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7권 농업과 농민, 천하대본의 길
  • 제2장 고려시대 농업 기술 및 농민 생활, 국가 주도 권농 정책
  • 4. 토지 이용의 확대와 농업 기술
  • 농상서 편찬 노력과 보급
한정수

고려는 농업 생산의 증진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고 많은 정책을 구상하고 실현하려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시대에는 왕조 차원에서 각지의 농업 기술과 농업 관련 기록을 수집하여 좀 더 선진적인 농 법을 보급하려 한 사례를 좀처럼 찾기 어렵다. 농서의 편찬이야말로 왕조의 무본역농의 노력을 보여 주는 상징물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고려 왕조에서도 농서를 편찬하여 이용하였을 가능성은 높다.

다수의 농서 또는 이에 관련된 서적을 수입하였다면 그것은 단순히 서고(書庫)에 보관해 두는 것이 아니라 실제 고려의 농업을 위해 연구하는 자료가 되고 농부들이 보고 이해할 수 있는 향언(鄕言)으로 번역되어야 했다. 임경화(林景和, 1103∼1159)의 묘지명(墓誌銘)에 나타난 기록은 이를 말해 준다. 경산부통판(京山府通判)을 지내고 경령전판관(景靈殿判官), 잡직서령(雜織署令) 등을 역임한 임경화가 송나라에서 편찬한 『손씨잠경(孫氏蠶經)』을 보고 이를 방언으로 해석하자, 조정에서 이 양잠서를 중외(中外)에 반포하였다.297)김용선, 『고려 묘지명 집성』, 1993, 「임경화 묘지명(林景和墓誌銘)」, “丁未年 春 通判京山府 政術著明 考績居一等 秩滿加景靈殿判官雜織署令都兵馬錄事大府注簿大府丞 是時孫氏蠶經 始行于世 然讀者 莫曉其意 公以方言釋之 奏取 朝旨頒諸中外 遂興養蠶之法.”

『손씨잠경』은 오대송초(五代宋初) 때의 사람인 손광헌(孫光憲)298)손광헌의 자는 맹문(孟文)이며 자호는 보광자(保光子)로 형남(荊南) 고총해나리(高總海那里)에서 벼슬하여 북송 초에 황주 자사(黃州刺使)가 되었다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하였다. 그의 저작으로는 이외에 『북몽쇄언(北蒙鎖言)』 20권 등이 있다. 그의 활동 무대는 대개 사천·호남·호북이었으며, 『잠서』는 이때 찬한 것으로 내용의 대부분은 이 지역의 양잠 상황을 서술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지역은 수원이 풍부하고 온난한 지역으로 양잠이 일찍 이루어졌다(華德公 編著, 『中國蠶桑書錄』, 農業出版社, 1990, 6쪽).이 찬한 『잠서(蠶書)』로 2권으로 된 전문 양잠서였다. 중국 호남과 호북 중심의 잠서인 『손씨잠경』을 이두(吏讀)로 번역한 목적이 직접 잠업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기술을 전수하는 데에 있었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잠서의 간행은 상당한 파급 효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그 효과를 인정하고 방언 혹은 향언으로 해석한 『손씨잠경』을 여러 군(郡)에 반포하도록 하여 이를 이용하게끔 한 것이다.

