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8권 고문서에게 물은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
  • 제1장 사대부의 생애 주기와 문서·기록
  • 3. 노년에서 죽음까지
  • 망자에 대한 기억
박현순

부모가 돌아가신 후 자식들은 상을 치르고 시묘살이를 한 뒤에도 제사를 지내며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효를 다하였다. 그러나 이 밖에도 돌아가신 부모의 행적(行蹟)을 정리하여 세상에 전하는 일이 남아 있었다. 유고를 간행하고 묘비를 세우는 일이다.

망자는 기록으로 세상에 기억된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흩어진 선조의 유고를 정리하여 세상에 전하려고 하였다. 선대의 유고는 조상의 성정(性情)과 정신(情神)이 깃든 산물이다. 비록 돌아가신 후에라도 삼가 받들어 보존하여 후세에 전하는 것이 자손으로 효를 다하는 것이다. 김휴(金烋, 1597∼1638)는 선대의 유고를 정리하는 일에 대해 특별히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예에 이르기를 “홍수나 불이 나거나 도적이 들면 먼저 사당(祠堂)을 구하고 신주(神主)와 남기신 글을 옮긴다.”고 하였다. 신주처럼 중한 물건과 더불어 남기신 글을 함께 거론한 것을 보면 그 일이 큰 것이 아니겠느냐. 옛사람들이 부모를 섬기는 마음은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지만 비록 의복이나 기용(器用) 같은 작은 것도 모두 경건함을 다하여 받들고 삼가 보관하여 사모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 하물며 남기신 문자는 성정이 나타나고 정신이 깃든 것임에야 어떠하겠는가. 자손이 된 자가 즐겨 수습하지 않고 보관하지 못한다면 끝내는 산일(散逸)되어 사라질 것이니 어찌 그 도리이겠는가. 자손은 선세(先世)의 문자에 대하여 마땅히 경건히 받들고 조심하여 보관하되 전할 만한 것인가의 여부는 논하지 않는다. 하물며 전할 만한 것임에랴. 반드시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완성하여 깨끗하게 여러 건을 필사하여 갑작스런 변고를 당하더라도 흩어져서 없어질 우려가 없게 하면 돌아가신 조상에게 효도하는 도리를 행하는 것이 클 것이다.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70)김휴(金烋), 『경와집(敬窩集)』 권6, 유계오사(遺戒五事).

유고는 보존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식(文識) 있는 사람들의 손을 거쳐 문집으로 간행하는 것이 더 이상적이었다. 그러나 흩어져 있는 유고를 수합하는 일도 그리 용이하지 않았거니와 간행에는 많은 비용이 소요되었다. 게다가 세상에 내놓을 만한 특별한 글이 없는 사람도 많았다. 그리하여 문집을 간행한 경우는 극소수에 불과하였으며, 그것도 대부분 여러 세대가 소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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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산세고(晉山世稿)』
『진산세고(晉山世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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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들이 좀 더 관심을 쏟은 것은 선대의 행적을 정리하여 묘비를 세우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시묘살이를 하거나 은퇴하여 고향에 머물 때 묘비문(墓碑文)을 지어 비를 세우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이황은 오랜 기간의 준비에도 불구하고 선대의 묘갈(墓碣)을 세우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죽음에 즈음하여 아들에게 남긴 유계에서 선세의 묘비를 세우지 못한 것을 종천지통(終天之痛)이라 말하며 아들에게 반드시 묘갈을 세우도록 당부하였다. 이런 유언은 성혼(成渾) 등 여러 사대부의 유서에서 발견된다. 김휴는 유서에서 이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묘비명(墓碑銘)과 묘지명(墓誌銘)은 조상을 드러내는 한 가지 도(道)이다. 내가 이런 뜻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게을러 시간을 끌다 선세의 언행을 아직도 초기(草記)하지 못하였으니 불효의 죄가 크다. 내 자손이 된 자들은 마땅히 더욱 듣고 보아 남김없이 상세히 기록하고 구할 만한 곳에 글을 구하여 유명(幽冥)에 숨겨진 덕을 세상에 드러내고 후세에 전하면 그 조상을 드러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사람들 중에서 숨은 덕이 있는 데도 자손들이 드러내지 못하여 매몰되어 전하지 못하게 된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아, 슬프다. 사람이 마음과 정성을 다하면 천하에 이루지 못할 일이 없으니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느냐.

