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7권 농업과 농민, 천하대본의 길
  • 제4장 조선 후기 새로운 농사 기술과 상품 작물, 농민 지위의 변화
  • 4. 벼 재배 방법의 변화
  • 직파법으로 벼를 재배하는 농가
김건태

조선시대 농민들은 밭농사보다 논농사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그 결과 시간이 흐를수록 밭은 줄어들고 논은 늘어났다. 논과 밭의 비율은 15세기에 2 대 8, 19세기 말에 3 대 7이었다. 이 같이 논의 비율이 높아진 원인은 밭을 논으로 전환하는 작업이 진행되었기 때문이었다. 논농사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이어서 수리 시설(水利施設)이 확충됨으로써 그와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여기에 더하여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개간 사업도 논의 비중을 높이는 데 적지 않게 기여하였다.

농민들이 많은 관심을 쏟았던 논농사, 곧 벼농사는 밭농사에 비해 더 복잡하고,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였다. 벼 재배 과정은 이른 봄철 논을 갈고 고르는 작업, 봄철 씨뿌리기와 씨앗 덮기, 여름철 김매기와 비료 주기, 가을철 벼 베기, 늦가을 초겨울의 논갈이 작업으로 이루어진다. 벼 재배 방법은 물을 채운 논에 미리 발아시킨 볍씨를 파종하는 직파법(直播法),584)조선시대 농민들은 비료 성분을 묻힌 볍씨를 물이 없는 논에 파종하는 건경법도 활용하였는데, 건경법은 직파법의 범주에 속한다. 못자리에서 모를 일정 정도 키운 다음 전체 논으로 옮겨 심는 이앙법(移秧法) 등이 있었다. 직파법과 이앙법은 서로 다른 장점을 가진 농법이었다. 직파 법은 이앙법에 비해 가뭄이 들어도 농사를 그르칠 위험이 적다는 장점을 지녔다. 이앙법은 직파법에 비해 제초(除草), 즉 김매기 노동력을 절약할 수 있는 농법이었다.

이 같이 이앙법은 가뭄에 취약하였기 때문에 조선 전기에는 일부 논에서만 시행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앙법이 더욱 확산되었다. 이앙법은 경상도 북부 지역에서는 16세기 후반기에 일반화되고, 경상도 남부 지방에서는 직파를 보완하는 수준에 머물렀으며, 17세기 후반에는 충청도와 경기도에도 보급되었다. 제언(堤堰)과 천방(洑) 같은 수리 시설의 확충은 이앙법의 확산에 많은 보탬이 되었다. 18세기가 되면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에는 이앙법이 일반화되었다. 그런데 이앙법이 시행되던 논 가운데 수리 안전답(水利安全畓)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조선 후기 수리 안전답의 비율은 30% 전후였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585)우대형, 「조선 전통 사회의 경제적 유산」, 『역사와 현실』 68, 한국 역사 연구회, 2008. 경상도 상주에 거주하던 권상일이 남긴 『청대일기』는 수리 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논에 이앙을 하고 있던 광경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1702년(숙종 28) 5월 20일. 가뭄이 혹심하여 관개(灌漑)할 수 있는 곳 외에는 이앙(移秧)을 하지 못하였다. 집집마다 민망함을 어찌 하리요.586)권상일, 『청대일기』 임오(1702) 5월 20일.

1704년 5월 10일.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았다. 관개할 수 있는 곳 외에는 이앙을 하지 못하였다. 농사의 민망함을 어찌 하리요.587)권상일, 『청대일기』 갑신(1704) 5월 10일.

1705년 5월 20일. 큰 비가 내렸다. 모든 봉천답(奉天畓)에 이앙하였다.588)권상일, 『청대일기』 을유(1705) 5월 20일.

1708년 4월 17일. 비가 내렸다. 봉천답에 이앙을 거의 마쳤다.589)권상일, 『청대일기』 무자(1708) 4월 17일.

1708년 5월 25일. 모든 봉천답에 이앙을 마쳤다.590)권상일, 『청대일기』 무자(1708) 5월 25일.

1725년 5월 3일. 비가 잠깐 그쳤다. 시내와 도랑이 모두 넘쳐 바싹 마른 봉천답에 충분히 이앙할 수 있다. 풍년의 조짐이 보이니 아주 기쁘다.591)권상일, 『청대일기』 을사(1725) 5월 3일.

1749년 5월 9일. 비. 근래 연속해서 잠깐씩 비가 내렸으나 바싹 마른 봉천답에 이앙하기에는 부족하다.592)권상일, 『청대일기』 기사(1749) 5월 9일.

1753년 6월 4일. 맑음. 시냇물을 끌어들일 수 있는 곳을 빼고는 이앙할 수 없다고 한다.593)권상일, 『청대일기』 계유(1753) 6월 4일.

