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8권 고문서에게 물은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
  • 제1장 사대부의 생애 주기와 문서·기록
  • 1. 출생에서 성장까지
  • 자식, 얻은 기쁨과 잃은 슬픔
박현순

오늘날의 부모는 자식이 태어난 직후부터 아이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긴다. 그러나 조선시대 부모는 자식에 대한 기록을 그다지 남기지 못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자식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야 다를 리 없겠지만 부모들의 태도는 좀 달랐다. 오늘날의 가정에서는 자녀가 중심을 차지하지만 조선시대에는 부모의 봉양을 더욱 중시하였던 탓인지 아이의 성장 과정에 대한 기록은 매우 드물다.

그 가운데 이문건(李文楗, 1494∼1567)은 특이하게도 손자를 키우면서 『양아록(養兒錄)』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양아록』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아이를 키운 기록이다. 당대의 사대부 문화를 따라 한시(漢詩)로 썼지만 아이를 키우는 과정을 기록하였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육아 일기(育兒日記)와 비슷하다.

이문건이 『양아록』을 남기게 된 데에는 남다른 사연이 있었다. 이문건은 서울의 엘리트 가문 출신으로 자신도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 응교(應敎),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 등 요직을 지냈다. 그러나 명종이 즉위한 후 일어난 을사사화(乙巳士禍)로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조카 이휘(李輝)가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참형(斬刑)을 당하고 이문건은 연좌(緣坐)되어 쉰둘의 나이에 경상도 성주 땅에 유배되었다.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이문건은 자손들이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워 주기를 학수고대(鶴首苦待)하였다. 그러나 하나뿐인 자식은 병약하여 그의 기대에 부응할 수 없었다. 때문에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손자를 갈망하였다. 손자에게 집안의 명운이 달려 있었던 것이다.

이문건이 유배된 이듬해 아들 이온(李熅)과 혼인한 며느리 김씨는 딸 숙희와 숙복이를 잇따라 낳았고, 1551년(명종 6) 정월 마침내 이문건이 애타게 기다리던 아들을 낳았다. 이문건은 이 아이에게 숙길(叔吉)이라는 이름 을 지어 주었다. 『양아록』은 손자가 태어났을 때의 기쁨을 기록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천지자연의 이치가 생성을 계속하는 것은 과연 끝이 없어

어리석은 아들이 자식을 얻어 가풍(家風)을 잇는구나

지하에 계신 선조의 영령들이 응하여 많이 도와주시니

인간 세상의 뒷일은 조금이나마 풍성해 지리라.3)이문건(李文楗), 『양아록(養兒錄)』, 가정30년신해세(嘉靖三十年辛亥歲) : 이상주 역주, 『16세기 한 사대부의 체험적 육아 일기 양아록』, 태학사, 1997.

이문건이 손자를 얻은 기쁨은 단지 아이가 사랑스럽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숙길은 대를 이어 집안을 일으킬 후계자였고, 더더욱 소중한 손자였다. 그는 『양아록』을 쓴 이유에 대해 유배 중에 할 일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손자에 대한 사랑과 손자가 기울어진 가세(家勢)를 다시 일으켜 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었다.

손자를 얻은 기쁨은 어느 가정이나 똑같았다. 조선시대 할아버지 할머니도 손자를 얻은 기쁨을 선물로 표현하였다. 그 중에는 노비와 토지를 선물하는 경우도 많았다. 다음은 이황(李滉)의 큰조카인 이완(李完)이 장손을 얻은 후 특별히 노비와 토지를 하사한 문서의 내용이다.

가정 38년(1559) 기미 6월 28일 장손에게 문서를 작성해 주는 일

오늘은 네가 태어난 지 7일이 되는 날이다. 너를 ‘대립(大立)’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종사(宗祀)가 이로부터 면면히 이어질 것이니 내가 기쁠 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집안의 경사이다. 그래서 나의 부친 쪽에서 전래한 노(奴) 권막의 다섯째인 비 끝찌(두 살)와 온계 집 앞 우물가의 밭 열 마지기를 영영 너에게 준다. 네가 장성하여 장가를 든 후에 오래도록 이용하며 갈아먹되 만일 다른 일이 있거든 이 문서의 내용으로 관에 고해 바로잡아라.

