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8권 고문서에게 물은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
  • 제2장 가족과 친족 생활
  • 3. 가계의 운영
  • 조선 전기
  • 절수를 통한 재산 증식
전경목

김개와 김경순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섬진강과 금강의 상류 지역에서 축보작답을 하는 한편, 주인 없는 진황지(無主陳荒地)를 개간하여 농장을 만들고 관개 농업을 실시하는 방식으로 재산을 크게 늘렸다. 아울러 그들은 또 절수(折受)라는 방식을 통해 재산 증식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절수란 어느 한 개인 또는 단체가 공유지나 황무지 등에 대한 점유권이나 이용권을 관으로부터 공인받는 제도였는데, 이는 황무지 등을 개간하기 이전에 관으로부터 점유권 등을 확실히 보장받기 위해서 자주 이용되었다. 김경순은 부안현으로부터 주을래리 근방의 토지와 해안 등을 절수받아 보를 쌓고 농장을 만든 다음 사람들을 불러들여 마을을 조성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반동 부안 김씨 가문에 전하는 족보를 살펴보면 “공(公:김경순)이 줄포(茁浦)에 저수지를 쌓고 처음으로 인가(人家)를 불러들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이에 관한) 입안이 전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112)『부안 김씨 대보(扶安金氏大譜)』 하, 부안 김씨 대보소(扶安金氏大譜所), 1981, 11쪽. 그가 1577년(선조 10)에 부안현에서 발급받은 입안 두 종(種)이 각기 청원서 등과 연접(連接)된 상태로 그의 후손가에 전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마을의 형성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내용이 난해한 데에다가 보전 상태마저 양호하지 않아 당시의 상황을 완전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우선 이 문서의 앞부분에 있는 청원서와 입안을 의역(意譯)하면 다음과 같다.

건(선에 사는 김경순)113)이 입안은 그동안 발굴되지 않았던 것이므로 인용된 부분의 원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乾[先接金景順]/右謹言[所志]矣段[……保南四作木字丁龍頭以]都邑知串良中退計十餘年間/鮑作金內卩金等亦入接爲……他官移居同處十餘結量空基爲/白有仍乎等用良蒙利爲白[良結]望良白去乎依他立案[成給爲白]只爲/行下向敎是事 / 兼官主 處分 / 萬曆五年四月[日所志] / (題辭) 依施 十三 戶 / (押) / 萬曆五年四月日扶安縣兼任/古阜[郡立案]/右立案[折給]事粘連所志是/置有亦向前望呈爲有在保南四/作木字丁龍頭以都邑知串鮑作/金內懟金等空基十餘結量乙狀者/亦中[蒙利]次以折給爲遣合行/立案[者] / 行郡守(押).”

이와 같이 삼가 청원서를 올리는 사연은 다음과 같습니다. 보남(保南) 4작(作)인 정용두이(丁龍頭以)와 도읍지곶(都邑知串)에 지난 10여 년간 포작(鮑作) 김내은쇠(金內卩金) 등이 들어가서 (집을 짓고 살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부득이한 사정으로 이들이) 다른 고을로 이거(移居)해 버려 그들이 살던 곳 10여 결(結)가량이 (현재) 빈 터로 (방치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몽리(蒙利)를 위해 (이 땅을 절수 받기) 바라오니 다른 사례에 의거하여 입안을 성급해 주시기 바랍니다.

명령하옵실 일입니다.

겸성주께서 처분해 주실 일입니다.

만력 5년 4월 일 소지

(제사) 청원한 대로 시행할 일이다. 13일. 호방(戶房).

만력 5년 4월 일 부안현 겸임고부군(兼任古阜郡) 입안

이 입안은 절급(折給)에 관한 것이다. 점련(粘連)한 청원서에 의거해서, 앞에서 청원한 보남 4작 목자(木字)의 정용두이와 도읍지곶에 포작 김내은쇠 등(이 살았던) 빈터 10여 결을 청원한 사람에게 몽리를 위해 절급하고 합당한 절차에 따라 입안을 발급한다.

행군수(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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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력 5년 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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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청원서와 입안에 따르면, 보남 4작의 정용두이와 도읍지곶이라는 곳에 포작 김내은쇠 등으로 하여금 10여 년 전부터 들어가 집을 짓고 살게 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른 지방으로 이거하였다고 한다. 그들이 이거한 이유는 밝혀져 있지 않으나 아마도 집을 짓고 농지를 개간하는 일이 너무 고되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사실을 안 김경순은 부안현에 청원서를 제출하여 그들이 이사한 후 아무도 살지 않아 황무지로 변해 가는 집터와 텃밭 등 10여 결을 입안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당시의 부안현감은 마침 공석 중이어서 인근 고을의 수령인 고부군수가 이를 겸직하였는데, 그 는 이 청원서를 살펴본 후 호방에게 청원한 대로 입안을 발급해 주도록 조처하였다.

