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7권 농업과 농민, 천하대본의 길
  • 제2장 고려시대 농업 기술 및 농민 생활, 국가 주도 권농 정책
  • 3. 농민의 생활과 권농 정책
  • 다사다난한 농민층의 생활
한정수

고려시대 농민들은 대략 어느 정도 규모의 토지를 소유하였고, 또 그 토지로 자립 생활이 가능하였을까? 그리고 이들은 하루 어느 정도의 식량을 소비하였을까? 또 그들의 생활은 어떠하였을까?

먼저 토지 소유 규모를 보자. 고려시대에는 일반 농민층이라 할 백정농민(白丁農民)에 대해 직역 징발(職役徵發)이 되는 경우 평전(平田) 1결 정도를 지급하였다.208)『고려사』 권81, 병지(兵志)1, 병제(兵制), 의종 3년 8월. 그리고 1279년(충렬왕 5) 6월 원나라에 대한 조빙(朝聘)을 위한 교통로를 마련하면서 이리간(伊里干)을 설치하였는데, 이때 각 도에서 부민(富民) 200호를 옮겨가 살게 하면서 호마다 농우(農牛) 두 마리, 암소 세 마리, 양계(兩界)의 망정(亡丁), 투화정(投化丁), 전 4결 등을 사민(徙民)에 대가로 지급하였다.209)『고려사』 권82, 병지2, 참역(站驛), 충렬왕 5년 6월. 당시 웬만한 농민이 소를 소유하지 못하던 상황임을 고려하면 소를 모두 다섯 마리나 준 것은 매우 많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두 사례를 놓고 보면 고려시대 농민의 토지 소유 규모는 대략 1결에서 4결 정도가 나온다.210)김기섭은 고려 전기 표준 자립 농가의 규모를 성인 1인당 하루 식량 소비량을 1인당 1승을 기준으로 계산하여 휴한하는 중등전 3∼4결을 소유한 5인 가족의 농가로 설정한 바 있다(김기섭, 「고려 전기 농민의 토지 소유와 전시과의 성격」, 『한국사론』 17, 서울 대학교 국사학과, 1987). 위은숙은 1구당 약 2승을 하루의 식량으로 잡으면서 성인 두 명과 소인 세 명으로 구성된 5인 가족이 1년간 필요한 식량은 16.8석이며, 고려 후기의 1결당 생산량은 20석이고 이에 따라 5인 가족의 자립 재생산 가능선은 1결이었다고 보았다. 고려 전기에는 연작을 전제로 최소한 중등전 수전 1결과 한전 2결 즉 3결 정도를 소유해야 한다고 하면서 정상적 성인을 기준으로 할 경우 중등 수전만 3∼4결을 소유하였다고 한 바 있다(위은숙, 『고려 후기 농업 경제 연구』, 혜안, 1998). 물론 여기에다 축력으로 쓰는 농우의 소유 정도, 망정과 투화정 등으로 표현되는 노동력도 있었겠으나 아무래도 빈부의 차이에 따라 차이는 있었을 것이다.

고려 후기의 1인당 식량 소비량을 계산하려면 1274년(원종 15) 2월 원종이 원나라 중서성에 선박 건조를 위해 동원한 장인과 인부에게 3개월 동안 지급한 식량을 보고한 내용은 좋은 자료가 된다. 당시 동원한 장인과 인부는 모두 3만 500명이었고 1인당 하루 세끼 식량으로 세 달 동안 3만 4312석 5두가 들어갔다.211)『고려사』 권27, 세가27, 원종 15년 2월 갑자. 이 기록에 따르면 1인당 하루 식량은 약 1.88승이 된다. 물론 이는 장인, 인부 등 성인을 기준으로 한 것이지만 일반 농민층도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규모로 존재하던 농민층은 대체로 바쁜 일상생활을 보냈다. 농사일에다가 부역 및 공역(貢役)을 담당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김극기는 ‘전가사시’에서 농민들의 일상생활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세월은 바람 앞에 펄럭이는 촛불 같아 / 歲月風轉燭

