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8권 고문서에게 물은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
  • 제2장 가족과 친족 생활
  • 2. 가계 계승
  • 규정과 실제의 차이
  • 장자의 불법 출계
전경목

우반동의 부안 김씨가에 소장되어 있는 양자 입안 세 건 중 김수종과 김득문의 입안을 살펴보노라면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입안에는 김수종과 김득문이 김문(金璊)과 김방보(金邦保)의 둘째 아들로 되어 있는데 족보에는 다 맏아들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입안은 당시에 작성한 것이고 족보는 후에 편찬한 것이기 때문에 사료로서의 신빙성은 입안이 족보보다 더 클 것 같은데, 여러 자료를 종합해 보면 아무래도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우선 김수종의 조부인 김명열이 김수종이 태어나 한 돌이 지나자 너무 기뻐서 특별히 재산을 나누어 주면서 쓴 글을 보면, 그는 이 집안에서 태어난 첫 번째 적손(嫡孫)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김명열이 1672년(현종 13) 정월 11일에 김수종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면서 작성한 문서를 살펴보자. 다음 문서에 나오는 수종(壽宗)은 김수종(金守宗)의 초명(初名)이다.

임자년(壬子年) 정월 초7일 손자 수종(壽宗)에게 주는 명문97)『부안 김씨 우반 고문서』, 204쪽, 허여문기 12.

이 명문을 작성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내) 나이가 육십이 되도록 친손자(姓孫)를 얻지 못하니 비단 슬하에 의지할 곳이 없을 뿐만 아니라 (혹시) 후사가 끊어지지 않을까 항상 크게 근심하여 왔다. (그런데 때마침) 막내아들 문(璊)이 비로소 아들을 낳아 이름을 수종이라 하였다. (그는) 태어난 지 겨우 한 돌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눈썹이 뚜렷하고 살결이 백옥(白玉)이나 눈(雪)처럼 뽀얀해 사랑스러우며 용모가 준수하여 장차 크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큰아들 번(璠)이 만일 끝내 아들을 낳지 못하면 (이 아이가) 당연히 봉사손(奉祀孫)이 될 것이니 그 경사스럽고 다행함을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병중에 한가로이 거처하며 (아이를) 보듬어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장난치며 세월을 보내니 늘그막에 위안과 즐거움이 매우 크다. 경사(慶事)나 즐거움이 있을 때 특별히 재산을 분배하는 것은 (하나의) 관례이다. (따라서) 다행히 이와 같은 손자를 얻었으니 어찌 별급이 없을 수 있겠는가. ……

이 문서를 통하여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김수종이 태어나기 이전에는 김명열의 장자인 김번이나 차자인 김문에게 아들이 없었다. 그리고 김명열이 이 문서에서 지시한 바대로 김번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3년 후인 1675년(숙종 1) 정월에 수종을 입양하여 종자(宗子)로 삼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조의 입안에는 김문의 둘째 아들(金璊第二子)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혹시 김수종이 태어나기 이전에 김문이 아들을 낳았으나 불행히 영아 때 사망한 것은 아닐까 하는 추측도 가능한데 그것도 아닌 것 같다. 만일 그러한 일이 있었다면 김명열이 앞의 별급 문기에서 이에 대해 한마디라도 언급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입안에서 김수종을 김문의 둘째 아들이라고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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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답을 제대로 찾으려면 사료의 신빙성 문제 등 여러 난제를 검토해야 하지만 그렇게 한 이유는 의외로 매우 간단하였다. 법적으로 장자는 타인에게 출계할 수 없었고, 심지어 부모가 모두 사망하였을 때에도 역시 출계하지 못하도록 한 규정이 있었기 때문이다.98)『대전회통(大典會通)』, 예전(禮典), 입후(立後). 그렇기 때문에 김수종이나 김득문이 사실은 장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차자(次子)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래야만 국왕이 입양을 허가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다음에서 살펴볼 박의장(朴毅長)의 경우, 중부(仲父)인 박세현(朴世賢)에게 입양되었으나 예조에서 그가 박세렴(朴世廉)의 장자라는 사실을 알고서 왕에게 보고하지 않는 바람에 입안을 받지 못하다가 결국 파양(罷養)되고 말았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입양 사례를 조사해 보면 이러한 규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장자를 양자로 보내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물론 이때에는 피입양자(被入養者)가 장자가 아닌 것처럼 관련 서류를 모두 위조하여야 했다. 실제 입양 사례를 살펴보면 대체적으로 종가에서 양자를 들일 때에는 지자(支子) 집안의 장자를 보내고, 이와 반대로 종가에서 지자 집안으로 양자를 보낼 때에는 차자 이하를 보내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다. 종가의 지위를 높이고 지가(支家)의 지체를 낮추어야만 입양된 종손의 위상이 확고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김수종이나 김득문과 같은 경우에도 입양 허가를 요청하는 탄원서를 거짓으로 작성할 수밖에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에 첨부되는 준호구 등을 위조하여야 했다. 이때 호적을 관리하는 호적색(戶籍色)이나 입양 관련 업무를 취급하는 예리(禮吏)의 전적인 협조 없이는 불가능하였다. 물론 호적색이나 예리는 준호구를 고쳐서 발급해 주는 대신 상당한 돈을 챙겼을 것은 미루어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렇지만 이렇게 준호구라도 고쳐서 입양 신청을 하지 않으면 국왕의 허가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뇌물을 주고 관련 서류를 위조하는 불법적인 행위를 감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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