<표> 우반동 부안 김씨가 임진왜란 직후부터 인조 연간까지 구입한 토지 목록
번호 시기 방매자 매득자 소재지 면적 가격 비고
1 1593년(선조 26) 사노(私奴)
길동(吉同)
사노 아산(牙山) 보남 4작 미상 정조(正租)
5섬
No. 3
2 1594년(선조 27) 김두리동
(金豆里同)
비(婢) 은향(恩香) 11마지기 목면(木綿)
45필
No. 4
3 1595년(선조 28) 최성호(崔聲浩) 김경수(金景壽) 30짐 6줌 목면 35필 No. 5
4 1596년(선조 29) 김돌명(金乭明) 17짐 정조 6섬 No. 7
5 1601년(선조 34) 조이(召史) 노(奴) 돌세(乭世) 11마지기 목면 10필 No. 8
6 1604년(선조 37) 오영록(吳永祿) 김금산댁(金錦山宅)
노 헌세(奴獻世)
보남 3작 7마지기 세목(細木)
6필
No. 9
7 1619년(광해군 11) 유온(庾溫) 미상 보남 4작 15마지기 목면 60필 No. 10
8 1621년(광해군 13) 공동(孔同) 김담양댁(金潭陽宅)
노 헌세(奴獻世)
27짐 목면 30필 No. 11
9 승(僧) 덕영(德英) 보남 6작 8마지기 목면 15필 No. 12
10 허구관(許九觀) 김경수 보남 4작 4마지기 목면 12필 No. 13
11 1622년(광해군 14) 최응춘(崔應春) 김사과댁(金司果宅)
노 상□(奴上□)
22짐 6줌 목면 16필 No. 14
12 1632년(인조 10) 고인세처 비 고덕
(故仁世妻 婢古德)
미상 7마지기 목면 10필 No. 15
13 1636년(인조 14) 유성민(柳成民) 김홍원(金弘遠) 우반(愚磻) 장천 동쪽
(自川以東)
목면 500필 No. 16
✽비고란의 No.는 토지 문기 번호임.

김경순은 이와 같이 부안현으로부터 정용두이와 도읍지곶을 절수받은 후 이곳에 둑을 쌓아 농장을 만들고 사람을 불러들여 마을을 이루며 살려고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후손들이 이 주위의 토지를 집중적으로 매입하였다는 점을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입증된다. 표 ‘우반동 부안 김씨가 임진왜란 직후부터 인조 연간까지 구입한 토지 목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의 후손들은 임진왜란 직후에 많은 토지를 사들이는데, 이 토지의 대부분이 도읍지곶이 있던 보남 4작에 있었다.114)전경목, 『고문서를 통해서 본 우반동과 우반동 김씨의 역사』, 신아 출판사, 2001, 63쪽 참조. 따라서 김경순에 관한 족보의 기록이 대부분 사실임을 알 수 있다.

김경순은 또 주을내(注乙內)의 해안 지역도 관(官)에서 절수를 받아 점유하였다. 이와 관련된 청원서와 입안을 먼저 살펴보자.

건선면에 사는 김경순이 올립니다.115)이 문서는 어찌된 영문인지 『부안 김씨 우반 고문서』에는 누락되어 있다. 이 문서에 관해서는 전경목, 앞의 책, 325∼327쪽 참조.

이와 같이 삼가 청원서를 제출하는 사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제가 전에) 주을내 포구(浦口)의 자라도(者羅島), 이문강(以文强), 우노(隅老), 독암(獨岩), 이분가전(李分家前) 등의 해변 30여 결을 몽리를 위해 지난 10여 년간 청원서를 올려 (점유를 인정하는) 입안을 받았는바, 법에 의거해서 입안을 고쳐서 (그 기간을 연장하고자) 하오니 점련된 입안을 살펴보시고 입안을 고쳐서 발급해 주시기 바랍니다. ……

만력 5년 4월 일

(처분) 살펴서 시행하라. 13일. 호방(戶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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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력 5년 입안
만력 5년 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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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력 5년 4월 일 부안현겸임고부군(扶安縣兼任古阜郡) 입안

다음의 입안은 상고(相考)와 관련된 일이다. 점련된 입안에 있는 바와 같이 같은 고을의 주을내 포구의 자라도, 이문강, 우노 및 독암, 이분가전 등의 해택(海澤) 30여 결을 (다시 점유할 수 있도록) 입안을 고쳐 발급하니 입안에 따라 합당히 시행할 것

행군수(압)

이 청원서와 입안에 따르면 김경순은 이미 10여 년 전부터 건선면의 주을래리 포구 중 자라도 등을 비롯하여 30여 결이나 되는 드넓은 해안 지역을 점유해 오고 있었는데 이 점유 기간을 연장하기 위해 청원서를 제출하였던 것이다. 주을래리는 현재 줄포리(茁浦里)인데 부안군 보안면에 속해 있다. 이 청원서를 살펴본 겸임고부군수는 호방에게 입안의 내용을 조사하여 연장해 주도록 지시하였다. 이 입안에 점련되어 있는 문서들을 살펴보면 김경순은 2년 후인 1579년(선조 12)과 다시 10년 후인 1589년(선조 22)에 기간을 거듭 연장하는 청원서를 올렸다. 그는 이와 같이 관에서 입안을 받아 주을래리의 해변을 점유하고서 여기에서 김과 전복 등을 채취하고 해변에 어살(漁箭) 등을 설치하여 물고기를 잡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종의 사유 어장(漁場)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그의 후손가에 전하는 문서들을 살펴보면 그의 후손들은 때때로 중앙의 고위 관리나 서울의 친지에게 김, 전복, 홍합 등과 같은 해물을 선물하였는데, 이러한 해물은 바로 이 어장에서 마련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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