농가에서 바쁜 것이 괴로워라 / 田家苦知促

새끼 꼬아 지붕 덮은 것 어제 같은데 / 索綯如隔晨

어느 새 봄이 되어 밭 갈기 시작하네 / 春事起耕耨

따비를 메고 동쪽 들로 나가니 / 負耒歸東阜

숲 사이 길은 꼬불꼬불 돌았네 / 林間路詰曲

들새는 농사철을 알려주는데 / 野鳥記農候

날고 울어 씨뿌리기 재촉하네 / 飛鳴催播穀

밥 나르는 아낙네 밭머리에 나오는데 / 饁婦繞田頭

짚신은 헐어서 겨우 발에 걸렸구나 / 芒鞋才受足

어린애는 나물과 고사리 찾아 / 稚子尋筍蕨

바구니 들고 양지쪽 산골로 향하네 / 提筐向暄谷

해는 긴데 살구꽃은 붉었고 / 遲日杏花紅

바람은 따뜻한데 창포 잎은 푸르렀네 / 暖風舊葉綠

단비도 또한 시기 맞추어 / 甘雨亦如期

간밤에는 흐뭇이 고루 적셨네 / 夜來勻霡霂

봄 농사일 괴롭다고 꺼리지 마라 / 莫辭東作勤

노력하기는 오직 내 힘에 있네 / 勞力在吾力

붉은 구름은 수정빛을 쏘고 / 彤雲射晶光

붉은 해는 길대로 길어졌네 / 赤日淹晷度

농사집에는 한여름철 가까우니 / 田居近南訛

일하기에 새벽과 밤이 없네 / 榾榾無曉暮

농부들은 다투어 호미를 메고 / 農夫爭荷鋤

온 들에 구름처럼 깔려 있네 / 徧野已雲布

오직 집을 지키는 늙은이 있어 / 唯有看屋翁

머리털은 백로보다 더 희네 / 頂絲白於鷺

손이 오자 상을 내오는데 / 客來方進饌

구차하니 맛난 찬 바랄 수 없거니 / 窮不待珍貝

들에서 딴 과실과 밭의 푸성귀들 / 野果與園蔬

그것은 모두 친히 가꾼 것이네 / 皆由親種樹

손님 떠나자 남은 상을 설거지할 때 / 客去收殘尊

어린애 할멈에게 매달리네 / 嬌兒帶老姥

그릇 덜거덕 소리는 저녁 바람을 타고 / 器聲逐晩風

옆집까지 울리어 오네 / 吹落西家去

이웃 늙은이 남은 술 생각하고 / 隣翁念餘瀝

오솔길 저녁 안개 뚫으며 오네 / 一徑穿夕霧

어느새 기러기는 펄펄 날고 / 鴻雁已肅肅

쓰르라미는 이내 쓰르람 울어 대고 / 蟪蛄仍啾啾

농부는 시절을 알고 쑥대 베어 / 田夫知時節

비로소 가을 알리네 / 銍艾始報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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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 이웃에 차가운 절구 소리 / 四隣動寒杵

