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8권 고문서에게 물은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
  • 제2장 가족과 친족 생활
  • 2. 가계 계승
  • 규정과 실제의 차이
  • 적자 승계 집착
전경목

우반동의 부안 김씨가의 양자 입안을 살펴볼 때 드는 또 한 가지의 의문은 김수종을 입양할 당시에 그의 양부인 김번에게는 놀랍게도 아들이 이미 한 명 있었다는 사실이다. 비록 서자(庶子)이기는 하지만 김수종보다 무려 12살이나 연상인 김수동(金守同)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김수종을 입양한 지 10년째 되는 1684년(숙종 10)에 부안현에서 김번에게 발행한 준호구를 살펴보면 김번은 14세된 양자 수종과 26세 된 첩자(妾子) 수동과 함께 살고 있었다.99)『부안 김씨 우반 고문서』, 32∼33쪽, 호구 단자 7 참조. 이 준호구에 적힌 대로 수동이 26세라면 수종을 입양할 무렵 16세나 되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김번은 자신에게 비록 첩자이긴 하지만 장성한 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불법적으로 양자를 들였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입양하려면 가장이 적첩구무자(嫡妾俱無子), 즉 가장과 적실 또는 첩 사이에 낳은 아들이 없어야만 가능하였다. 만일 서자 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입양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였다. 그런데 김번은 왜 법을 어기면서까지 서자 김수동의 존재 사실을 숨기고 김수종을 입양하였을까? 이제 이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결론부터 말한다면 김번이 장성한 서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양자를 들인 것은 그 당시의 사회 풍조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만일 조선 중기 이후 어느 한 명문가에서 적자를 낳지 못하였을 경우에 서자를 승중(承重)시켜 그 가문을 잇도록 하였다면, 그의 가문은 그날 이후 서얼의 가문이 되어 가문의 지위와 명예는 하루아침에 곤두박질치고 말았을 것이다. 율곡 이이의 직계 후손들이 그런 경우이다. 서얼허통(庶孼許通)을 주장한 이이는 서얼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는 슬하에 적자 없이 서자만 있었는데 후에 서자를 승중시켜서 가통을 잇게 하였다. 그런데 이이의 사후에 그의 직계 후손들은 명문가의 자녀들과 전혀 혼인할 수가 없었으며, 그래서 결국 명문가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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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번 준호구 부분
김번 준호구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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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실을 김번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미 장성한 자기의 서자가 버젓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게다가 자신의 아들을 양자로 보내기로 약속하였던 동생 김문이 느닷없이 사망하여 동생의 제사를 받들어 줄 후손이 없는 줄 알면서도 할 수 없이 수종을 데려다 자신의 후계로 세울 수밖에 없었다. 김수종을 양자로 입양하는 것이 자신의 피를 이은 서자와 별안간 남편이 사망하여 홀로 된 제수에게 차마 못할 일을 저지르는 것이 될지라도, 그렇게 하는 것만이 자신의 가문을 지키는 길이었기 때문에 김번은 다른 선택을 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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