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7권 농업과 농민, 천하대본의 길
  • 제4장 조선 후기 새로운 농사 기술과 상품 작물, 농민 지위의 변화
  • 5. 이앙법이 밭농사에 미친 영향
  • 밭농사의 집약화와 다각화
김건태

이앙법이 일방적으로 밭농사에서 영향을 받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앙법도 밭농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앙법을 채택함으로써 밭을 더욱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직파로 벼를 재배하던 오희문은 보리를 베어 낸 밭에 콩 혹은 녹두를 파종하는 근경을 실시하였다. 그런데 이앙으로 벼를 재배하던 이담명은 이른 봄철 보리밭에 조 또는 콩을 파종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농사 방법을 간종(間種)이라고 불렀다. 이담명은 간종을 함으로써 근경을 하던 오희문에 비해 더 많은 보리와 조를 수확할 수 있었다. 이담명은 논의 제초 노동력을 절약함으로써 두세 번 제초가 필요한 조를 보리밭에 간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이 이앙은 밭작물의 간종을 크게 활성화시켰다.

이앙법은 밭작물의 파종 방법에도 영향을 미쳤다. 밭작물의 파종 방법에는 밭갈이로 인해 높아진 부분인 이랑에 씨앗을 파종하는 농종법(壟種法) 과, 이랑에 비하여 낮아진 고랑에 종자를 뿌리는 견종법(畎種法)이 있다. 이앙법이 일반화되기 이전에는 대부분의 밭작물을 이랑에 파종하였다. 농종법을 택하면 장마 피해를 줄일 수 있다. 작물은 이랑에서 자라고, 빗물은 고랑에 고이게 되는 것이다. 농종법이 이 같은 장점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앙법을 채택하던 농부들은 밭작물을 대부분 고랑에 파종하였다. 농종법은 견종법에 비해 더 많은 수확물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견종법으로 밭작물을 파종한 농부들은 곡식이 어느 정도 자라면 이랑 부분의 흙으로 곡식의 뿌리 부분을 덮어 주는 북주기 작업을 수행하였다. 이렇게 북주기를 해줌으로써 더 많은 곡물을 수확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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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후반기에 유원지(柳元之)가 쓴 『충효당농서(忠孝堂農書)』에는 다음과 같은 사례가 소개되고 있다.

병산(屛山)에 애동(艾同)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또 콩밭(太田)과 조밭(粟田)에 모두 네다섯 번 북주기(耕埋)를 하였더니 매우 무성하여 결실이 다 른 밭의 배나 되었다고 한다. 유승화(柳承華)는 홀로 농사를 짓는데…… 또 콩·조·목화밭에 …… 북주기를 해주었더니 많은 효험이 있었다고 한다.511)유원지(柳元之), 『충효당농서(忠孝堂農書)』 경지법(耕地法).

이 같이 애동과 유승화는 북주기를 해줌으로써 큰 효과를 보았다. 이렇듯 견종법은 더 많은 곡물을 수확을 보장해 주는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있다. 단점은 견종법에서는 북주기가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필수 사항이라는 것이다. 즉 밭작물을 고랑에 파종하고 북주기를 해주지 않으면 여름철 장맛비가 고랑에 고여 작물이 썩고 만다. 이 같이 견종법은 북주기 작업을 필요로 하는 농법이기 때문에 직파로 벼를 재재하던 농민이 선택하기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에 비해 이앙법을 채택하던 농민들은 논의 제초 노동력을 절약함으로써 밭에 북주기 작업을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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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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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들어 밭작물은 더욱 다양해졌으며, 일부 작물은 상품 작물로 인기를 끌었다. 대표적인 상품 작물로 면화, 모시, 담배, 인삼을 꼽을 수 있다.512)조선 후기 상품 작물 재배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이영학, 「농업 생산력의 발달과 상품 작물의 재배」, 『한국사』 33 조선 후기의 경제, 국사 편찬 위원회, 1997 참조. 목화 재배지로는 경상도가 으뜸으로 꼽혔고, 전라도와 충청도가 그 다음이었다. 모시는 충청도 서천(舒川), 한산(韓山), 임천(林川)에서 많이 재배되었다. 담배는 16세기 말에 전래된 이후 빠르게 확산되었다. 담배는 평안도, 황해도,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등 비교적 넓은 지역에서 재배되었는데, 19세기에는 평안도 삼등(三登), 강동(江東), 성천(成川)이 유명한 담배 산지로 꼽혔다. 인삼은 경상도 지역에서 재배되기 시작하여 전라도,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로 확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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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삼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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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이 조선 후기에는 많은 농가에서 상품 작물을 생산하였는데, 대부분은 벼, 보리, 조, 콩 등과 같은 곡식 농사를 보완하는 수준에 머물렀고, 극히 일부 농가에서만 상품 작물 재배를 전업으로 삼았다. 조선 후기 들어 상품 작물 재배 농가가 증가한 배경으로는 이앙법의 보급과 더불어 개별 농가의 경지 면적이 축소된 사실을 꼽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조선 후기 농민들은 경지 면적 축소로 인해 줄어든 수입을 상품 작물 재배를 통해 만회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개별 농가의 경지 면적 축소는 수입 감소로 이어졌다. 농가 수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벼농사는 이앙법이 일반화된 이후 별다른 발전을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시비, 품종, 수리 시설 등에서 획기적 변화가 없었기 때문에 조선 후기 단위당 벼 생산량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도표 ‘1685∼1787년 칠곡 석전 야방포 답 1두락당 벼 생산량’에서 볼 수 있듯이 칠곡 석전 감사댁 사례를 통해 17∼18세기 단위당 벼 생산량의 변화상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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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5∼1787년 칠곡 석전 야방포 답 1두락당 벼 생산량
1685∼1787년 칠곡 석전 야방포 답 1두락당 벼 생산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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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두락당 벼 생산량은 단기적으로 증감을 반복하고, 장기적으로 큰 변화가 없었다. 1두락 당 벼 생산량은 100년간 약간 감소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단위당 벼 생산량은 19세기 들어서도 큰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19세기 들어 단위당 벼 생산량이 크게 증가하였다는 징후를 살피기 어렵다.513)19세기 벼 생산량 변화와 관련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고. 김건태, 앞의 책 ; 정진영, 「19세기 중반∼20세기 초반 재촌 양반 지주가의 농업 경영」, 『대동 문화 연구』 62, 성균관 대학교 대동 문화 연구원, 2008. 시간이 흐를수록 경지 면적은 줄어드는 데 비해 벼 생산량은 증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개별 농가의 벼 수입은 감소하였던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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