그 소리 저녁내 쉴 줄 모르누나 / 通夕聲未休

새벽에 일어나 옥 같은 쌀로 밥 지으니 / 晨興炊玉粒

구수한 김이 넘치네 / 溢甑氣浮浮

자줏빛 밤은 누른 잎 사이에서 떨어지고 / 紫栗落紅樹

붉은 비늘은 푸른 물에서 낚네 / 朱鱗鉤碧流

흰 병에 술을 따라 / 白甁酌杜酒

손을 맞아 서로서로 주고받나니 / 邀客更相酬

겉모양 비록 추하고 초솔하나 / 外貌雖陋促

마음속 정은 은근하네 / 中情尙綢繆

술이 다해 일어나 전송하러 나선 / 酒闌起相送

얼굴빛은 도리어 온 시름에 잠기네 / 顔色還百憂

관청 납세 독촉이 성화같거니 / 官租急星火

집안 식구 모아 미리 준비하네 / 聚室須預謀

진실로 공납은 바쳐야 하겠거니 / 苟可趁公費

어찌 사삿집에 남겨 둘 것 있으랴 / 私廬安肯留

어느 때에나 탁무(卓茂) 노공(魯恭) 같은 수령을 만나 / 何時得卓魯

도리어 맨 먼저 바쳐볼꼬 / 却作差科頭

대숲 길을 시내 좇아 열렸고 / 竹徑趁溪開

초가집은 언덕을 의지해 섰네 / 茅廬依崦結

한겨울에 북쪽 봉창 흙으로 막는 것은 / 窮冬墐北戶堇

바람과 눈을 막고자 함이려니 / 意欲防風雪

그래도 추위를 겁내지 않고 / 尙能知傲寒

매와 개를 데리고 사냥 나가네 / 鷹犬出遊獵

여우와 토끼를 쫓아 달릴 때 / 馳騁狐兔場

짧은 옷에는 흐르는 피 묻었네 / 短衣涴流血

집에 돌아오자 온 이웃이 기뻐하고 / 還家四隣喜

모여 앉아 실컷 먹네 / 促坐爭哺啜

날고기 먹는 것 무엇이 이상하랴 / 茹毛何足怪

거처하는 곳이 큰 둥우리와 굴이거니 / 居處壯巢穴

마른 석장이에 불을 붙이니 / 晶熒枯櫱火

온 방이 어두웠다 밝았다 하네 / 滿室互明滅

두 다리 사이에 온돌방에 깔아 말리는 붉은 팥이 어지러우니 / 兩股亂赬豆

옷깃과 옷자락 그 따라 찢어지네 / 襟裾從破裂

베 이불에 뭇 아이들 끼고 누우니 / 布衾擁衆兒

궁하기가 새끼 거느린 오리와도 같아라 / 窮若將雛鴨

한밤이 다하도록 잠들지 못해 / 竟夜眼不得

농사 이야기로 새벽에 이르렀네 / 農談逮明發

하지만 고려시대 농민들은 이처럼 평온한 일상을 보낼 수 없었다. 대략 1결 내외의 토지를 소유한 일반 농민들은 경제적인 면에서 매우 불안한 상태였다. 고려시대 농민층이 불안할 수밖에 없던 요소는 경제적·인신적(人身的) 수탈과 자연재해에 있었다. 여기서의 경제적·인신적 수탈은 고려 왕조가 갖고 있는 구조적 문제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즉, 지방 향리로부터 왕실에 이르기까지 지배층의 성격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이러한 지배층을 어떻게 조정하고 견제할 수 있을 것인가가 왕조의 흥망과 관계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국왕은 여러 가지 정책과 행정 감찰 기구 등을 설치 운영하여 이를 해결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대개 정치적 혼란에 빠져 있던 시기에는 수탈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웠다. 수탈의 가중은 농민의 생존과 직결되었기 때문에 생활 방도를 다각도로 찾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농민의 어려움과 불안은 조세의 납부 저항으로부터 품팔이나 유망(流亡)으로까지 이어졌다. 심지어 자식을 팔거나 노비가 되어 연명하고자 하는 민도 있었다. 다음 사례는 이를 말해 준다.

전주(前主)가 백성 보기를 지푸라기와 같이 하고 오직 사욕만을 쫓던 바 이에 참서(讖書)를 믿어 갑자기 송악(松岳)을 버리고 부양(斧壤)에 돌아가 궁궐을 세우니 백성은 노역에 피곤하고 삼시(三時)의 농업은 때를 잃었다. 게다가 기근이 잇따르고 질병이 뒤이으니 집을 버리고 흩어져 길 위에서 굶어 죽는 자가 서로 잇닿게 되었으며 한 필의 세포(細布)가 미(米) 5승 값이었다. 이리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몸을 팔고 자식을 팔아 남의 노비가 되게 하였으니 짐이 매우 민망하게 생각하는 터이다.212)『고려사』 권1, 세가1, 태조 원년 8월.