김휴는 조상의 행적을 보존하고 세상에 드러내는 일을 자손의 도리로 인식하였다. 많은 사람이 반드시 그와 같이 적극적으로 묘비에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큰 묘비가 아니라도 묘지를 묻고 묘표(墓表)를 세우는 것은 여러 대가 지나더라도 묘의 유실을 방지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반드시 간략한 생애를 적은 묘표를 세워 묘의 주인을 알아 볼 수 있도록 유언한 경우도 자주 보인다.

물론 모든 양반이 생의 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조상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데에는 후손들의 지속적인 관심, 노력, 재력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기록을 남긴 사람을 행운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인이 된 사람을 기억하며 생애를 정리한 기록으로는 연보(年譜), 행장(行狀), 묘갈명(墓碣銘), 묘비명, 묘지명, 묘표 등 여러 종류가 있다. 때로는 제문으로 그 생애를 돌이켜 추억하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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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양 묘갈명(李繼陽墓碣銘)
이계양 묘갈명(李繼陽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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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보는 생애를 가장 자세하게 정리한 기록으로 출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시간순으로 정리한 것이다. 연보를 작성하기 위해서는 생전의 행적을 보여 줄 수 있는 기록이 풍부하게 남아 있어야 한다. 그래서 특별히 명망 있는 인물이나 평소 꼼꼼하게 일기를 쓴 사람이 아니라면 연보를 만드는 것은 쉽지 않았다.

행장, 묘갈명, 묘비명, 묘표, 묘지명 등은 행적을 정리한 글이다. 이런 글들은 비지(碑誌)라고도 한다. 모두 망자의 인적 사항, 가계(家系), 생전의 행적을 기록하고 이를 기리는 내용을 담는다. 다만 형식과 문체는 다소 차이가 있다. 후손이 직접 작성하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 유명한 사람에게 자료를 주고 글을 부탁한다. 후손들에게는 어떤 사람에게 글을 받을 것인가 하는 것이 큰 관심사였다. 그래서 당대의 명망가(名望家)나 문장가(文章家)의 문집에는 수많은 비지문이 실려 있다. 그만큼 글을 구하는 사람이 많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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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룡 연보 초기(柳成龍年譜草記)
유성룡 연보 초기(柳成龍年譜草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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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수옹 행장(宋睡翁行狀)
송수옹 행장(宋睡翁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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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수옹 행장(宋睡翁行狀)
송수옹 행장(宋睡翁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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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장은 비지류 중에서 가장 긴 형태의 기록이다. 비에 새기는 다른 기록과 달리 문서의 형태로 남는다. 중국에서는 한나라 때부터 행장을 지었는데 6조 시대부터 일반화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조선 전기의 인물인 홍귀달(洪貴達, 1438∼1504), 이극배(李克培, 1422∼1495), 박은(朴誾)의 처 고령신씨(高靈申氏, 1479∼1504)의 행장이 가장 이른 시기에 속한다. 『조선 왕조 실록』에 실린 국왕의 행장 중에서는 성종(1457∼1494)의 행장이 가장 이른 시기에 작성된 것이다. 행장은 연보를 제외하면 가장 자세하게 행적을 정리한 기록으로 묘비명 등을 작성하는 기초 자료로도 활용되었다.

묘비명, 묘갈명, 묘표는 모두 묘소 앞에 비를 세우기 위해서 짓는 글이다. 행장과 달리 고려시대부터 나타나지만 조선시대에 본격적으로 유행하였다. 원래 묘비는 위가 네모진 것, 묘갈은 위가 둥근 것을 가리켰으며, 묘갈은 5품 이상의 관직을 지낸 사람의 묘에만 세울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엄밀하게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였다. 묘비와 묘갈도 기본 형식은 행장과 유사하지만 망자의 행적을 기리는 ‘명(銘)’이라는 운문(韻文)을 추가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묘표는 묘비나 묘갈에 비해 관직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세울 수 있는 비였다. 묘비나 묘갈에 비해 내용이 간단하고 명문이 없다. 이에 비해 신도비(神道碑)는 정2품 이상의 관직을 지낸 사람만이 세울 수 있었으며, 귀부(龜趺)와 이수(螭首) 장식이 있다.

