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8권 고문서에게 물은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
  • 고문서에게 물은 조선시대 사람들의 삶을 내면서
김경숙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는 속담이 있다. 그러나 ‘기록’이라는 매체가 없다면 그 ‘이름’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을까? 얼마 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온 국민들이 애도하였지만 기록이 없다면 후손들은 그의 존재를 기억이나 할 수 있을까? 당대에는 아무리 이름을 날리더라도 몇 세대 지나지 않아 사람들의 기억 너머로 사라지고 행적이 인멸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자연의 섭리이다.

그러나 인류는 손을 자유롭게 쓰게 되면서부터 기록에 대한 남다른 집착을 보이며 기호, 그림, 문자 등 다양한 형태로 기록을 남겨 왔다. 인류의 기록은 먼 원시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장구한 세월 동안 끊임없이 지속되어 왔다. 이러한 기록들 덕택에 우리는 먼 옛날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세우고, 세종 대왕이 한글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온 국민들이 애도하였다는 사실도 후손에게 전할 수 있다. 이른바 역사학이 성립하고 우리가 역사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역사학은 대체로 서책(書冊), 문서, 금석(金石) 등 문자 기록에 근거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문서’는 특정 목적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해 작성한 기록으로, 문서를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그리고 목적성 내용 을 기본 조건으로 한다. 문서는 그때그때의 필요에 따라 작성하여 사용한 결과물로서 우리 생활과 떨어져서 생각할 수 없다. 이러한 문서가 역사학의 대상이 되려면 효력이 다해 현행 문서에서 역사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는 이를 ‘고문서(古文書)’라고 부른다.

우리 조상들은 한평생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수많은 문서를 생산하고 사용하였으며, 그 중 일부는 효력이 다하였음에도 계속 보존되어 오늘날까지 전해 오고 있다. 고문서의 최대 장점은 조상들의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 준다는 점이다. 편집 과정에서 주관적인 선입견과 왜곡이 가해질 수 있는 전적(典籍)과 달리, 당사자들이 직접 주고받은 문서이기 때문에 문서를 작성할 당시의 상황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고문서는 우리 조상들의 삶의 산물인 동시에 곧 그들의 삶을 비추는 거울인 것이다.

이 책은 생활 속의 문서, 문서 속의 생활을 추구한다. 때문에 ‘사람’이 중심이 될 것이다. 누가 언제 어떠한 이유로 어떠한 문서를 작성하여 누구에게 주었고, 그 문서는 관련인들 사이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고 영향을 주었는지 등 문서 생활의 메커니즘과 이를 바탕으로 문서에 투영되어 있는 당사자들의 삶과 생활 방식을 설명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이때 거시적 관점에서의 시대 상황 및 시대적 흐름을 놓치지 않도록 주의하였다. 다만 그들은 시대적 배경이자 문서의 배경으로 작용할 것이며, 주인공 역할은 사람과 문서가 할 것이다.

이를 위하여 이 책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한평생을 살면서 경험하는 생활 공간을 개인에서 출발하여 가족, 타인, 공동체, 국가로 확대해 가는 과정에 따라 사대부의 생애 주기, 가족과 친족 생활, 사회 경제 생활, 공동체 생활, 국가 및 관료 생활 등으로 나누고 각 단계의 구체적인 삶을 문서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제1장 ‘사대부의 생애 주기와 문서·기록’에서는 문서와 기록을 통해 생애 주기에 따른 조선시대 사대부의 삶을 추적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출생 에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거친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여, 노인이 되고 죽음을 맞이하는 생애 주기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하지만 구체적인 삶의 모습이나 이를 기록하는 방식은 큰 차이가 있다.

조선시대 부모들의 자식에 대한 기대와 자식으로 인한 기쁨과 슬픔은 평생도(平生圖), 이문건(李文楗)의 육아 일기인 『양아록(養兒錄)』과 별급 문기, 자식 제문(祭文)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조선시대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성인의 생활 방식을 모방하였고 오늘날에 비해 훨씬 일찍 어른이 되고 가정을 꾸렸다. 가족들이 주고받은 편지인 가서(家書)에는 가족 간의 애틋한 정이나 갈등, 서로 의지하며 생활을 꾸려 가는 가정생활의 면모가 잘 드러나 있다. 앞서 간 배우자를 기리는 제문에서는 부부간의 절절한 연모의 정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오늘날에 비하여 죽음을 맞이하는 시기가 빨랐던 탓에 회갑연(回甲宴), 경수연(慶壽宴), 회혼례(回婚禮) 같이 장수를 기념하는 연회와 그것을 기록한 기념첩(紀念帖)이 발달하였다. 죽음에 즈음한 가장이 자손들을 위해 남긴 유훈(遺訓)은 가법(家法)으로 계승되었으며, 자손들은 선조의 생애를 정리하여 자자손손 선조를 기억하도록 하였다. 그 속에서 조상은 후손들의 영원한 역할 모델로 살아남았다. 조선시대 사대부의 삶은 분명 우리 시대의 삶과 차이가 크지만 그 속에서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는 보편적인 감정을 확인할 수도 있고, 오늘날에는 잊고 만 중요한 가치를 발견할 수도 있다.

