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8권 고문서에게 물은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
  • 제2장 가족과 친족 생활
  • 2. 가계 계승
  • 방앗다리 양자와 파양
  • 파양
전경목

김번의 고민을 통하여 짐작할 수 있듯이 입양하였다가 후에 아들을 낳자 가계를 친자(親子)에게 물려주기 위해 입양을 취소한 예가 종종 있었다. 당시의 세속에서는 이러한 것들을 그릇된 관행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이에 대해 이이는 ‘입후의(立後議)’라는 글에서 만일 후사가 없어서 일단 양자를 삼았으면 후에 비록 친아들이 출생하였다 하더라도 파양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 중 주요한 대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만일 세속(世俗)의 상정(常情)에서 입후의 일에 대해 논한다면, 아들이 없어서 계후를 하였다가 후에 친자를 낳으면 파양하여 본가로 되돌려 주는 것이 불가한 것은 아닌 듯합니다. 그러나 성인(聖人)이 마련한 예(禮)의 본뜻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부자의 은정(恩情)은 천성(天性)입니다. 자식을 낳아 고생해서 길렀으니 그 은혜는 하늘같이 한이 없는데도 만일 다른 사람의 양자가 되면 바로 양부(養父)를 아버지로 삼고 생부(生父)를 백숙부(伯叔父)처럼 여겨 상복(喪服)을 낮추어 부장기(不杖朞)로 하게 되니, 이로써 자식을 낳아 기른 하늘같이 한없는 은혜가 (곧바로) 양부에게 옮겨지게 됩니다. 양부자(養父子)로 정하여 자식을 사랑하고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마음이 이미 굳어졌으니, 비록 양부가 친자를 낳았더라도 어찌 변할 리가 있겠습니까. …… 양자는 이미 생부를 버리고 양부를 아버지로 삼았는데 양부는 유독 친자를 버리고 양자를 적자로 삼지 못하겠습니까. 만일 양부가 친자를 버리는 것이 도리가 아니라면, 양자가 생부를 버리는 것도 도리가 아니오니 성인이 어찌 예를 마련하고 법을 만들어 만세에 전하였겠습니까. 양자는 생부를 버릴 수 있는데도, 양부는 친자를 버릴 수 없다면, 이는 천하에 다만 인자한 아버지만 있고 효도하는 아들은 없는 것이오니 어찌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이 본래 그러한 것이겠습니까. ……

지금 양부의 뜻이 저 아들은 친자가 아니니 내가 만일 아들을 낳는다면 당연히 양부자의 인연을 끊을 것이라 생각하거나, 또 양자는 저 양부는 친부(親父)가 아니니 저 양부가 만일 아들을 낳는다면 나는 당연히 물러갈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양부와 양자는 두 마음을 품고 서로 해치게 되며 구차스럽게 임시로 합친 것이니 그 가도(家道)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에는 양부자의 인연을 끊는다는 글이 없으며 남의 양자로 간 사람과 시집간 딸을 논하여 모두 상복을 한 등급을 낮추었는데, “딸이 시가(媤家)에서 내쫓기면 상복을 그전대로 입는다”는 글은 있어도 (파양된) 아들이 상복을 그전대로 입는다는 의논이 없으니 양부자의 인연을 끊는 것을 허용하 지 않는다는 것은 이로써 명백합니다. 성인이 예를 마련한 본뜻은 실로 세속의 상정으로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 지금부터 이후로는 파양하지 않는 법을 제정하여 길이 변하지 않을 법전이 된다면 강상(綱常)과 윤리 기강이 거의 바루어지고 천하 후세의 부자 관계가 정해질 것이니 삼가 성상(聖上)께서 허가해 주시기 바랍니다.102)『국역 율곡전서』 1책, 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1996, 154∼156쪽.

‘입후의’에 따르면 이이가 살던 당시에는 비록 계후하였다 하더라도 후에 친자를 낳으면 양자를 파양하여 본가에 보내는 것이 당연한 하나의 풍습이었다. 그러나 이이는 이를 천리나 인정이라는 측면에서 보아도 지극히 부당한 일이며, 예법(禮法)에도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입후의’를 지어 부당성을 알리고 파양을 금지시키는 법을 제정토록 국왕에게 건의하고 있다.