재주(財主) 조부 진사 이(李)4)이수건 편, 『경북 지방 고문서 집성』, 영남 대학교 출판부, 1981, 434쪽, 「이식(李埴) 별급 문기」.

이완은 손자가 태어난 지 이레가 되자 기쁜 마음에 손자에게 두 살 된 비(婢) 끝찌와 집 앞의 밭 열 마지기를 선물하였다. 당시 이완의 나이가 마흔 여덟, 아들 이종도의 나이가 스물다섯이었으니 이완으로서는 기다려 마지않던 손자였다.

이완의 집안은 증조부 때부터 예안(禮安)에 세거(世居)하였다. 조부 이식(李埴)은 일찍 타계하였으나 작은 할아버지인 이우(李堣)와 숙부인 이해(李瀣), 이황이 크게 현달하여 가문이 번창 일로에 있었다. 따라서 처지가 이문건과 딴판이었지만 손자를 얻은 기쁨과 손자에게 거는 기대는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손자가 성장하여 집안을 이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똑같았던 것이다.

조선시대 사람은 아이가 자라면서 기쁜 일이 있을 때 특별히 노비, 토지, 집 등을 선물하였다. 자식이나 손자가 태어나거나 돌이 되었을 때, 오랫동안 병을 앓다가 회복되었을 때, 장성하여 혼인할 때, 과거에 합격하였을 때에 부모나 조부모, 처부모와 그 외 친척이 노비와 토지를 선물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또 노년이 되어서는 자신을 잘 봉양해 준 자식이나 손자 손녀, 사위, 조카에게 특별히 노비와 토지를 떼어 주는 경우도 많았다. 이처럼 특별히 선물을 하고 증명서로 만들어 주는 문서를 별급 문기(別給文記)라고 한다. 오늘날 전하는 별급 문기는 부모가 일상적으로 자식에게 기대하는 바가 무엇이었는지 잘 보여 준다. 그것은 평생도에 담긴 삶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양아록』에는 손자가 태어나서 열여섯 살이 될 때까지 기르며 순간순간 느낀 기쁨과 아픔의 감회가 표현되어 있다. 아울러 이문건의 일기인 『묵재일기(默齋日記)』에도 이숙길의 성장 과정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조선시대 소년 이숙길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자.5)이상주, 「이문건(李文楗)의 『양아록(養兒錄)』-16세기 한 사대부의 자손 양육의 체험적 시편(詩篇)-」(이상주 역주, 앞의 책 수록) ; 백혜리, 「조선 중기 『양아록(養兒錄)』을 통해 본 아동 인식」, 『아동 학회지』 22-2, 한국 아동 학회, 2001 ; 「묵재일기에 나타난 조선 중기 아동의 생활」, 『유아 교육 연구』 24-5, 한국 유아 교육 학회, 2004.

이숙길이 돌이 될 때까지의 기록은 매달 그의 신상에 나타난 변화를 보고 기쁨을 노래한 것이다. 이숙길은 4개월째 목을 가누고 6개월이 되자 앉 을 수 있었다. 곧이어 아랫니 두 개가 나고 옹알이를 하였으며, 7개월 무렵에는 기어 다니기 시작하였다. 8개월째에는 윗니 두 개가 나더니 연이어 이빨 여러 개가 났다. 이즈음 한 달여 동안 이질을 앓아 할아버지의 속을 태우기는 하였지만 다행히 고비를 넘겼다. 10개월째에는 제 힘으로 일어섰으며, 11개월에 들어서자 발을 떼기 시작하였고 돌이 다 되어서는 제법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말을 하였다.

이숙길의 돌날이 되자 가족들은 풍습을 따라 돌잡이를 시켰다. 필묵(筆墨), 옥환(玉環), 활, 쌀, 인장(印章), 떡, 옥책(玉冊) 등을 방 안에 늘어놓고 이숙길을 동쪽에 앉혀 두고 가족들은 이숙길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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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도호연(初度弧宴)
초도호연(初度弧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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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는 이리저리 기웃거리다가 기어가서 맨 먼저 필묵을 잡았다. 그 다음으로 옥환, 활, 쌀을 집었고, 마지막에는 인장을 잡았다. 돌잡이를 지켜본 할아버지는 손자가 잡은 물건들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며 아이의 장래를 축도하였다.