고려 왕조에서는 권농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방식으로 중국에서 수입된 농상서(農桑書)를 방언으로 해석하거나 인간(印刊)하였을 것이다. 그 대상으로서는 중국 농서 중 선종대의 구서(求書) 목록에서 들어 있는 『범승지서(氾勝之書)』와 농가류(農家流)의 서적, 그리고 『고려사』에 보이지는 않지만 가사협(賈思勰)의 『제민요술(齊民要術)』을 꼽을 수 있다. 또한 사시의 월령에 관심이 깊었던 고려 왕조에서 최식(崔寔)의 『사민월령(四民月令)』,299)『사민월령(四民月令)』 1권. 전한 말에 최식(崔寔)이 쓴 월령식 농서로 전한 시기의 유일한 종합 농서이다. 월령에 따라 사농공상의 생산과 생산 활동을 서술하였으며 주로 낙양(洛陽) 지역의 경제와 문화 생활을 반영하고 있다. 소농 경제 사회를 반영한 것이며 특히 『제민요술』에서 많이 인용되고 있다. 그러나 대략 북송대에 산실(散失)된 것으로 보인다(王毓瑚, 『中國農學書錄』, 明文書局印行, 1981). 한악(韓鄂)의 『사시찬요(四時纂要)』300)한악(韓鄂) 『사시찬요(四時纂要)』 5권. 9세기 말 10세기 초에 당나라의 한악이 저술한 것이다. 그러나 사서에는 어떠한 기록도 없다. 『사시찬요』는 여러 서적을 찬록한 것으로 월(月)로 나누어 농가의 각각의 해당 사항을 열거한 농가월령서이다. 등에도 관심을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 이를 감안한다면 농서의 방언 해석 노력을 통한 농업 기술의 전수는 매 우 활발하였을 것이다.

가령 앞서 본 한시 ‘전가사시’301)『동문선』 권9, 오언율시, 전가사시.에서 김극기는 각 계절마다 할 일을 목가적(牧歌的)으로 표현한 바 있다. 고려시대 중농 이념의 성립과 전개에 있어서 『예기』 「월령」이 갖는 의의나 사시의 농사일을 기록하여 때를 잃지 않도록 하려는 노력을 생각하면, 월령식(月令式) 농서의 존재나 이후 이러한 종류의 농서의 출현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302)『농가월령』과 『향약채취월령(鄕藥採取月令)』, 월령에 따른 형벌의 추이 등을 볼 때 그러하다.

고려에서는 농업 환경에 맞추어 농업 기술을 적용 발전시켜 나간 면도 있었다. 임경화가 『손씨잠경』을 방언으로 해석하여 번역할 수 있었던 것은 임경화 개인의 잠업에 대한 지식도 있었을 터이지만 실제 잠업을 하는 농민들의 이해를 바탕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즉, 방언 해석이 현실과 동떨어진 중국의 언어로만 이루어질 경우 그것은 현장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며, 실제로 『손씨잠경』의 방언 해석이 있은 뒤 각 지역에 보급하였다는 기록을 참고한다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농촌 사회에서는 생산력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이를 공유하면서 발전시켜 나갔다. 즉, 영농과 관련하여 농민들은 현재의 농업 상황이나 공동 작업을 해야 할 사항, 작물의 재배 현황, 재배 기술 등을 중심으로 정보를 공유하였다. 이는 김극기가 남긴 한시 중 ‘숙향촌(宿香村)’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즉, “농부들 각기 모여 방 안에 드니(耕夫各入室) 농사 얘기에 방 안이 왁자지껄 하구나(四壁農談諠) 웃고 떠드는 소리 고기 꿰듯 잇달았고(磎作魚貫) 제각기 지껄이니 새소리처럼 시끄럽다(咿喔紛鳥言)”303)『동문선』 권4, 오언고시, 숙향촌(宿香村).라고 읊어 산골 향촌의 그러한 광경을 묘사하였다. 또한 겨울에 이듬해의 농사를 계획하는 모습도 묘사되어 있는데, “한밤이 다하도록 잠들지 못해(竟夜眼不得) 농사 이야기로 새벽에 이르렀네(農談逮明發)”라고 한 부분에 나타난다. 이처럼 자연 촌락 단위에서도 자체적으로 농회(農會) 같은 것을 실시하고 이를 영농에 반영하고 있었다.

