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7권 농업과 농민, 천하대본의 길
  • 제2장 고려시대 농업 기술 및 농민 생활, 국가 주도 권농 정책
  • 3. 농민의 생활과 권농 정책
  • 농상의 권면과 진휼
한정수

태조는 즉위한 뒤 농업과 농민의 안정을 위하여 ‘경요박부(輕徭薄賦)’를 통한 ‘취민유도(取民有度)’의 정책을 취함과 동시에 농상을 권장할 것을 밝힌 바 있다. 태조가 밝힌 이러한 인식은 농업 생산과 농민이 곧 정치의 근본이 된다는 데에서 나왔다. 그것이 이후 중농 이념의 내용으로 농업 정책을 전개하는 방향의 지침이 되었다. 하지만 태조대에는 권과농상(勸課農桑) 의 구체적 내용은 제시되지 않고, 다만 군주가 농업에 대한 이해를 제고하기 위하여 몸소 농사의 어려움을 체득하기를 요구하였다. 태조는 “궁예의 취렴(聚斂)이 과도하여 백성들이 밭 갈고 베 짜는 일을 할 수 없어 유망하는 일이 많아졌다.”243)『고려사』 권78, 지32, 식화1, 전제, 조세(租稅).고 하여 비판하는 가운데 남경여직(男耕女織)을 기본으로 하는 농업의 분업적인 생산 구조를 염두에 두었다. 태조의 이러한 인식이 있은 뒤 고려 왕조에서는 기본적인 권농 정책의 방향을 중농에 입각한 무본역농(務本力農)·역전(力田)의 방향으로 전개하였다.

이 같은 방향에서 전개된 권농 관련 정책을 유형화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주군의 병기를 거두어 농기구를 만든 것, 곡식 종자를 나누어 주는 것, 농기구 및 관우(官牛)를 내려 준 것, 제언(堤堰)을 수리토록 한 것 등에서 알 수 있듯이 농업 생산에 소요되는 종자, 농기구, 경우(耕牛), 저수 관개 등을 갖춤으로써 농업 생산에 필요한 제반 여건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둘째, 농사의 때를 지켜 백성을 역역에 동원토록 하여 농민들이 힘써 농사에 전념할 것을 국가적·지방적 차원에서 장려하려 하였다.

셋째, 이와 함께 직접 농상을 장려하는 구체적인 조치를 취하여 뽕나무 묘를 심어 누에치기에 이바지하도록 하고, 뽕나무·밤나무·옻나무·닥나무를 심어 지력이 떨어지는 땅을 이용하도록 하였다.

넷째, 권농에 있어 가장 중요하다 할 농본·무본의 중농 이념을 권농 정책의 실현 주체인 지방관 등에게 제시함으로써 무본의 이해와 노력이 농업 생산에 매우 중요함을 깨닫도록 하였다.

다섯째, 비록 중국 양잠서(養蠶書)의 수입과 그에 대한 방언(方言) 해석으로 나온 경우이긴 하지만 농서(農書)를 편찬하고 보급하였다.

여섯째, 『고려사』에서는 신전(新田)의 개간 장려와 같은 성격의 정책은 보이지 않지만 둔전(屯田)의 운영을 통해 개간을 도모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지방관의 권농 활동 기록이 12세기로 들어가면서 늘어나고 있고, 권농 내용도 불을 놓은 뒤 물을 대어 개간하는 화경수누(火耕水耨)의 방법을 이용한 신전 개간, 제언 축조, 수로 개설 등을 볼 수 있다. 더욱이 12세기 중엽으로 가면서 개간 방향이 저습지(低濕地)나 해택지(海澤地)로 확대됨을 확인할 수 있다.