제2장 ‘가족과 친족 생활’에서는 전라도 부안현에 거주한 부안 김씨가의 문서를 중심으로 조선시대 가족 형태, 거주율, 가계 계승, 가계 운영, 친족 조직, 친족 활동 등의 가족과 친족 생활을 살펴보았다. 가족 형태는 성인 남녀가 결혼한 후 어느 쪽에서 사는가라는 거주율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 조선 전기 사람들은 대체로 결혼을 계기로 남성이 처가살이를 하였기 때문에 가족의 남성 구성원도 이성(異姓)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이성 양자나 동성(同姓) 양녀를 들이는 것도 낯설지 않았다.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부 터 종법(宗法) 의식이 확대되고 가계 계승 의식이 강화됨에 따라 처가살이가 크게 줄어들었으며 같은 성씨끼리 함께 사는 동성 마을이 크게 번창하였다.

조선 후기 사람들은 아들이 없을 경우 가계 계승을 위하여 양자 명문(明文)을 작성하고, 예조에서 양자 입안(立案)을 발급받아 양자를 들였다. 국가에서는 적첩구무자(嫡妾具無子)인 경우에만 양자를 허용하였으나, 실제로는 서형(庶兄)이 있어도 준호구(準戶口)를 위조하여 양자를 들였고, 양자를 들인 후 친자(親子)를 낳게 되면 파양(罷養)하거나 서로 양자를 바꾸는 방앗다리 양자가 등장하였다. 그리고 사대부가에서는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가계 운영에도 적극적이었다. 조선 전기에는 축보작답(築洑作畓)과 호노(戶奴)를 통한 다른 지역의 농장 경영에 주력하였으나 임진왜란 이후부터는 거주지 주변의 토지를 매입하여 농장을 형성하였고, 균분 상속으로 재산이 영세화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종손(宗孫)이나 장자에게 유산을 물려주는 ‘선택과 집중’을 하였다. 그리고 친족 결속을 위하여 문중(門中)을 결성하고 조상과 문중의 위업을 드러내는 현창 사업, 문중 구성원의 결속을 다지는 사업, 자제 교육 사업 등의 활동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문중 구성원들 사이에 적서(嫡庶) 분쟁, 재산 분쟁 등의 소송과 갈등도 발생하고 있었다.

제3장 ‘사회 경제 생활과 문서’에서는 사람들이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맺고 사회 활동을 하면서 부딪치는 각종 사회 문제와 갈등을 해결해 가는 과정을 그들이 남긴 문서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사회 문제와 갈등은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있게 마련이고, 개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는 민원(民願)이 되어 국가의 공권력을 필요로 한다. 조선시대 민인(民人)들은 소지(所志)를 매체로 하는 정소(呈訴) 활동을 통해 국가에 민원 해결을 요구하였다.

소지로 구체화된 조선시대 사람들의 정소 활동은 공증, 일반 민원, 소송 의 세 범주로 분류될 수 있다. 공증 정소는 관(官)에 소유권 변동을 신고하고 공증을 받는 절차로 ‘빗기입안’이 발급되었다. 노비 및 토지 거래, 속량(贖良)과 자매(自賣), 구활 노비(救活奴婢) 등 거래와 공증에는 조선시대 사람들의 사회 경제 활동과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다. 민원 정소에서는 국가 제도나 행정 업무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국가를 상대로 요구하였다. 사대부들의 민원은 유교 사회의 특성이 반영된 위선 사업(爲先事業)이 중심을 이루었고, 조선 후기 백성들의 민원은 부세(賦稅) 문제에 집중되었다. 여성들도 물론 정소 활동을 펼쳤다. 소송 정소에서는 개인 사이에 발생한 문제를 자체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국가에 해결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노비송, 전답송과 함께 특히 산송(山訟)은 조선 후기 사회를 대표하는 소송으로 전통시대 사회 갈등과 해결 방식을 그대로 보여 준다.

제4장 ‘문서로 본 공동체 생활’에서는 조선시대 사람들이 자신의 생활 공간을 중심으로 형성하고 있던 조직적 결속, 공동체적 연대와 생활 모습을 이들이 남긴 고문서를 통해 살펴보았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조선시대 사람들은 지역 사회에서 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공동체적 유대와 교류를 통해 각자의 생활을 영위하였다. 전통시대 사람들은 ‘인민(人民)’이라고 통칭하지만 사실상 신분에 따라 다양한 층위(層位)의 사람이 존재하였고, 이들의 생활 방식이나 공동체적 유대의 내용은 다양하였다. 여기에서는 조선시대 사람들의 공동체 생활 모습 전반을 망라하기보다는 촌락 생활의 주요 모습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문서를 몇 개의 주제로 나누어 소개하였다.