또한 이러한 상황에서 공동 노동, 즉 두레 같은 공동 작업도 실시되었 다. 예컨대 촌락 사회 내부에 있던 보(保)·계(契) 조직 등이 그러한 자치 조직의 기능을 하였다.304)김기섭, 앞의 글, 139쪽 ; 이종봉, 「고려 후기 권농 정책과 토지 개간」, 『부대 사학』 15·16, 부산 대학교 사학회, 1992, 325쪽. 이러한 공동 작업은 밭갈이, 파종, 제초, 수확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함께 하였을 것이라 추측된다. 이규보는 이 같은 상황을 “서로 이끌어 밭두렁에서 노래 부르니(相携唱田壟) 호미 메고 구름같이 모여드누나(荷鋤如雲圍) 힘써야지 창포며 살구 농사까지도(勉哉趁菖杏) 때맞춰 갈이하고 거두어들이기를(耕穫且莫違)”305)이규보, 『동국이상국집』 전집 권2, 고율시, 「유가군별업서교초당이수(遊家君別業西郊草堂二首)」.이라고 읊었다. 강희맹은 『금양잡록』에서 농업 관련 노래 구절을 소개하였는데, 신라의 곡에 반드시 “다농다리호(多農多利乎) 지리다리야(地利多利也)”가 들어가 있다고 전한다.306)강희맹, 『금양잡록』 선농구(選農謳), 화분(和噴). 말하자면 공동 노동을 하면서 한 사람이 선창(先唱)하면 뒤이어 농요(農謠)를 같이하면서 후렴구로 이 구절을 함께 소리쳐 부르면서 농사의 고단함을 잊고자 한 것이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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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농업 기술과 관련한 이해는 누구보다도 농민 자신과 관련한 문제이기 때문에 그들은 나름대로 농법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예를 들어 이규보는 어려서 겪은 과일 접붙이기의 추억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그는 동네에 사는 꺽다리 전씨가 “못 쓸 배나무 두 그루가 있었는데 전씨는 그것을 톱으로 모두 베어 버리고는 좋은 품종이라고 이름난 배나무를 얻어다가 몇 개의 가지를 잘라 내어 잘라 버린 줄기에다 붙이고 잘 이긴 진흙을 바르고 싸매 주었다.”라고 하면서 이게 과연 가능할까 하고 의구심을 갖다가 가을에 수확하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표시하였다.307)이규보, 『동국이상국집』 전집 권23, 기, 「접과기」. 이 내용은 농서에 정리된 접과 기술이기보다는 농민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체득한 농업 기술이었음을 알려 준다.

고려 후기의 인물인 이색(李穡, 1328∼1396)은 『농상집요(農桑輯要)』의 후서(後序)를 쓰면서 고려의 농가에서는 하늘만 쳐다보므로 수한(水旱)을 만나게 되면 언제나 해를 입는다고308)이색(李穡), 『목은문고(牧隱文藁)』 권9, 서(序), 「농상집요후서(農桑輯要後序)」. 하여 고려의 농법이 매우 뒤떨어졌다고 하였다. 하지만 농촌에서는 그러한 농업 환경에 순응하면서도 농업 생산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를 본다면 이색이 평한 고려의 농업은 유자(儒者)의 입장에서 『농상집요』를 높이 평가하기 위한 수사(修辭)였다고 하겠다.

고려에서 중국 농서의 이용과 관련해서는 자료가 드물지만 손광헌이 찬한 『잠서』나 육우(陸羽)가 찬한 『다경(茶經)』의 이용은 확실하다. 『사민월령』·『사시찬요』 등의 월령식 농서나 중국 최초의 종합 농서라고 할 수 있는 『제민요술』의 유통 및 이용 가능성도 있다. 중국 농서의 이용을 고려의 농업 생산력의 발전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고려 왕조에서는 중국의 농업 기술 개발에 대해서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였다. 고려의 지방 사회에서도 농업 생산력을 높이기 위한 농법 개발이나 종자 개량 등의 노력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지식인층이 아니라 실제 경작층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이것이 조선 초기 전통 농법을 모은 농서의 편찬으로 이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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