인종 때 지수주(知樹州)를 지낸 장문위(張文緯)는 수주(지금의 인천광역시 부평구 일대)의 백성들을 위해 주의 동쪽 교외에 2,500여 보의 땅을 파 물의 흐름을 고르게 하여 수해를 방지하여 저습지를 개발하였다. 의종 때 명주(溟州) 지방관을 지낸 임민비(林民庇)나 홍주(洪州) 지방관인 이문저(李文著) 역시 도랑을 준설하여 관개할 수 있도록 하였다. 영광군(靈光郡)의 수령 오원경(吳元卿)은 방조제를 수축하여 논밭을 비옥하게 만들었으며, 1187년(명종 17) 제안서기(齊安書記)를 지낸 최보순(崔甫淳)은 우거진 풀숲을 불사른 뒤 메말랐던 땅에 물을 대게 하는 방법으로 황무지를 개간하였다. 최보순은 1205년(희종 1) 안남대도호부사(安南大都護府事)가 되어서 뚝을 높게 쌓고 고랑을 터 수재를 제거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제언 및 방조제 축조를 통한 농경지 개발은 충렬왕대에도 계속 이어졌다. 당시 고려 최고의 장군으로 일컬어진 김방경(金方慶)은 위도(葦島)에서 방조제를 수축하였고, 제포(梯浦)·초포(草浦) 등에서 역시 방조제를 수축하여 둔전을 개발하였다.244)위은숙, 「12세기 농업 기술의 발달」, 『부대 사학』 12, 부산 대학교 사학회, 1988 ; 위은숙, 『고려 후기 농업 경제 연구』, 혜안, 1998, 111∼118쪽.

『고려사』에 나타나는 권농 정책의 경향 가운데 하나는 농민이나 지방관 등에게 무본역농을 권장하고 있지만 신전·황전의 개간을 위한 면이 적다는 점이다. 그것은 새로운 경지의 개간 과정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며, 또 이를 곡물을 재배하기 적당한 땅으로 바꾸는 치전(治田)·숙전(熟田)하는 과정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었다. 또한 당시 개간 방법은 불을 놓아 잡풀 및 잡목을 제거하는 화경(火耕)을 통하여 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이는 대규모 화재의 발생이나 산과 들을 불태움으로 해서 고려인들이 생각하는 음양 조화(陰陽調和)의 생기(生氣)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이해에 의해 금지된 측면이 많았다. 따라서 농민 개개인에 의해서는 이루어지기 힘든 면이 있었으나 시지(柴地)를 이용한 토지 개발이나 산전(山田) 등의 개발 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245)홍순권은 전시과가 지급되는 속에 시지의 경우 개발 가능한 토지로 보고 있기도 하다(홍순권, 「고려시대의 시지에 관한 고찰」, 『진단학보』 64, 진단학회, 1987).

신전의 개발은 많은 노동력을 일시에 동원하고 토지를 관리할 수 있는 정부가 주도하였는데, 둔전군(屯田軍)을 이용하거나 지방관 주도로 개간 사업을 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12세기 중엽으로 가면서 수리 시설을 수축하거나 도랑을 파서 관개하는 경향이 많아졌다. 해택지나 저습지 개발과 연결되는 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경향이 많아진 이유는 산전 개발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하였다는 점과 수전 개발 경향의 확대라는 점 등 때문이었다.

농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고려하는 정치를 행할 것을 지시하는 유형은 이미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왕조 국가에서는 기본적인 농업 정책이었다. 태조의 훈요 10조에 언급된 “백성을 부리는 데 때에 맞추어 하라.”,246)『고려사』 권2, 세가2, 태조 26년 4월 계묘. 986년(성종 5) “삼농의 힘씀을 빼앗지 말라.”고 한 것, 1034년(덕종 3) “삼시(三時)를 빼앗음이 없도록 할 것”,247)『고려사』 권79, 지33, 식화, 농상, 덕종 3년 3월. 947년(정종 2) “백성을 부리는 데 때에 맞지 않으니 농사에 방해가 된다.”고248)『고려사』 권79, 지33, 식화, 농상, 정종 2년 정월. 한 것 등은 이를 말해 준다.