이 기사는 918년(태조 1) 8월의 조서(詔書)에 나오는 내용인데, 궁예 정권의 실정으로 말미암아 백성들의 삶이 곤궁해지고 피폐해졌다는 것을 보여 준다. 또한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까지 겹쳐 생업을 포기하는 지경에까 지 이르렀음을 말하고 있다. 사실 이 같은 문제가 일어난 까닭이 국왕의 실정에만 있지는 않았다. 권세가와 귀족이 자행하기도 하였다. 다음에 인용한 1128년(인종 6) 3월의 조서를 보면 지방 수령이 축재(蓄財)와 탐리(貪利) 행위를 일삼아 백성들이 궁핍해지고 도적이 되기도 한다고 하였다.

지금 각 고을의 원(員)이 백성의 재물을 빼앗는 것만 이익으로 아는 자가 많고 근면하고 검소하며 백성들을 무마하는 자는 드무니 창고는 비고 백성들은 궁핍해지는데 거기에다 부역까지 들씌우니 백성들이 손발을 놀릴 수 없게 되었다. 여기서 백성들은 일어나 떼를 지어 도적이 된다. 이는 나라를 부강케 하며 백성을 평안하게 하려는 뜻과는 아주 딴판인 것이다. 그러니 고을에 지시하여 쓸 데 없고 바쁘지 않은 일은 중지하거나 그만두게 하여 백성들을 평안하고 부유하게 살도록 하여 나의 간절한 심정에 맞추도록 할 것이다.213)『고려사』 권79, 지33, 식화2, 농상, 인종 6년 3월.

지방관과 아전들이 행한 이러한 행위는 규제하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 고려 말 권신(權臣)인 염흥방(廉興邦, ?∼1388)을 양아버지로 섬겼던 배원룡(裴元龍)은 자기 집을 그에게 증여하고 계림부윤(鷄林府尹)이 된 다음 백성을 침탈하여 심지어 쇠갈퀴까지 집으로 실어 가자 백성들이 ‘철문어부윤(鐵文魚府尹)’이라 비난할 정도였다.214)『고려사』 권126, 열전39, 간신(奸臣) 염흥방(廉興邦). 따라서 백성들은 간활(奸猾)한 지방관과 아전, 그리고 지방의 토착 세력이 결탁하여 수탈하고자 할 때 거의 무방비 상태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들은 전 재산이나 마찬가지인 토지를 담보로 양식과 돈을 빌리게 되고, 그 이자를 갚지 못하면 마침내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각지의 부강한 양반들이 빈약한 백성들에게 긴 기간으로 꾸어 주고 그들이 아직 갚지 않았다고 하여 예로부터 전해 오는 정전(丁田)을 강제로 빼 앗으니 이로 인하여 빈민들이 생업을 잃고 더욱더 가난해진다. 부호(富豪)로 하여금 토지를 몰아 차지하고 백성들을 착취하지 못하게 하며 그들이 빼앗은 정전은 각각 본래 임자에게 돌려주도록 할 것이다.215)『고려사』 권79, 지33, 식화2, 차대(借貸), 명종 18년 3월.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는 데는 국가의 수취 구조가 안정되지 못한 데에도 원인이 있었다. 고려 왕조에서 가장 큰 재정 수입은 조세였고, 그것은 대부분 농민층과 토지에서 나왔다. 국가는 일정한 조세 수입을 계산하고 그에 따라 지출을 정하는 것이 원칙적인 재정 회계였다. 하지만 왕조 사회에서는 이 원칙을 여러 가지 이유로 자주 파기하곤 하였다. 특히 고려와 몽고 간의 전쟁이 마무리되고 원나라의 간섭을 받는 시기에 들어가면서 고려의 국가 재정은 더욱 흔들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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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습래회사』 중의 고려 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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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원인으로는 30년간 지속된 여몽(麗蒙) 전쟁으로 인한 피해와 복구비, 원나라의 일본 원정 비용을 담당해야 하는 현실, 국왕의 원나라 황실 입조(入朝)와 연경(燕京) 체류에 드는 비용 증가, 불법적 대토지 겸병(兼倂)의 증가, 각종 조세 징수의 독촉 등이 있었다. 이러한 재정 상황에서 대토지 겸병은 여러 계층에 의해 이루어졌다. 충렬왕의 내방고(內房庫)나216)『고려사』 권79, 지33, 식화2, 과렴(過斂), 충렬왕 15년 3월. 충혜왕대의 보흥고(寶興庫),217)『고려사』 권79, 지33, 식화2, 과렴, 충혜왕 4년 3월. 왕실의 종친(宗親)과 재추(宰樞)를 비롯한 관료, 원나라에 해동청(海東靑)을 진상(進上)하기 위해 설치한 응방(鷹坊) 세력, 고려에 시집온 원나라 공주를 수행한 겁령구(怯怜口)와 환관(宦官), 사심관(事審官), 권호(權豪)·권귀(權貴)·권세지가(權勢之家)로 불리는 계층이 바로 그들이었다.218)위은숙, 「Ⅱ. 경제 구조의 변화」, 『한국사 19』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국사 편찬 위원회, 1996 ; 이정호, 『고려시대 권농 정책 연구』, 고려 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2002 참조. 특히 원나라 황실의 간섭을 받았던 고려 후기 국왕은 원나라의 수도 연경에 들어가 황제를 친히 배알하여야 했다. 또 자의든 타의든 국왕 스스로 연경에 오랫동안 체류하기도 하였다. 여기에 들어가는 비용은 전적으로 고려의 국가 재정에서 충당하였다.