‘사족의 향촌 지배와 촌락 생활 문서’에서는 향약(鄕約), 동계(洞契), 촌계(村契) 등 사회 조직과 관련한 문서를 소개하였고, ‘교육 기관과 여론 형성 관련 문서’에서는 향교, 서원 등 교육 기관 및 이들 교육 기관에서 활동하던 유생(儒生)들의 정치적·사회적 역할, 여론 형성 과정에서 남긴 문서를 다루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각종 계와 결사 조직 문서’에서는 특정한 목 적을 실현하기 위해 결성된 여러 가지의 계(契)와 결사(結社) 조직 관련 문서를 소개하고 그 속에 담긴 조선시대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추적하였다.

제5장 ‘국가 및 관리 생활과 문서’에서는 사대부의 관료 진출과 공무 수행 과정에서 남긴 문서를 중심으로 지배층의 공직 생활과 국가 운영의 특징을 살펴보았다. 조선시대 관료의 생활은 문서로 둘러싸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조선의 지배층은 관리가 되기 위하여 대개 과거를 보아야 했고 합격하면 홍패(紅牌), 백패(白牌)를 받았다. 이어 관직에 임명되면 소속 관청에서 근무를 하였고 근무의 대가로 녹봉(祿俸)을 받았으며 근무 기간이 끝나면 물러났다. 업무와 관련해서는 다른 관청의 협조를 받아야 하는 일도 많았다. 이 과정에서 관교(官敎)나 교첩(敎牒) 같은 임명장인 고신(告身)을 비롯하여 서경(署經)과 관련된 사첩(謝牒), 녹봉을 받기 위한 녹패(祿牌), 퇴임과 관련해서 해유(解由) 등의 문서를 사용하였고, 업무 협조를 하는 상대 관부(官府) 지위의 높낮이에 따라 관(關), 첩정(牒呈), 첩(帖)이나 서목(書目)을 썼다.

조선에서 국왕과 신료는 함께 국정을 이끌어 가는 정치의 주체였다. 국왕은 왕명을 내려 국정의 다양한 업무를 수행하였다. 때로는 권위 있는 명령을, 때로는 일상적인 정무의 처리나 신료의 건의에 대한 답변을, 때로는 군사 동원에 대한 명령을 내렸고, 담당 승지를 통해 간단히 처리하는 문제도 있었다. 여기에는 교서(敎書), 교지(敎旨), 비답(批答)이나 유서(諭書), 유지(有旨) 같은 왕명을 이용하였다. 신료는 국왕에게 건의, 청원을 하였고 일상적인 정무나 간단한 사안을 보고하였으며, 지방에서 정무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상소(上疏), 계본(啓本), 계목(啓目)이나 초기(草記), 장계(狀啓) 같은 문서를 사용하였다. 이처럼 조선의 지배층은 과거를 거쳐 관리가 되어 관청의 업무를 처리하고 국왕과 함께 정치를 이끌어 갔고, 이러한 관료 생활과 국가 운영은 기본적으로 문서 행정의 범주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이 책에서 살펴본 다섯 가지 주제는 각각 독립적으로 다룰 수 있는 내용이다. 이런 주제를 한 자리에 모은 것은 각각의 주제별 연구에서 밝혀진 시대상을 바탕으로 그 속에서 살던 사람들의 역동적인 삶의 모습을 느껴보고, 아울러 고문서만이 전할 수 있고 고문서를 통해 새롭게 밝혀진 조상들의 생활상을 되짚어 보기 위해서이다. 실제 집필 과정에서는 필자마다의 개성이 작용하기 때문에 원래의 의도가 얼마나 성취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문서라는 매체를 통해서, 그리고 사람을 주인공으로 설정하여 접근할 것을 시도하였다는 점에서 이 책을 문서의 생활사나 문서의 문화사로 자리매김하려 한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의도하던 의도하지 않던 간에 수많은 문서를 만들어 내고 유통하고 있다. 21세기 고도로 발달된 디지털 시대에 세계는 인터넷으로 네트워킹되어 있고 핸드폰, 컴퓨터 등을 통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문서를 주고받는다. 새로운 형태의 문서 생활 속에서 우리는 올바른 문서 생활의 모델을 어떻게 창출하여 후손들에게 계승할까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오늘날 디지털 문서 생활은 전통시대 문서 생활과 별개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 또한 전통 문서 생활을 토대로 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전통시대 조상들의 문서 생활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오늘 우리의 문서 생활을 되돌아보고 미래 후손들의 문서 생활을 예측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2009년 9월

조선대학교 교수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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