필묵을 잡은 것은 문장을 업으로 삼을 징조요, 옥환을 잡은 것은 덕있는 사람이 될 징후이며, 활은 육예(六藝), 쌀은 건강을 의미하며, 인장을 잡은 것은 관리가 될 조짐이다. 할아버지의 해석에는 아이의 재능이나 성향보다는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할아버지의 기대가 가득 담겨 있었다.

조선시대 사대부가에서는 돌잡이 외에 돌을 맞은 사내아이에게는 손수 어린 시절에 공부할 책을 써서 선물하는 풍습이 있었다. 돌배기가 당장 글을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 어떤 책을 써주느냐 하는 것은 역시 아이에 대한 부모의 희망을 담고 있는 것이다.

서산에 살던 김노응(金魯應, 1757∼1824)은 1784년 아들 김도희의 첫돌 을 맞이하여 손수 『효경(孝經)』 한 권을 써 주었다. 그가 『효경』을 써 준 것은 아들이 인륜에 밝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희망 때문이었다.

40여 년이 지난 후 아버지가 된 김도희는 아들 김상준의 첫돌을 맞아 손수 명종대 박세무(朴世茂)가 지은 『동몽선습(童蒙先習)』 한 권을 써 주었다. 그는 삼복더위에 책을 베껴 쓰며 다음과 같이 자신의 바람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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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희의 『동몽선습』 필사본
김도희의 『동몽선습』 필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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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아이의 돌날에 책을 써서 주는 것은 바로 우리나라의 풍속이다. 그리하여 지금 삼복더위를 당하여 『동몽선습』 한 책을 땀 흘려 가며 쓰노니 네 아버지의 애태우는 마음을 생각하고 오륜이 가장 엄중함을 체득하여 끊임없이 전진하여 그치지 말고 쉼 없이 부지런하여 더함이 있도록 하여라. …… 네가 이 글을 보면 척연히 두려워져 마음을 가다듬고 스스로 반성하기를 배로 더할 수 있을 것이다.6)한국학 중앙 연구원 장서각, 『선비가의 여경(餘慶)-경주 김씨 학주 후손가-』, 2006, 205쪽, 동몽선습(童蒙先習).

『동몽선습』은 『천자문(千字文)』을 뗀 아이들이 공부하는 아동용 교재로, 오륜(五倫)의 핵심과 중국·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담고 있다. 김도희가 이 책을 써 준 의도는 단순히 글자를 익히거나 지식을 습득하게 하려는 데에 있지 않았다. 자신의 아들이 오륜의 중함을 알고 이에 비추어 자신을 반성하는 인간이 되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았던 것이다.

또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자·손녀의 돌을 기념하여 노비와 전답을 선물하는 경우도 흔히 있었다. 재령이씨(載寧李氏)는 일찍 남편을 잃고 남편의 조카를 양자로 맞이하여 노년을 양자 부부에게 의지하였는데, 손자 하세웅(河世雄)이 태어나 어느덧 돌을 맞이하게 되었다. 1697년(숙종 23) 재령이씨는 손자의 돌을 맞이하여 기쁜 마음에 다음과 같은 별급 문기를 작성해 주었다.

정축년(1697) 12월 19일 손자 세웅에게 별급하며 작성한 문서

이 문서는 별급하는 일이다. 할머니는 오직 너의 부모가 극진한 효심으로 나의 마음을 위로하여 날마다 귀여운 손주를 안을 수 있기를 소망하였다. 지금 다행히 너의 튼튼한 모습을 보았으니 나의 기쁜 심정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너의 첫돌을 맞이하여 이에 약간의 토지와 노비로 마음을 표하고자 하니 내 뜻을 잘 헤아려서 물려준 전답과 노비를 잘 갈아먹고 부려라.7)한국학 중앙 연구원 장서각, 『선비가의 학문과 지조-서향세가(書香世家) 진양 하씨 단지 종택-』, 2005, 218쪽, 「정축년재령이씨별급문기(丁丑年載寧李氏別給文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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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령이씨의 별급 문기
재령이씨의 별급 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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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여러 가지 이유로 죽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돌이 되면 자신의 힘으로 서고 말도 시작하게 되니 어느 정도 사람의 형상을 갖추게 된다. 따라서 돌을 축하하는 데에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여러 가지 위기를 이겨 내고 장차 성인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기대가 깔려 있었다. 조부모나 부모가 아이의 돌을 맞이한 기쁨은 아이를 얻은 기쁨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이가 자라는 동안 언제 질병이나 사고로 목숨을 잃을 지 알 수 없었다. 주위에는 아이를 해칠 수 있는 여러 가지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문건은 돌이 지난 후에도 늘 손자의 병치레와 부상으로 노심초사(勞心焦思)하였다.

