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7권 농업과 농민, 천하대본의 길
  • 제4장 조선 후기 새로운 농사 기술과 상품 작물, 농민 지위의 변화
  • 3. 토지 소유와 농업 경영 추이
  • 영세 소농의 증가
김건태

양반들은 17세기 후반부터 남녀 차등 상속을 실시하고, 18세기 전반부터 장자 우대 상속제를 도입하여 제위전의 비중을 더욱 늘려 갔다. 이렇게 하여 대토지 소유자가 감소하는 추세를 늦출 수 있었지만 빈농(貧農)이 생겨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다시 말해 장자 우대 상속 또한 부모대의 재산을 여러 자식에게 나누어 주기 때문에 인구가 증가하는 상황하에서는 자식들의 재산 규모가 부모대에 비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사실은 1914년 경상도 안동 천전리(川前里) 상황을 통해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580)20세기 전반 천전동 상황과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김건태, 「독립·사회 운동이 전통 동성 촌락에 미친 영향」, 『대동 문화 연구』 54, 성균관 대학교 대동 문화 연구원, 2006 참조.

토지 소유 현황이 짧은 기간 내에 급격히 변모하기 어려운 것을 감안하면, 1914년 천전동의 자료를 통해 18∼19세기 상황을 유추해 보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다고 볼 수 있다.

천전동은 의성 김씨(義城金氏) 동성 촌락으로 조선 후기 유명한 양반 동성 촌락인 도산, 하회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마을이었다. 조선 후기 천전동의 사회적 위상은 경상도 동족 부락을 열거한 정약용(丁若鏞)의 글에서 잘 드러난다.

<표> 1914년 안동 천전동 주민의 토지 소유 현황
단위 : 결-부-속
성씨

구간
의성 김씨 타성(他姓) 합계
호수(戶數) 토지 호수 토지 호수 토지
10정보 이상 2 28.0     2 28.0
5∼10정보 2 46.1     7 46.1
3∼5정보 2 39.5     10 39.5
2∼3정보 9 22.4     9 22.4
1∼2정보 13 18.1 5 8.0 18 26.1
0.5∼1정보 10 7.4 3 2.4 13 9.8
0.5정보 미만 13 3.4 10 1.6 13 5.0
무토지(無土地) 21 0.0 45 0.0 66 0.0
합계 85 164.9 63 12.0 148 176.9
✽『토지 조사부(土地調査簿)』 안동시청 소장; 『민적부(民籍簿)』 천전리 동사무소 소장.

그곳(경상도) 풍속은 집집마다 한 분의 조상을 모시고 한 장원(莊園)을 점유하여 동족(同族)끼리 살면서 흩어지지 않으므로 공고하게 유지되며 뿌리가 뽑히지 않는다. 예를 들면, 이씨(李氏)는 퇴계(退溪, 이황)를 모시고 도산(陶山)을 점유하였고, 유씨(柳氏)는 서애(西厓, 유성룡)를 모시고 하회(河洄)를 점유하였고, 김씨(金氏)는 학봉(鶴峰, 김성일)을 모시고 천전(川前)을 점유하였고, 권씨(權氏)는 충재(沖齋)를 모시고 유곡(鷄谷)을 점유하였고,……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581)정약용(丁若鏞),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권14, 발택리지(跋擇里志).

이처럼 20세기 초 천전동에 거주하는 의성 김씨는 양반의 후예였는데, 그들 가운데는 토지를 전혀 소유하지 못한 사람이 많았다.

표 ‘1914년 안동 천전동 주민의 토지 소유 현황’에서 볼 수 있듯이 1914년 천전동에는 148호가 거주하고 있었는데, 의성 김씨가 85호, 타성(他 姓)이 63호였다. 148호 가운데 토지를 소유한 호가 82호이고, 전답을 갖지 못한 호가 66호이다. 의성 김씨는 대체로 타성에 비해 경제력이 좋았다. 2정보 이상을 소유한 호는 모두 의성 김씨였으나 타성은 71%가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농민이었다. 의성 김씨 가운데서 무토지 농민 혹은 자신의 토지만으로 생계를 해결할 수 없는 농민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 인상적이다. 이렇듯 조선 전기부터 지속되어 온 분할 상속 관행으로 말미암아 농촌 사회에는 시간이 흐를수록 빈한한 농민이 늘어났던 것이다.

이러한 빈한한 농민은 다른 사람의 토지를 빌려 경작하면서 생계를 이어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인구가 전답보다 더 빨리 증가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토지를 빌리는 것도 점점 어려워졌다. 경상도 칠곡(漆谷) 석전(石田) 감사댁에서 작성한 추수기(秋收記)는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582)경상도 칠곡 석전 감사댁의 농업 경영과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김건태, 앞의 책 참조. 표 ‘칠곡 석전 감사댁 답 작인의 경작 규모’에서 볼 수 있듯이 병작지의 규모 면에 본 작인(作人)들의 성격은 다양하였다. 수십 두락의 병작지를 경작하는 작인이 있는가 하면 1두락도 채 되지 않는 전답을 병작하는 사람도 있었다.

