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7권 농업과 농민, 천하대본의 길
  • 제3장 조선 전기 농업 발달과 농촌 사회 그리고 농민
  • 1. 조선 왕조가 추진한 농정책
  • 조선 왕조의 농정책 수행
염정섭

조선 왕조의 기본적인 생산 활동은 농민이 수행한 농업 생산이었다. 조선 사회에서 농업 생산에 직접 종사하고 있던 농민은 대부분 피지배층 신분에 속해 있었다. 농민은 자신과 가족의 기본적인 재생산을 이루어 내고 또한 농업 생산의 증대를 위하여 농사일에 힘썼다. 그들은 농업 생산의 전 과정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었고, 또한 새로운 농업 기술의 발달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생산 활동에 오랫동안 종사하면서 농사에 노련하고 노숙한 농업 기술자로서의 농민은 노농(老農)이라고 불렀다.309)『태종실록』 권27, 태종 14년 2월 을사. 의정부는 토질에 걸맞은 곡(穀)과 파종하기에 적당한 시기를 포고하여 수령에게 착실히 권농하게 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태종은 노농(老農)들에게 포고할 필요가 없다고 지적하였다. 농민들의 농업 생산이 사라지는 순간 조선 사회도 존립할 수 없었다.

조선의 지배층은 농민의 사회적 생산 활동인 농업(農業)에 대하여 “농(農)은 천하 국가의 대본(大本)이다.”라고 표현하였다.310)『세종실록』 권44, 세종 11년 5월 신유. 이러한 언급은 농사짓기가 천하(天下)의 근본이기도 하고, 국가(國家)의 근간이기도 하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힌 것이었다. 또한 세종은 권농교문(勸農敎文)을 통해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 농사짓는 일은 의식(衣食)의 근원이고, 왕정(王政)에서 앞서 해야 할 바이다.”라고 규정하 면서 나라와 백성과 농사짓는 일이 서로 긴밀하게 의존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표명하였다.311)신속(申洬), 『농가집성(農家集成)』 세종 권농교문(勸農敎文) : 『농서(農書)』 1, 아세아 문화사 한국 근세 사회 경제사 총서, 1981, 139쪽(이하 『농서』 1로 약기함). 그리고 생산의 근원을 농업에서 찾아 이를 본업으로 간주하여 극력 장려하면서 재정 운용에서는 절용(節用)에 힘을 쏟았다. 『대학(大學)』에 나오는 생산하는 자가 많아야 하고 소비하는 자가 적어야 한다는 상투적이지만 근원적인 관념을 자주 강조하였다.312)『세종실록』 권87, 세종 21년 11월 경술 ; 『성종실록』 권55, 성종 6년 5월 신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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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농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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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지배층은 농업 생산력의 발달을 농업 기술의 측면에서 성취해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왕조를 개창한 초기부터 부세 수취(賦稅收取)의 안정적인 기반을 갖추어 국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농업 생산의 안정과 확대가 절실하게 요구되었기 때문이었다. 조선 왕조도 고려와 마찬가지로 농업을 국가의 근간으로 삼는 중농 정책(重農政策)을 펼쳤다. 조선을 개창한 태조로부터 태종을 거쳐 세종대에 이르게 되면, 농업 생산을 잘 유지해 나가기 위한 여러 정책을 세우고 시행하는 조치가 체계적으로 정리되었다. 조선 왕조가 농업 생산의 안정과 증대를 위하여 추진한, 농업 생산에 관련된 여러 가지 정책을 농정책(農政策)이라고 부를 수 있다.313)조선시대 국가적 차원에서 실행된 농정책은 구체적으로 권농, 감농(監農), 황정(荒政) 등의 차원에서 수행되고 있었다. 권농책 개념의 외연을 확대하면 직·간접적인 농사 권장 이외에 국왕과 중앙 정부의 농정에 대한 제반 정책을 포함시킬 수 있다. 조선시대에 국가적인 차원에서 수행된 권농책의 개략적인 내용은 다음 글에 소개되어 있다(김용섭, 『한국 중세 농업사 연구』, 지식 산업사, 2000 ; 염정섭, 「18세기 말 정조의 ‘농서대전’ 편찬 추진과 의의」, 『한국사 연구』 112, 한국사 연구회, 2001). 조선 초기 특히 세종대를 중심으로 농정책의 이모저모를 살펴보면 조선 초기 농업 생산 활동과 농민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한 바탕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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