 세웠는데 개경의 황성 안 서쪽에 있었다. 제사는 중춘(仲春) 및 중추(仲秋)의 상무(上戊) 및 납제(臘祭) 등에 행해졌다. 특히 고려시대의 사직은 비가 오기를 비는 기우(祈雨)나 눈이 오길 비는 기설(祈雪) 등을 위한 제사도 행해졌다.

선농적전(先農籍田)은 왕이 직접 토지 및 농업신에 대해 제의를 올리고 친히 쟁기를 잡고 밭을 가는 모범을 보이는 행사였다. 선농단(先農壇)과 적전은 원구에서의 기곡과 연결하여 올렸는데, 이들은 개경의 동교(東郊), 즉 숭인문과 보정문(保定門) 밖 적전리 증지(甑池)에 있었다. 특히 고려시대 선농 의례가 갖추어지기 전에 이미 신라에서 선농(先農), 중농(中農), 후농(後農)의 제의를 갖춘 바 있고, 고려에서도 4월에는 중농, 6월에는 후농에 대한 제의를 행하였다. 선농의 경우는 맹춘(孟春)의 길한 해일인 길해(吉亥)를 택하여 신농을 제사하면서 후직을 배(配)하였다.

선잠(先蠶)은 비록 왕후에 의해 직접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양잠(養蠶)의 신을 제사하는 것이었다. 『예기』에서는 선잠에 대해 “천자는 남교에서 친경하여 제성(齊盛)에 이바지하며 왕후는 북교에서 친잠하여 순복(純服)에 이바지한다. 제후는 동교에서 친경하여 또한 제성에 이바지하며 부인은 북교에서 친잠하여 면복(冕服)에 이바지한다.”라고207)『예기(禮記)』 제25, 제통(祭統) 하여 북교에서 친잠하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하지만 고려의 경우 친잠은 의례 형태만 정리되어 있을 뿐 제의를 시행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계절신(季節神)의 요소를 갖고 있는 것으로서 바람과 비의 조절 및 농사의 풍흉 등을 맡는 농업신인 풍사(風師)·우사(雨師)·뇌신(雷神)·영성(靈星)에 대한 제사도 정비되어 나갔다. 풍우(風雨) 및 목축(牧畜)과 관련하여서도 고려에서는 마조(馬祖)·선목(先牧)·마사(馬社)·마보(馬步)를 통해 나름대로의 제사와 기원을 해나갔다.

기양과 기복을 위한 제의는 대체로 이미 발생하여 고려 사회에 큰 재앙을 불러온 재변을 없애고 복을 불러오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졌다. 예컨대 가뭄, 태풍, 홍수, 별자리 변화, 송충이의 발생, 지진, 바다 색깔의 변화, 외적의 침입 등 고려의 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는 모든 것이 포함되었다. 고려는 이를 다양한 분야에서 시도하였다. 유교의 길례, 불교의 각종 도량(道場)과 불경의 강경회(講經會), 도교의 초제(醮祭), 성황신사(城隍神祠)에 대한 제사, 산천신 등에 대해 위호(位號)를 더해 주고 제사하는 것 등은 그러한 의도에서 나왔다.

고려는 이러한 기곡, 기양, 기복을 통해 왕조의 가장 큰 기반인 백성들의 안정과 풍요를 빌었다. 더불어 추수 감사제(秋收感謝祭)의 성격을 갖는 축제가 마련되었다. 팔관회(八關會)는 본래 추수 감사제이자 제천 행사인 고구려의 시월 동맹(東盟)과 산천용신제(山川龍神祭)의 성격을 가졌던 신라의 팔관회를 계승한 것이었다. 그것은 부처를 공양하고 신을 즐겁게 하는 모임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개경에서는 신라 이래 태봉에서도 지속되었던 팔관회를 11월 중동(仲冬)에 열어 천령(天靈), 오악(五嶽), 명산대천(名山大川), 용신(龍神)을 섬기고 국왕의 ‘성수만년(聖壽萬年)’을 빌었다. 서경에서 10월에 팔관회를 열었던 것이 이를 보여 준다.

팔관회와 함께 가장 중요한 국가 행사라 할 연등회(燃燈會)는 정월의 상원(上元) 혹은 2월 보름에 올려져 부처에게 연등을 켜 복을 비는 것이었다. 고종대 이후에는 4월 8일에도 연등회가 열려졌다. 신라의 경우에도 연등회는 정월 상원에서 보이듯 용신에 대한 시농기원제적(始農祈願祭的) 성격이 있었고, 숙종 때에도 연등회 때 천지신명을 모시기도 하였다. 고려 연등회 역시 풍년을 기원하여 국가의 복을 비는 성격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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