넓은 토지를 병작하는 작인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줄어들었다. 칠곡에서는 최상층 구간과 최하층 구간에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최상층 구간에 속한, 즉 답 10두락 이상을 병작한 작인층의 동향을 살펴보면, 1685년부터 1733년까지는 큰 변화가 없으나 1737년(영조 13)부터 감소하기 시작하여 1776년(영조 52) 이후에는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최하층 구간에 속한, 즉 답 2두락 미만을 경작한 농민층 또한 단기적으로는 감소와 증가를 반복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감소하고 있다. 이 같이 시간이 흐를수록 최상층 구간과 최하층 구간에 속한 농민은 줄어들고 있으나 2∼4두락, 4∼6두락, 6∼8두락의 답을 병작한 작인은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 즉, 상층과 하층 구간의 작인이 감소하고 중간층에 속한 작인이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어 경영 규모의 하향 평준화 현상이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표> 칠곡 석전 감사댁 답 작인의 경작 규모
단위 : 인, 두락
면적

연도
2두락 미만 2∼4두락 4∼6두락 6∼8두락 8∼10두락 10두락 이상 합계
작인 면적 작인 면적 작인 면적 작인 면적 작인 면적 작인 면적 작인 면적
1685 4 4.5 8 21.6 6 27 4 25 3 24 3 52 28 154.1
1690 7 7 10 28 12 53.2 3 19.5 0 0 3 42 42 149.7
1695 5 5.2 4 24 6 44 10 37.3 9 32.5 4 69.5 38 212.5
1701 9 13.1 17 46.3 16 71 6 38 3 25 23 199.3 64 392.7
1707 4 4.8 7 19 8 36 7 44 4 32 5 76.5 35 392.7
1712 3 3 11 31 10 44.3 7 45 5 41.5 5 67.5 41 232.3
1717 4 4 6 17.8 16 67 5 33 4 32 5 64 40 217.8
1724 3 2.3 9 24 14 59 4 24 4 34.5 4 52 38 196.6
1729 2 2 11 27 16 68.8 5 31 2 16 5 68.1 41 212.9
1729 1 1.3 10 28 10 43.7 4 24 2 17 6 78.1 33 192.9
1737 3 3 10 29 17 74.8 9 57 5 42.3 2 24.1 46 192.9
1742 2 1.5 6 16 10 43.8 8 51 2 16 1 20 29 148.3
1746 2 1.5 10 24.8 19 81 8 43 1 8 2 27 41 148.3
1752 2 2 11 27.8 16 67 9 56 4 34 0 0 42 186.8
1764 1 1 9 21.5 10 42 6 39 0 0 1 10 27 113.5
1764 1 1.3 15 40.3 13 56 9 60.5 4 32 0 0 42 190.1
1764 0 0 8 27.8 5 22 1 7 1 8.8 0 0 18 65.6
1787 0 0 12 33.6 7 31 1 7 0 0 0 0 20 71.6
✽『감사댁 추수기』 대구 효성 가톨릭 대학교 도서관 소장.
✽1781∼1787년 추수기는 일부가 탈락된 상태로 전함.

이러한 현상은 19세기에도 계속 나타났다. 전라도 영광군(靈光郡) 도내면(道內面) 입석리(立石里) 신씨가(辛氏家)의 토지를 병작하던 농민의 실상은 당시의 상황을 우리들에게 보여 주고 있다.583)19세기 영광 신씨가의 농업 경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정승진, 앞의 책 참조.

<표> 영광 신씨가 답 작인의 경작 규모
연도

두락
1840 1860 1882 1900
작인(%) 면적 작인(%) 면적 작인(%) 면적 작인(%) 면적
18 이상 3(9.7) 72 1(1.6) 34 1(2.9) 20 1(2.2) 19
12∼17 0(0.0) 0 9(14.1) 118 6(17.6) 81 2(4.4) 27
6∼11 13(41.9) 111 18(28.1) 144 10(29.4) 75 20(44.4) 165.5
5 이하 15(48.4) 45 36(56.3) 133 17(50.0) 64 22(48.9) 84
합계 31(100) 228 64(100) 429 34(100) 240 45(100) 295.5
✽정승진, 『한국 근세 지역 경제사』, 경인 문화사, 2003, <표 5>를 재작성.

표 ‘영광 신씨가 답 작인의 경작 규모’에서 볼 수 있듯이 18두락 이상을 경작한 작인의 비율은 9.7%→1.6%→2.9%→2.2%로, 증가와 하락을 거듭하면서 경향적으로 하락하고 있다. 한편 12∼17두락, 6∼11두락을 차경(借耕)한 작인의 비율은 단기적으로 큰 파동을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큰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5두락 이하를 차경한 작인의 비율은 48.4→56.3%→50.0%→48.9%로, 장기적으로 큰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이 같이 입석리에서는 상층이 점진적으로 감소하는 데 비해 중·하층은 강고하게 존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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