기왕 파양에 대해 언급하였으니 조선 전기에 수양자(收養子)로 삼았다가 파양한 사례를 하나 소개하겠다. 경상도 영해(寧海)에 살던 경상 좌도(慶尙左道)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박세현(朴世賢)은 그의 슬하에 적자녀(嫡子女)가 없자 아우인 박세렴(朴世廉)의 아들 박의장(朴毅長)을 양자로 삼을 계획 아래 세 살 이전에 데려다 길렀다. 그 후 그는 왕에게 두 차례나 상언(上言)을 제출하여 박의장을 양자로 삼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그때마다 예조에서는 이를 국왕에게 보고조차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박의장이 박세렴의 장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박세현의 첩이 아들을 낳았는데 때마침 조정에서는 첩자도 납속(納粟)을 하면 벼슬살이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고 아울러 승중시켜 적자와 동등하게 해준다고 하였다. 당시에 이이 등이 주장하여 납미허통(納米許通)이 널리 확대되어 실시되고 있었다.103)『조선 왕조 실록』 21책 389쪽. 선조 16년 4월 14일조 참조. 영일(迎日)에서 살고 있던 박세렴은 자기의 형인 박세현이 첩자에게 가계를 계승하도록 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서 자신의 아들을 돌려보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 자 박세현은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박의장을 파양하고 본가로 돌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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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20여 년 동안 부자로서 지낸 정이 커서 그사이 박의장이 결혼하고 또 무과(武科)에 합격하였을 때 박세현이 박의장에게 특별히 지급하였던 노비와 토지 등을 모두 그대로 주고 여기에 더하여 계집종 개복(介福)을 후소생(後所生)까지 포함하여 지급하였다. 파양을 하면 그 전에 지급하였던 재산을 모두 환수하는 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풍습이었는데 박세현은 그렇게 하지 않고 오히려 계집종 한 명을 더 지급하였던 것이다. 다음은 바로 그때 작성한 문서인데, 작성 시기는 1584년(선조 17) 3월이었다.

만력(萬曆) 12년 갑신(甲申) 3월 24일에 3촌 조카 훈련봉사(訓鍊奉事) 박의장에게 (재산을) 별급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104)『고문서 집성』 82, 한국학 중앙 연구원, 2005, 192쪽. 내가 적자녀가 없어서 너를 3세에105)원문에는 ‘칠 세(柒歲)’로 되어 있으나 다른 문서 등에는 ‘삼 세(參歲)’로 되어 있어서 여기에서는 후자를 따랐다. (나의 집으로) 데리고 와서 길렀는데 처음에는 법에 따라 계후를 삼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네가 장성한 후에는 양자 삼기 위해 국왕에게) 두 차례나 상언(上言)을 하였으나 네가 다른 사람의 큰아들이라는 이유로 해당 부서(예조)에서 (국왕에게) 보고를 하지 않아 (너를) 후계자로 삼지 못하였다.

그런데 (후에) 첩의 자녀가 (태어나) 나이가 점차 많아졌을 뿐만 아니라 지금 (조정에서) 국법에 따라 서자들도 납속하면 벼슬살이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적자녀와 (같이) 해주겠다고 한다. (비록 첩 소생일지라도) 자녀가 있음에도 (너를 별도로) 시양자(侍養子)로 칭하며 (아들로) 아울러 두는 행위 는 (내가) 무과 출신의 조정 관리(朝官)이기 때문에 (훗날) 물의(物議)를 빚을 가능성이 있고 또 사체(事體)도 구차하니 (그렇게 하기가) 극히 어렵다. 따라서 은의(恩義)를 끊고 파양하여 (본가로) 돌려보내는 것이 편리하고 합당하다고 영일에 사는 계씨(季氏, 박의장의 생부)가 충정(衷情)으로 (나에게 거듭) 요청하고 나 역시 다른 사람의 자식으로 무과에 합격하여 벼슬살이를 하는 너를 (시양자로) 고집할 수 없다. 일의 형세가 과연 (이와 같이) 난처하기 때문에 (너를) 시양자에서 파양하여 본가로 돌려보내달라는 (영일 계씨의) 요청을 허락한다.

(다만) 20여 년 동안 솔양(率養)한 정은 부자간과 같고 은애(恩愛)가 무겁고 크기 때문에 네가 장가들었을 때 신노비(新奴婢)로 지급하였던 사내종 사중(四中)의 2소생……과 또 네가 무과에 합격하였을 때 별급하였던 계집종 잉읍덕(仍邑德)의 1소생……과 조자(調字) 논 14복 8속…… 및 계집종 춘옥(春玉)의 2소생 계집종 개복(介福) 등을 후소생(後所生)과 아울러 영영 허급(許給)하니 (후에) 나의 자식 등이 (이를 탐내어) 다툼을 일으키거든 이 문서의 내용에 의거하여 관에 고발하여 바로잡을 일이다.

자필 절충장군(折衝將軍) 경상 좌도 수군절도사 박(수결)

증인 동생제(同生弟) 전(前) 내섬시 봉사(內贍寺奉事) 박(수결)

증인 5촌 조카 전 월송포 만호(月松浦萬戶) 박(수결)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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