묘지는 무덤의 주인을 밝히기 위해 짓는 글이다. 죽은 사람의 생몰 일시, 행적과 더불어 무덤의 방향 등을 기록하고 돌에 새기거나 도자(陶瓷)로 구워 무덤 앞에 묻었다. 행장이나 묘갈, 묘표와 달리 묘지는 고려시대부터 많이 작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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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립 묘지
신립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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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장이나 여러 비문은 기본적으로 조상의 행적을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다. 그 특성상 망자를 예찬하는 것으로 내용이 일관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제자나 자손들은 가급적이면 권위 있는 명망가에게 부탁하여 조상의 행적을 세상에 드러내기를 원하였다.

이황은 이를 우려하여 죽기 전에 스 스로 자신의 묘지명을 완성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명문(銘文)만 지었을 뿐 전체를 완성하지는 못하였다. 이황이 죽기 직전에 쓴 유계(遺戒)에는 그 사연이 다음과 같이 전한다.

비석은 쓰지 말고 다만 작은 돌에 앞면에는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 쓰고 뒷면에는 향리(鄕里), 세계(世系), 지행(志行), 출처(出處)의 대개를 『가례(家禮)』 중에서 이른 바와 같이 간략하게 써라. 이 일을 만약 남에게 짓도록 부탁한다면 서로 아는 기고봉(奇高峯) 같은 이는 반드시 장황하고 실이 없는 것들로 세상 사람들에게 웃음을 살 것이다. 그래서 일찍이 뜻한 바를 스스로 쓰고자 하여 먼저 명문(銘文)을 지었는데, 그 나머지는 어찌하다가 완성하지 못하였다. 초안이 난초(亂草) 중에 있으니 찾으면 그 명(銘)을 쓰는 것이 좋겠다.71)이황, 『도산전서』 4, 유계(遺戒), 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1980, 315쪽.

이황은 아들에게 큰 비석을 세우지 말고 고향, 세계, 행적, 관력(官歷)을 간단히 기록한 작은 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또 앞면에는 관직을 제외하고 ‘도산으로 물러나 만년에 은거한 진성 이공의 묘’라고 써 주기를 희망하였다. 지금 전하는 이황의 묘비는 그의 유언대로 아주 소박한 모습으로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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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 유계
이황 유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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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남에게 비문을 부탁하지 말라는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황은 특별히 기대승(奇大升) 같은 이에게 맡기지 말라고 언급하였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제자들은 기대승에게 묘갈과 묘지문을 부탁하였다. 이황의 아들 이준은 부친의 뜻을 따르려고 하였지만 제자들은 가능한 한 스승을 세상에 드러내기를 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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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 묘비
이황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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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장이나 묘비는 주인공의 행적을 단순히 나열하는 것은 아니다. 망자가 얼마나 세상의 사표(師表)가 될 만한 인물이었는가를 전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망자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보다는 세상에 익숙한 일반적인 규범으로 망자의 삶을 정리하여 기록하게 된다.

만약 선조가 세상으로부터 지탄을 받은 인물이라도 후손의 입장에서는 불가피한 정황이나 내면의 갈등으로 이를 합리화시키려고 하였다. 또 크게 내세울 만한 이력이 없는 사람이라면 세상에 초연한 은일지사(隱逸之士)로 선조의 삶을 조명하였다. 결국 후손들이 전하는 행적은 일반적인 도덕률에 비추어 아름답고 내세울 만한 기억으로만 채워져 있다. 그 가운데 행장이나 묘비문도 상투화되어 망자의 내면은 망실되고 만다. 그리하여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한 사람이 지으면 모든 사람이 이름만 바꾸어 그대로 쓸 수 있다고 하여 그 상투성을 비판하였다.

