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7권 농업과 농민, 천하대본의 길
  • 제3장 조선 전기 농업 발달과 농촌 사회 그리고 농민
  • 1. 조선 왕조가 추진한 농정책
  • 권농의 실무를 맡은 수령
염정섭

조선 왕조가 추진한 농정책의 첫 번째 부분은 권농(勸農)이었다. 권농이란 말 그대로 ‘농사의 권장’이고, 이를 좀 더 풀이하면 ‘농사의 장려와 권장’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왕조는 특별히 권농을 전담하는 관서(官署)를 설치하지 않았다. 사실 그러한 관서를 설치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호조, 의정부를 포함한 수많은 관청이 농정에 관련된 정책을 입안하고 결정하는 과정에 관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권농의 특정한 측면을 전담하여 담당하는 아문(衙門)이 있었는데,314)수차(水車) 채택을 건의한 안순(安純)은 전농시(典農寺)가 농업과 양잠을 전담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하였다(『세종실록』 권54, 세종 13년 10월 신유). 바로 전농시(典農寺)였다.315)세종대 권농 기구에 대한 설명은 다음 글을 참고할 수 있다. 김용섭, 「세종조의 농업 기술」, 『한국 중세 농업사 연구』, 지식 산업사, 2000. 전농시는 동서 적전(籍田)의 관리를 담당하였는데, 평상시 주변 농민을 동원하여 경작하게 하였다. 그런데 때에 따라서 여러 가지 곡물을 시험 재배하는 일을 담당하기도 하였다.316)『세종실록』 권27, 세종 7년 2월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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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정치 기구로 권농을 관장하는 관청이 없었지만, 사실 조선 초기 농정책 수행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은 바로 지방 통치 체제의 골간을 형성하고 있던 감사(監司)와 수령(守令)이었다. 조선 왕조는 지방 지배 체제를 강력하게 구축하면서 농업 문제를 “농상(農桑)은 왕정의 근본이며, 학교는 풍화(風化)의 원천(源泉)이라.”고 하여 통치의 근본으로 인식하였다. 특히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시켜 농정책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지방관이 해야 할 일로 ‘농상의 권장’이 크게 강조되었다.317)조선 왕조에서 지방관인 수령이 해야 할 일로서 일곱 가지 곧 수령칠사(守令七事)를 내세워져 고과(考課)의 기준으로 삼았는데 그 중에서 농상성(農桑盛)이 첫째였다(이태진, 『조선 유교 사회사론』, 지식 산업사, 1989, 39쪽). 농상의 권장을 통해 농업 생산을 증대시키고, 이를 통해 국가 체제를 안정적으로 운영해 나가려는 것이었다.

조선 초기 수령의 권농 활동은 실제로 국왕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는 사조(辭朝)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세종을 비롯한 조선의 국왕은 사조하는 수령과 감사를 불러 보는 자리에서 “농상에 힘쓰고, 환자(還上)를 제대로 하라.”고 당부하는 일을 잊지 않고 실행에 옮겼다. 수령은 이 자리에서 ‘농상성(農桑盛)’이라는 과제를 가슴에 담지는 못할지언정 머릿속에서 떠나보내서는 안 된다는 각오를 다질 수밖에 없었다.

권농을 포함한 조선 왕조의 농정책은 결국 수령을 중심으로 시행될 수밖에 없었다. 권농, 감농(監農), 황정(荒政) 등 실제적인 농정책의 직접 담당자는 수령이었다. 수령은 예전의 제후(諸侯)에 비견되는 자리이고, 백성의 일을 국왕이 모두 직접 처리할 수 없기 때문에 임명하여 보내는 것으로 간주되었다.318)『세종실록』 권38, 세종 9년 12월 을축. 경종(耕種), 제초(除草), 수확(收穫)이라는 세 가지 중요한 농시(農時)를 맞이하게 될 때 농사 현장에 가까이 지내면서 이를 장려하거나 독려하고, 나아가 농민을 어루만질 위치에 있는 관리는 바로 수령이었다. 따라서 수령을 제수할 때에 총민함이나 재주가 아니라 효제(孝悌)와 자상함을 갖춘 인물을 우선해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되었다.319)1440년(세종 22) 민생 문제로 상서한 서운부정 신정도(申丁道)가 강조한 것이 바로 덕행 있는 자를 수령에 임명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세종실록』 권88, 세종 22년 1월 정사).

농정책의 최종적인 대안은 바로 수령을 적당한 인물로 채워야 하는 방안이었다. 당시에 이러한 적임자 선발을 득인(得人)이라고 하였다. 수령이 근실하고 태만하지 않으면 권농부터 황정에 이르는 농정책이 원만하게 진행될 수 있었고, 그에 따라 백성이 혜택을 받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었다. 따라서 우선 적임자를 수령에 임명하는 것이 필요하고, 계속해서 수령의 근만(勤慢)을 파악하기 위해 조관(朝官)을 보내어 감독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국가에서 진휼(賑恤)하는 것은 두루 흡족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320)1427년(세종 9) 세종에게 흉년 구제책을 올린 예조 판서 신상(申商)은 수령에 적당한 인물을 얻는 것 곧 득인(得人)이 가장 중요한 방책임을 분명하게 설명하였다(『세종실록』 권37, 세종 9년 8월 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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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릉신영도(安陵新迎圖)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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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방(外方)의 수령은 권농책을 수행하면서 자신을 보좌하는 권농(勸農)·권농관(勸農官)321)박진우, 「조선 초기 면리제와 촌락 지배의 강화」, 『한국사론』 20, 서울 대학교 국사학과, 1988.과 감고(監考) 등의 하급 관원을 임명하였다. 권농관으로 통칭되는 이들이야말로 현실적으로 가장 농민의 농사일에 밀착해서 농정을 수행하는 관리였다.322)『경국대전』 권2, 호전(戶典), 호적(戶籍)에 “매 1면(面)마다 권농관을 둔다.”는 것으로 법제화되어 있었다. 본래 농무(農務)를 감독하는 것은 권농(관)에게 맡겨진 것이었지만,323)이태진에 따르면 고려에서의 권농사는 도 단위의 직임으로 안렴사나 감창사의 겸무였다(이태진, 앞의 책, 1989, 40쪽). 수령은 따로 감고를 차정(差定)하여 이들에게 여러 가지 일을 위임하기도 하였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수령은 권농과 감고를 차정할 때 가능하면 성실하고 유식한 인물을 선택하도록 종용받았다.

농사철에 수령은 권농을 임시로 차정하여 파종과 제초를 독려하는 임무 즉 감농(監農)의 책무를 맡기기도 하였다. 이때 너무 각박하게 농민들을 몰아 세워서 폐해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각 관(各官)의 감고는 구황의 실행도 담당하였다. 그리하여 구황을 온전히 잘 수행하여 기민(飢民)이 죽는 지경에 이르지 않게 되면 시상을 받았다. 각 고을에 설치된 진제장(賑濟場)에서도 감고는 색리(色吏)와 더불어 기민 구휼을 맡아서 수행하였다.324)『세종실록』 권76, 세종 19년 1월 정유. 물론 일을 잘못 처리할 경우에는 처벌도 뒤따랐을 것이다.325)1438년(세종 20)에 의정부는 외방 권농이 공무를 수행하다가 인명을 상하게 하였을 때 이전(吏典) 향리(鄕吏)의 예에 따라 처리해야 한다는 건의를 올리고 있다(『세종실록』 권83, 세종 20년 11월 기축). 이와 같이 이들은 외부적으로는 권농의 직임을 띤 것으로 표현되었지만 감농, 황정 등을 겸하여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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