이들의 토지 겸병은 국왕으로부터 개간 목적으로 받는 사패(賜牌)의 모칭(冒稱), 토지 문서 조작, ‘수정목공문(水精木公文)’과 같이 남의 토지에 대한 강제 탈점 등의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과중한 수취에 시달린 전민들은 농토를 매매하거나 고리대(高利貸)를 써야 했다. 이는 달리 말하면 토지의 매득(買得)과 장리(長利)를 통해 토지를 집적하는 세력이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물론 여기에는 개간을 통해 토지 소유를 넓혀 가는 경우도 있었다. 국가에서는 전쟁으로 황폐화된 곳을 주 대상으로 하여 개간을 장려하면서 소유권 및 수조권(收租權)까지 인정하기도 하였다. 또 경작이 불가능하던 곳도 개간하면서 이러한 개간을 주도한 권세가들에 의해 농장화(農莊化)되었다.

이로 인해 고려 말 전제(田制) 개혁 상소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한 토지의 전주(田主)는 대여섯 명에 달하고 이에 따라 1년에 대여섯 차례씩 수조가 이루어졌다.219)『고려사』 권78, 지32, 식화1, 전제(田制), 녹과전(祿科田), 신우 14년 7월. 또한 간사하고 흉악한 무리들이 주군(州郡)을 넘어 산천을 표식으로 삼을 정도로 대농장은 확대되었다.220)『고려사』 권78, 지32, 식화1, 전제, 녹과전, 신우 14년 7월. 농민들은 전토와 집을 팔아야 했고 유리걸식(遊離乞食)하게 될 형편이 되자 과중한 세금과 인신적 수탈을 피하기 위해 아예 권세가나 사원 등에 전토를 맡기고 경작을 하거나 스 스로 노비가 되는 경우도 늘어났다. 이와 더불어 강제로 양인(良人)을 노비로 만들거나 남의 노비를 억지로 빼앗는 경우도 많았다. 예컨대 충렬왕의 폐행(嬖幸)이던 이영주(李英柱)나 전영보(全英甫) 등은 양인을 압량(壓良)하여 노비로 삼았고,221)『고려사』 권123, 열전36, 폐행(嬖幸)1, 이영주(李英柱) ; 『고려사』 권124, 열전37, 폐행2, 전영보(全英甫). 광평공(廣平公) 혜(譓)가 낭장 왕연(王涓)에게 노비를 빼앗은 것을 제국 대장 공주(齊國大長公主)가 다시 빼앗으니 모두 300명이나 되었다.222)『고려사』 권89, 열전2, 후비(后妃)2, 제국 대장 공주(齊國大長公主).