현재 전하는 수많은 비지문을 보면 박지원의 지적은 헛말이 아니다. 망자가 누구든 간에 고매한 인품과 도덕적인 행동, 세속의 권력과 부를 거부한 은일지사의 모습이 상투화되어 있다. 온 정성을 다해 부모를 받는 효자였다는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이런 비지문의 상투성을 거부하며 스스로 묘지명이나 묘표를 지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연은 다양하였으나 일찍부터 자찬(自撰) 묘지명을 지은 사람은 대개 당대의 명망가였다. 이들은 이황과 마찬가지로 후손들이 자신의 삶을 장황(張皇)하게 포장하는 것은 세상의 비웃음을 자초하는 일이라고 인식하였다. 그리하여 대개는 간결하게 자신의 가계와 이력만을 기록한 묘지나 묘표를 스스로 저술하였다. 한 예로 홍문관 대제학을 지낸 서명응(徐命膺, 1716∼1787)의 자표(自表)에는 화려한 관직 생활이 단지 27년 동 안 벼슬살이를 하였다는 한 구절로 축약되어 있다. 또 자찬 묘지명을 쓴 이들은 하나같이 화려한 비를 세우지 말고 작은 비석에 호(號)와 본관(本貫) 정도만 써 달라는 유언을 남기기도 하였다.72)안대회, 「조선 후기 자찬 묘지명(自撰墓誌銘) 연구」, 『한국 한문학 연구』 31, 한국 한문학회, 2003, 244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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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응 초상
서명응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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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자찬 묘지명을 지어 규범화된 세상에 대항하여 자신의 존재를 항변하려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외적인 것보다는 자신의 내면, 자신이 추구해 온 가치와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을 표현하려고 하였다. 김광수(金光遂)와 남종현(南鍾鉉)이 쓴 글을 보자.

좋은 가문에 태어났으나 번잡하고 호사스러움을 싫어하여

법도와 구속을 벗어나 물정에 어둡고 편벽됨에 빠졌다

괴기한 것을 좋아하는 고칠 수 없는 벽(癖)을 가져

옛 물건과 서화, 붓과 벼루, 그리고 먹이 그 대상이었다.

……

가난으로 끼니가 끊긴 채 벽만 텅 빈 채 있어도

금석문과 서책으로 아침저녁을 대신하였으며

기이한 물건이 손에 이르면 가진 돈을 당장 주어 버리니

벗들도 등 뒤에서 손가락질하고 식구들도 꾸짖었다

……

보잘것없는 나고 죽은 해야 토끼의 뿔 같은 것

이름과 자를 말하지 않아도 나인 줄을 알리라73)김광수(金光遂), 상고당생광명(尙古堂生壙銘) : 안대회, 앞의 글, 255쪽 재인용.

말을 꺼내면 반드시 기휘(忌諱)에 저촉되고, 행동을 하면 반드시 풍속과 어긋났다. 제 성질대로 살기 때문에 집안사람조차 가까이하지 않고 저 혼자 행동하기 때문에 벗들도 그를 버렸다. 문장을 일삼지 않으니 되어 먹지 못한 글쟁이로 지목당하는 것을 감히 사양하지 않고, 천한 주제에 귀한 자를 섬기지 않으니 버릇없는 사람이라 비난당하는 벌을 피할 길이 없다. 그러니 천지 사이에 나 같은 자가 있어서 되겠는가.74)남종현(南鍾鉉), 『월암집(月巖集)』, 자묘지(自墓誌) : 안대회, 앞의 글, 259쪽 재인용.

김광수와 남종현이 묘사한 자신의 일생은 사대부가 추구하는 전형적인 삶의 모습은 아니다. 기이한 것을 좇고 세상과 충돌하는 모습은 오히려 사대부가 경계하는 바이다. 그러나 김광수는 그 속에서 다른 사람과는 다른 자신의 모습을 찾았으며, 남종현은 자조적인 표현으로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려는 의지를 표현하였다. 여기에는 자신의 신념에 대한 확신과 자신에 대한 연민, 때로는 세상에 대한 냉소와 조롱이 담겨 있기도 하였다.

18세기 동인(同寅)들 사이에서는 스스로 묘비·묘지문을 작성하는 것이 유행하였다. 자신이 직접 쓰지 않더라도 생전에 자신을 잘 이해하는 지기(知己)에게 미리 글을 받아두는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판에 박힌 듯한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자신만의 개성과 신념을 기록하려고 하였다. 자아에 대한 인식이 고조되던 18세기의 시대 분위기 속에서 사회적 규범을 깨고 자신이 추구한 자신의 모습을 후대에 전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었던 것이다.75)안대회, 앞의 글.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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