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7권 농업과 농민, 천하대본의 길
  • 제3장 조선 전기 농업 발달과 농촌 사회 그리고 농민
  • 2. 농지 개간과 수리 시설 축조
  • 조선 초기 농지 개간 장려의 성과
염정섭

조선 초기 농지 개간을 장려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연해 지역과 북방 지역이 개간되면서 조선 정부가 파악한 전체 농경지의 규모가 증가하였다. 고려 말 1389년(공양왕 3)에 시행된 기사양전(己巳量田)에서 파악한 서북 양도를 제외한 6도의 전결(田結)은 62만여 결이었다. 그런데 10여 년이 지난 뒤인 1405년(태종 3) 을유양전(乙酉量田) 때 96만여 결로 크게 증가하였다. 이러한 전결 수 증가는 국가의 토지 파악 능력, 토지 장악력이 증대된 사정에서 연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앞서 살펴본 연해 지역 진전의 개간, 복구에서도 연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432년(세종 14) 국가에서 양계를 제외한 6도의 전결 수를 파악한 수치를 보면 118만 6070결이었다. 태종대에 비해 22만여 결이나 증가한 것이었다. 국가적인 농지 개간 장려 정책이 순식간에 성과를 보였다고 할 수는 없지만 조선 초기 이래의 농지 개간 장려책은 이후 농경지의 계속적인 증대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세종 재위 말년의 상황을 보여 주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의 각도총론(各道總論)에 나타난 총 간전(墾田) 결 수(結數)는 163만 2006결에 달하였다.359)공법 시행을 위한 실천 과정으로서 세종 사후인 1461년(세조 7)에서 1463년까지 경기도와 하삼도의 양전을 완성하였고 나머지는 1488∼1489년(성종 20)까지 완료하였다. 공법 시행 후 30여 년 만이었다(김태영, 『조선 전기 토지 제도사 연구』, 지식 산업사, 1983, 321쪽 ; 최윤오, 「세종조 공법의 원리와 그 성격」, 『한국사 연구』 106, 한국사 연구회, 1999, 20∼22쪽). 『세종실록지리지』의 전결 수 통계는 앞선 시기의 결부(結負) 파악 방식과 다른 공법(貢法) 단계의 결부법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수치를 곧장 비교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세종대에 달성한 전국 경지 면적 규모는 연해 지역과 북방 개척의 산물이었고, 계속해서 저지와 저습지 개간이 이어지고 있었다.

16세기 이후 개간의 진행에서 주요하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전답의 비율에서 답(畓)의 비중이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조사된 1432년의 경우 전국의 결총(結總)에서 답이 차지하는 비율은 27.9%였다.360)이호철, 「토지 파악 방식과 전결」, 앞의 책, 1986, 264쪽. 이때 파악되는 각 도별 수전 비율을 임진왜란 직전의 상황으로 파악되는 『반계수록(磻溪隨錄)』의 수치와 비교해 보면 황해도는 15.3%에서 26.3%로, 경기도는 37.7%에서 46.7%로, 강원도는 12.8%에서 18.1%로 증가하고 있었다. 17세기에는 수전 비율이 증가하는 명확한 수치를 확보하기 힘들지만 19세기 초가 되면 전국적인 결총에서의 수전 비율이 36.3%로 증가하고 각 도의 수전 비율도 일률적으로 증가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와 같이 조선 전기 개간의 성과는 특히 수전의 확대라는 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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