이처럼 고려 후기 토지 겸병으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농민층이 감당하여야 했다. 농민들은 권세가와 그 가노(家奴)들이 백성을 괴롭히고 조세를 거두어 가는 행태를 풍자하는 광대놀이(優戲)를 하며 세태를 풍자(諷刺)하고 자신들의 처지를 비관하기도 하였다.223)『고려사』 권126, 열전39, 간신, 염흥방. 고려 말 윤여형(尹汝衡)이 지은 한시 ‘도톨밤 노래(橡栗歌)’는 이러한 비참한 현실을 잘 그려 내고 있다.

도톨밤 도톨밤 밤이 밤 아니거늘 / 橡栗橡栗栗非栗

누가 도톨밤이라 이름 지었는고 / 誰以橡栗爲之名

……

내 촌집에 들려 늙은 농부에게 물으니 / 試向村家問老農

늙은 농부 자세히 나보고 얘기한다 / 老農丁寧爲予說

요사이 세력 있는 사람들 백성의 토지를 빼앗아 / 近來權勢奪民田

산이며 내로써 한계 지어 공문서 만들었소 / 標以山川作公案

혹은 토지에 주인이 많아서 / 或於一田田主多

도조를 받은 뒤 또 받아 가기 쉴 새 없소 / 徵後還徵無間斷

혹은 수한(水旱)을 당하여 흉작일 때에는 / 或於水旱年不登

해묵은 타작마당엔 풀만 엉성하다 / 場圃年深草蕭索

살을 긁고 뼈를 쳐도 아무 것도 없으니 / 剝膚槌髓掃地空

국가의 조세는 어떻게 낼꼬 / 官家租稅奚由出

몇 천 명 장정은 흩어져 나가고 / 壯者散之知幾千

노약만 남아서 거꾸로 달린 종처럼 빈집을 지키누나 / 老弱獨守懸磬室

차마 몸을 시궁창에 박고 죽을 수 없어 / 未忍將身轉溝壑

마을을 비우고 산에 올라 도토리며 밤이며 줍는다고 / 空巷登山拾橡栗

그 말이 처량하여 간략해도 자세해 / 其言悽惋略而盡

듣고 나니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아라 / 聽終辭絶心如噎

그대 보지 않았나, 고관 집 하루 먹는 것이 만 전어치 / 君不見侯家一日食萬錢

맛있는 음식이 별처럼 벌여 있고 다섯 솥이 널려 있지 / 珍羞星羅五鼎列

하인도 술 취하여 수레 위 비단 요에 토하고 / 馭吏沈酒吐錦茵

말은 배불러 금마판(金馬板)에서 소리치네 / 肥馬厭穀鳴金埒

그들이 어찌 알기나 하랴 그 좋은 음식들이 / 焉知彼美盤上餐

모두 다 촌 늙은이 눈 밑의 피인 줄을 / 盡是村翁眼底血

고려시대에는 이러한 농가 생활 속에서 국가가 권장하는 권농 및 나름대로의 농법 개발과 역전(力田)을 통하여 큰 부를 쌓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예가 명종대 소감(少監) 왕원지(王元之)의 노비의 남편인 평량(平亮)이다.224)『고려사』 권20, 세가20, 명종 18년 5월 계축. 평량은 평장사 김영관(金永寬)의 가노이기도 하였는데, 그는 견주(見州)에 살면서 농사를 열심히 지어 부를 이루었다. 이후 뇌물을 주고 면천(免賤)한 뒤 산원동정직(散員同正職)까지 얻었다고 한다. 1279년(충렬왕 5) 원나라에 대한 조빙을 위한 교통로를 마련하면서 설치된 이리간에 옮겨 살게 된 각 도 부민(富民) 200호 역시 이와 같이 농사를 열심히 지어 부농층이 된 이들이었다.225)『고려사』 권82, 병지2, 참역, 충렬왕 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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