권상일은 수리 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은 논에도 이앙을 하고 있었는데, 일기를 통해 비가 오지 않아 애태우는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조선 후기 농민들은 왜 농사를 그르칠 위험을 무릅쓰고 수리 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은 논에까지 이앙을 실시하였을까? 해답을 찾기 위해 직파하는 농가의 벼농사 과정과 이앙하던 농가의 벼농사 과정을 서로 비교해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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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쇄미록』에 나타난 1594∼1596년 오희문가의 농사 일정
『쇄미록』에 나타난 1594∼1596년 오희문가의 농사 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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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희문(吳希文, 1539∼1612)과 남이웅(南以雄, 1575∼1648)의 부인 조씨(曺氏)는 직파법으로 벼를 재배하였다.594)오희문과 남이웅의 부인 조씨의 농사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김건태, 「조선 중기 이앙법의 보급과 그 의의」, 『국사관 논총』 63, 국사 편찬 위원회, 1995 참조. 오희문은 노비 신공(奴婢身貢)을 수취하기 위하여 서울 집을 나섰다가 임진왜란을 만나 1593년(선조 26)부터 1597년까지 충청도 임천(林川)에 머물면서 농사를 지었다. 그는 농사 전반에 관련된 사항을 『쇄미록(瑣尾錄)』에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해 두었다. 남이웅의 부인 조씨는 병자호란을 피해 노비 몇 명을 데리고 서울을 떠나 1638년(인조 16)에 충주(忠州) 인근 이안(利安) 부근에 머물며 그곳에 거주하 고 있던 노비들을 사역시켜 직영지를 경작하였다. 조씨 부인은 서울로 되돌아온 1639년에도 노비를 사역시켜 마포, 뚝섬, 성북동 일대의 직영지를 경작하였다. 충주와 서울의 직영지 경영 내용은 조씨 부인이 쓴 『병자일기(丙子日記)』595)조씨 부인(曺氏夫人), 김형대·박경신 역주, 『병자일기(丙子日記)』, 예전사, 1991.에 비교적 상세히 서술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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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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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희문의 농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직파로 재배하던 벼농사였다. 벼 재배를 위해 가장 먼저 수행하는 작업은 논갈이였다. 논갈이 작업에는 네 명의 노동력이 투입되었다. 두 명은 각각 소 한 마리씩을 끌고, 다른 한 명은 쟁기를 잡았으며, 또 다른 한 명은 쟁기 뒤를 따라가면서 삽으로 이랑을 손질하였다.596)오희문(吳希文), 『쇄미록(瑣尾錄)』 갑오 3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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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일기』에 나타난 1638년 남이웅가의 농사 일정
『병자일기』에 나타난 1638년 남이웅가의 농사 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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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갈이 다음에 하는 작업은 파종(播種), 즉 씨뿌리기였다. 논갈이에서 파종에 이르는 작업은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파종에 앞서 써레로 한 번 논삶이를 하고서 파종하기도 하고,597)조씨 부인, 『병자일기』 무인년 3월 초순. 쇠스랑으로 흙덩이를 부순 뒤 써레질을 하지 않고 파종을 하기도 하였다.598)조씨 부인, 『병자일기』 무인년 3월 8일. 파종 시기는 벼의 종류에 따라 달랐다. 조도(早稻)의 파종 시기는 오희문의 경우 곡우(穀雨, 양력 4월 20일)와 입하(立夏, 5월 5일) 사이였고, 조씨 부인의 경우 곡우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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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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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하 무렵에 오희문은 중도(中稻)를 파종하였고, 조씨 부인은 만도(晩稻) 1을 뿌렸다. 조씨 부인은 조도의 1차 제초가 끝난 소만(小滿, 5월 21일)과 망종(芒種, 6월 5일) 사이 시점에 만도 2를 파종하였다.

파종 다음에 하는 작업은 제초(除草), 즉 김매기였다. 오희문은 제초 작업을 1594년(선조 27)에는 세 번 수행하였고, 1595년과 1596년에는 네 번 실시하였다. 조씨 부인은 조도를 파종한 논에서는 4차 제초 작업까지, 만도를 파종한 논에서는 3차 제초 작업까지 하였다. 오희문과 조씨 부인은 제초 작업을 하는 도중에 지력 보강을 위해 거름(灰)을 뿌려 주기도 하였다.599)오희문, 『쇄미록』 을미 4월 회일(晦日). 제초 작업과 추비(追肥) 작업을 거친 뒤에는 새 쫓기를 한 다음 벼가 여물기를 기다려 백로(白露, 9월 7일) 무렵부터 벼 베기를 시작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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