이처럼 농시를 중요하게 여기고 월령(月令) 즉 시령(時令)을 통하여 중앙과 지방에서 이를 유의하면서 봉행 6조(奉行六條)249)봉행 6조(奉行六條)는 무체옥송(無滯獄訟), 무실창름(懋實倉廩), 진휼궁민(賑恤窮民), 권과농상(勸課農桑), 경요박부(輕徭薄賦), 처사공평(處事公平)이다.나 시무(時務) 등에 힘쓰도록 한 것은 결국 농민들이 때에 맞춰 해야 할 일과, 이에 따라 지방관과 중앙에서 해야 하는 것을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농업 생산 구조를 안정시키려 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지방관이 임지(任地)에서 행하여야 할 임무는 성종대의 6사와 시령의 준수를 주 내용으로 하면서 그 중 백성의 안집(安集)과 진전(陳田)의 경작이 중요시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를 위해 지방관에 대한 권농사(勸農使)의 겸대(兼帶)를 지시하여 그 수행을 더욱 철저히 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려시대 권농 정책은 나름대로의 특징과 한계를 갖고 있었다. 그 특징을 보면, 농기구·농우·종자 등을 대여함으로써 농업 생산 조건을 갖추도록 하고, 농지의 기경과 파종 시기에 적극 유의하여 무리한 공역을 피하도록 하면서 지방관의 권농적 역할을 강조하였다. 곧, 농업 생산의 안정 기반과 농시의 중요성 인식, 백성으로 하여금 힘써 농사를 짓도록 하는 것이었다. 한계점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으로는, 구체적인 농법과 농서와 관련한 다양한 정책적 제시가 없다는 것, 농민을 상대로 신전 개간을 적극 권장하지 않았다는 점,250)채웅석은 고려 왕조에서 신전의 개간을 적극 장려하지 않은 데에는 진전이 발생하면서 국가가 파악하기 어려운 새로운 경지가 개발되면 부세 수취나 수조권적 지배에 어려움이 생기기 때문이라 하였다. 또한 산전 등 신전의 개간이 지속되는 추세가 확대되자 은루(隱漏)된 경지를 파악하고 수취 강화를 시도하였는데, 양전을 통한 파악과 문종대 무렵부터 지방관이 권농사의 직책을 겸대한 것은 이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보았다(채웅석, 『고려시대의 국가와 지방 사회』, 서울 대학교 출판부, 2000, 208∼210쪽). 새로운 제언 등의 수축과 관련한 적극적 정책이 12세기를 전후해서야 많이 보인다는 점 등이다.

이렇게 본다면 권농 정책의 기본적 성격은 농민이 영농(營農) 기반을 갖추도록 하면서 농시를 국가적으로 적극 보장하여 농업생산 구조를 안정화하는 데 있었다. 고려 시기 권농 정책은 이처럼 최대한 농민 생활을 안정시켜 농민 유망을 막고 새로운 토지 개간보다 시기전(時起田)을 최대한 이용하면서 진전의 발생을 막는 데 주력하였던 것이다. 정책적으로 새로운 토지의 개간을 장려하지 않았지만 농민들의 경우 개발 가능한 산전의 개간에 노력하였던 것은 고려 왕조의 권농 정책의 방향과 일정한 차이를 보여 주는 농민층의 자구적 노력이었다고 여겨진다. 물론 경제 외적 수탈에 의해 농민들이 불안해 하고 그들 소유의 토지를 빼앗기지 않도록 여러 가지 노력도 기울였다.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여러 차례 설치하여 토지 소유 및 형성 과정의 불법성을 찾아내 이를 원주인에게 돌려주거나 노비들에 대한 추쇄를 계속적으로 단행하였던 것도 같은 차원이었다.

한편 고려시대에는 대표적인 농업 기상 재해인 수(水)·한(旱)·충(蟲)·상(霜) 등에 따라 농지가 유실되거나 수확이 줄어 경작자들이 생계를 꾸리기 힘들어질 때 이를 구체적으로 파악한 다음 재정 정책에 반영하여 피해 지역에 대한 적절한 조치 즉 조세 감면 등의 정책을 펴나갔다. 예컨대 1057년(문종 4) 11월 판(判)을 보면, 토지 1결의 수확을 10분으로 하여 피해액이 10분의 4 이상이 되면 조·포·역 등에 대한 감면을 취하였다.251)『고려사』 권78, 지32, 식화1, 답험손실(踏驗損失), 문종 4년 11월.

이와 함께 실제 피해 상황을 파악하여 보고하는 체계도 갖추었다. 즉, 촌민 가운데 촌락 내의 행정을 맡은 것으로 보이는 촌장(村長) 혹은 촌정(村 正)인 촌전(村典)이 해당 토지의 피해 상황을 조사하여 수령에게 보고하고, 이에 응하여 수령이 직접 답험(踏驗)하여 호부(戶部)에 보고하면 호부가 삼사(三司)에 알리고, 삼사가 그 허실을 조사한 다음 안찰사(按察使)로 하여금 별원(別員)을 보내 실질적으로 내용을 파악하여 감면토록 하였다.252)『고려사』 권78, 지32, 식화1, 답험손실, 문종 4년 11월.