돌을 지난 이숙길은 학질(3세), 안질(4세), 일사병(5세), 경기(5세), 마마(6세), 귓병(9세), 홍역(10세) 등 많은 병을 앓으며 할아버지의 애간장을 태웠다. 손자가 아플 때마다 애가 닳은 이문건은 가능한 한 좋은 약을 구해 썼지만 그래도 낫지 않을 때는 자주 무당을 불러 굿을 하며 아이의 병세가 호전되기를 염원하였다. 유학을 공부하는 사대부로서 굿에 의지하기는 꺼림칙하였고 때로는 자신이 어리석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손자가 앓아누울 때마다 이문건은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애타는 심정을 오늘날의 부모와 마찬가지로 “너도 자식을 낳아 키워 보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아이가 병을 앓다가 회복하면 부모나 조부모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특히 마마나 홍역 같은 전염병을 앓아 거의 죽을 뻔하다 살아나면 기쁨은 배가되었다. 그래서 부모나 조부모는 마마 같은 중병을 앓다 회복한 아이를 위해 노비와 전답을 별급하기도 하였고, 국왕이나 왕세자가 마마나 홍역을 앓다 회복되면 이를 축하하는 과거 시험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그만큼 전염병으로 아이들을 잃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이숙길은 열 살이 되던 해 홍역을 앓기는 하였지만 할아버지의 정성 탓인지 오랜 병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러나 많은 부모는 전염병으로 자식을 잃는 아픔을 겪어야만 하였다.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南九萬, 1629∼1711)도 그런 경험을 한 사람이었다. 그는 딸을 저세상으로 보낸 슬픔을 다음과 같이 썼다.

너는 나의 둘째 딸이 되어 무술년(1658)에 나서 무신년(1668)에 세상을 떠났다. 아, 어찌 그리 짧았느냐. …… 뒷일로 전의 일을 미루어 보니 네 병은 의사가 잘못 치료하여 죽은 것이 분명하다. 자식이 태어나 수화(水火)를 면치 못하는 것은 부모의 죄라고들 한다. …… 아, 네가 일찍 죽은 것은 진실로 내가 자애롭지 못하였던 탓이다. 아,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느냐. 네가 병이 위중할 때에 살이 녹아 뼈가 드러났는데 자리는 해지고 거적도 없어서 누워도 편안하지 못하였다. 입맛이 변하여 죽을 삼키지 못하면서도 생선회를 먹고 싶어 하였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이 때문에 더 한스럽다. 네가 죽은 후 2년이 되어 내가 청주목사에 제수되어 너의 무덤을 지나다가 통곡하기를 “주육(酒肉)이 풍성한들 어찌 즐거우며, 벼슬이 화려한들 슬픔만 더할 뿐이다.”고 하였다. 아, 너는 아느냐 모르느냐.8)남구만(南九萬), 『약천집(藥泉集)』 권26, 「상녀묘지명(殤女墓誌銘)」.

남구만은 스물여덟이 되던 1656년(효종 7) 문과에 급제한 후 서른이 되던 해에 둘째 딸을 얻었다. 손위로는 딸 하나와 아들 하나가 있었다. 그는 벼슬살이에도 승승장구(乘勝長驅)하여 마흔 살에 형조 참의, 대사간에 올랐으니 그의 생애는 평생도에서 볼 법한 영예로 점철(點綴)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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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구만 초상
남구만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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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는 바로 그해에 열 한 살된 딸을 홍역으로 잃었다. 서울에 있으면서 의원이 시키는 대로 찬 약으로 열을 치료하려고 하였으나 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말았다. 그 후 10여 년이 지나 며느리가 홍역을 앓았는데, 의원의 처방을 받아 돼지 오줌을 마셔 열을 다스린 후에 쾌차(快差)할 수 있었다. 이 일을 계기로 남구만은 둘째 딸이 목숨을 잃은 것은 자신이 잘못된 처방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자책하였다. 그가 쓴 딸의 묘지명(墓誌銘)에는 딸의 죽음을 놓고 자책하는 아버지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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