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7권 농업과 농민, 천하대본의 길
  • 제3장 조선 전기 농업 발달과 농촌 사회 그리고 농민
  • 4. 국가와 개인의 농서 편찬
  • 태종대 『농서집요』의 편찬
염정섭

조선 왕조가 개창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태종대(1400∼1418)에 『농서집요(農書輯要)』라는 농서가 편찬되었다. 그 전까지는 이암(李嵒, 1297∼ 1364)이 도입하여 고려 말에 복간(復刊)한 『원조정본농상집요(元朝正本農桑輯要)』를 활용하고 있었다. 이 책은 원나라에서 편찬한 『농상집요(農桑輯要)』를 경상도 합천에서 복간한 것인데, 조선 개창 이후까지 이용하였다. 15세기 초반 태종대에 이르러 『농상집요』에 수록된 농업 기술을 조선의 농업 여건 속에서 활용하기 위하여 『농상집요』의 주요 기사를 뽑아 이를 번안한 초록서(抄錄書)가 편찬되었다. 이 초록서가 바로 『농서집요』이다.427)『농서집요』는 서지가 박영돈(朴永燉) 씨가 발굴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김용섭, 「『농서집요』의 농업 기술」, 앞의 책, 1988, 참조. 『농서집요』는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농서 가운데 가장 오래전에 만든 것이다. 그런데 현재 전해지고 있는 『농서집요』는 태종대에 편찬한 원본이 아니라 16세기 초반에 새롭게 신간(新刊)한 것을 다시 후대에 베껴 쓴 필사본(筆寫本)이다. 따라서 『농서집요』의 편찬 경위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농서집요』는 『농상집요』의 일부분을 발췌하여 이두(吏讀)로 번역하면서 『농상집요』의 내용을 대부분 그대로 옮겼지만 일부에서는 우리의 농법에 알맞게 번안한 농업 기술을 서술하기도 하였다.428)수도 재배에 대한 항목을 보면 조선의 농법을 고려하여 이두문(吏讀文)으로 번안한 것이었다. 1414년(태종 14)에 한상덕(韓尙德)이 『농상집요』를 본국(本國) 이어(俚語, 속어)로 번역하여 향촌의 소민(小民)들이 내용을 제대로 알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429)『태종실록』 권28, 태종 14년 12월 을해. 한상덕의 제안을 태종이 수용하면서 전임 대제학 이행(李行)과 검상관(檢詳官) 곽존중(郭存中)에게 『농상집요』를 발췌하고 본국 이어로 번역하여 책자를 만들어 간행하게 하였다.430)『태종실록』 권28, 태종 14년 12월 을해. 현재 전해지고 있는 『농서집요』가 바로 이때 만든 『농상집요』의 초록서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편찬된 『농서집요』가 그 이후에 필사본으로 유통되었고, 중종대에 이르러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이 『농서집요』를 언문으로 번역하였는데, 이때 『농서집요』 자체도 신간되었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농서집요』 필사본이 바로 중종 때 신간한 『농서집요』를 베껴 쓴 것이다.431)김용섭, 앞의 책, 1988.

이행과 곽존중은 중국 화북(華北) 지방의 특성에 맞추어 엮은 농업 기술서인 『농상집요』의 내용 중에서 곡물 생산과 의류 작물 생산 기술에 초점 을 맞추어 발췌하였다. 그리하여 『농서집요』는 『농상집요』를 초록한 부분과 이두를 붙여서 번역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현존하는 필사본에 등장하는 이 두 자료를 중심으로 편찬 연대를 추정한 연구에 따르면 이 필사본의 원본은 15세기 초반 태종대에 편찬한 것으로 비정(比定)할 수 있다.432)이승재는 『농서집요』에 등장하는 이두와 당대의 다른 문헌의 이두를 비교 연구하여 『농서집요』의 편찬 연대를 15세기 초반으로 비정하고 있다(이승재, 「『농서집요』의 이두」, 『진단학보』 74, 진단학회, 1992).

태종대에 만든 『농상집요』의 초록서인 『농서집요』는 이후에 ‘농서(農書)’라는 제목으로 자주 인용되었고, 다시 간행되기도 하였다. 1428년(세종 10) 윤4월에 세종은 『농사직설』을 간행하기 위해 경상 감사에게 노농의 견문을 정리하여 책자로 만들어 올리게 명령하면서 동시에 『농서(農書)』 1,000부를 인쇄하여 올리도록 명령하였는데,433)『세종실록』 권41, 세종 10년 윤4월 갑오. 이 『농서』가 바로 『농서집요』로 추정된다. 또한 세종은 『농서』 1,000부 간행을 명령하기에 앞서 평안도와 함길도 양도의 농사가 그다지 신통치 않은 것을 염려하여 승정원으로 하여금 양도인을 만나서 농작(農作) 상황을 묻게 하고 아울러 『농서』를 가르치도록 지시하기도 하였다.434)『세종실록』 권40, 세종 10년 윤4월 임진.

『농서집요』가 편찬된 이후 세종대에 이르기까지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를 지방에 반포하거나 지방민을 가르치는 데 이용하고 있었지만 『농서집요』는 근원적으로 결함이 있는 농서였다. 다시 말해서 『농서집요』가 『농상집요』를 초록하여 정리하면서 조선 고유의 농법을 고려하여 이두문에 수록한 것이었기 때문에, 조선의 농업 환경에 전적으로 바탕을 둔 농업 기술을 충실하게 담고 있지 못하였다. 결국 『농서집요』 이외에 조선의 풍토(風土), 즉 조선의 토질이나 기후 조건에 근거하여 조선의 농업 현실에 맞는 조선의 농법을 문자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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