이러한 면은 진휼(賑恤) 정책에도 적용되었다. 진휼은 재해를 당하였거나 생계를 꾸리기 어려운 환과고독(鰥寡孤獨) 등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진휼 정책은 일시적으로 피해를 입은 농민층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농민의 보호와 향촌 사회의 안정을 꾀하면서 군주의 인정·덕정을 보여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농민 안정책 중 가장 선호되는 방식이었다.

진휼 정책은 크게 보면 『고려사』 찬자들이 분류하고 있듯이 은면(恩免), 재면(災免), 환과고독진대(鰥寡孤獨賑貸), 수한역려진대(水旱疫癘賑貸)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 가운데 재면과 수한역려진대는 그 성격이 겹치므로 결국 은면, 재면, 환과고독진대로 크게 분류할 수 있다.

은면의 대상을 고려 전기의 것을 대상으로 놓고 볼 때 즉위(5), 군주 및 왕태후 책봉(5), 태묘 제사(2), 순행(巡幸)(12), 전란(3), 팔관회(1), 불교 행사(1), 유리도망민 안착(1), 이유 불명(3) 등으로 집계되고 있다.253)괄호 안의 수치는 『고려사』 권80, 지34, 식화3, 진휼, 은면지제(恩免之制) 중 고려 전기에 해당하는 기사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순행에 따른 은면 조치가 가장 많다. 이것은 군주와 백성이 직접 만나는 자리를 가장 중요하게 여겨 군주의 덕을 펴고자 한 것을 말해 준다.

또한 재해로 파악되는 내용을 보면 홍수가 지는 것(大水), 전염병 같은 역질(疫疾)이 도는 것(疾疫), 오랫동안 가뭄이 지속되는 것(久旱), 곡식이 익지 않는 것(秋穀不登), 외적 침입, 황재(蝗災)·가뭄·서리·우박 등으로 곡식이 익지 않아 흉년이 드는 것(旱霜雨雹禾稼不登), 때에 맞지 않게 비가 내리는 것(時雨愆期) 등이 있다.254)『고려사』 권80, 지34, 식화3, 진휼 중 재면지제(災免之制), 환과고독진대지제(鰥寡孤獨賑貸之制), 수한역려진대지제(水旱疫癘賑貸之制)의 내용을 토대로 하였다. 이를 정리하면 수한충상역려전란지진(水旱蟲霜疫癘戰亂地震) 등이라 할 수 있다. 이때 펼친 진휼 정책의 조치 내용은 대체로 부채 견감, 조세·공물·역역(力役)의 감면, 사면(赦免), 환과고독을 구휼하고 늙은이들을 공양하는 것, 사신을 보내 창고를 열어 구휼하는 것, 파종할 종자와 식량을 지급하는 것 등이었다.

한편 이들 농민 안정책 등과 함께 주목되는 것은 향촌 사회의 안정을 위한 노력의 하나인 효제(孝悌)의 장려였다. 효제는 유교 이념 가운데서도 인륜의 근본이 되는 것으로 이에 대한 국가적 장려는 바로 향촌 사회의 교화와도 연결되었다.

농상을 권장함과 농시에 효제에 대한 장려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농업 정책의 기본 방향의 하나로 농업에 대한 유교적 정치 이념이라 할 효제역전(孝悌力田)을 구상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990년(성종 9) 9월 “국가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는 반드시 먼저 근본에 힘써야 하며 무본(務本)을 장려하는 데는 효가 가장 크다.”고255)『고려사』 권3, 세가3, 성종 9년 9월 병자. 강조한 점이다. 이러한 이해에 따라 당시 6도에 사신을 파견하여 효자(孝子)·순손(順孫)·의부(義婦)·절부(節婦) 등을 조사하였고, 조사 결과에 따라 이들을 포상(褒賞)하였다.256)『고려사』 권3, 세가3, 성종 9년 9월 병자. 이러한 무본으로서의 효제와 역전의 강조가 함께 이루어진 것은 이것을 정치의 근본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며, 이를 통하여 농촌 사회의 안정과 의식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의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 효제역전(孝悌力田)의 내용은 『한서(漢書)』 권4, 문제기(文帝紀), 문제 12년 3월의 기사에 “孝悌天下之大順也 力田爲生之本也.”라고 한 바와 같다. 이는 결국 인륜을 이루는 근본이 효에 있다는 것이며, 효제를 실천하는 자세가 곧 또 하나의 근본을 힘쓰는 일인 농사에 전념한다는 데서 출발한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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