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8권 고문서에게 물은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
  • 제2장 가족과 친족 생활
  • 4. 친족 조직과 활동
  • 동성 마을의 형성
전경목

이제 문중을 중심으로 한 친족 조직과 그 활동에 대해 살펴보자. 그런데 이를 살펴보기 이전에 동성 마을의 형성에 관해 잠깐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해서 앞서 소개한 김명열이 그의 두 아들인 김번과 김문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면서 작성한 문서를 보자. 이 문서는 1678년(숙종 4) 7월에 작성한 것인데, 이때는 김문이 사망한 후였기 때문에 그의 아내인 우봉이씨(牛峰李氏)가 이 재산 분배에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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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戊午) 7월 초 1일 별득한 우반전민을 나누고서 작성한 화회성문(和會成文)121)『부안 김씨 우반 고문서』, 210∼211쪽, 분재기류 27.

문서를 작성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반동에 있는 전답과 노비를 (아버지께서) 우리 형제에게 문서로 작성하여 특별히 나누어 주셨기 때문에 전적으로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우리 두 형제가) 균등히 나누어 가진다. 평소 말씀 중에 이 전답과 노비는 딸에게는 절대로 나누어 주지 말고 (오로지) 아들에게만 대대로 전해 주라고 하셨으므로 나의 후손들도 역시 이로써 정식(定式)을 삼아 대대로 지켜 나가도록 하라. 만일 이 지시를 어긴다면 (누가 나에게) 자손이 있다고 말할 것인가. 각별히 거행하도록 하라.

장(長) 통덕랑(通德郞) 김번(수결)

계(季) 선교랑(宣敎郞) 김문의 아내 이씨(李氏)

이 분재기를 통하여 알 수 있듯이 김명열은 우반동의 토지와 노비를 아들들에게만 나누어 주도록 하고 딸들, 즉 사위들에게는 절대로 주지 말라고 유언하였다.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김명열이 이 우반동을 자신들의 동성 마을로 만들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딸, 즉 사위가 들어와서 살면 동성 마을을 구성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지시를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종법을 철저히 준수하여 자신의 가문에서는 사위와 외손에게 제사를 윤행하지 못하도록 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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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번 분재기
김번 분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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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열은 오랜 기간 동안 관직 생활을 하다가 늙어서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우반동을 자신의 후손들만이 모여 사는 동성 마을로 만들고 싶어하였다. 그러나 그는 나이가 너무 연로한 데다 관직을 마치기 전에 아내마저 사망하였기 때문에 혼자서 우반동으로 이거할 수 없었다. 그가 관직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아들에게 얹 혀서 사는 신세였다. 물론 그가 사망하기 직전의 준호구를 살펴보면, 그의 이름이 호주로 당당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재산을 아들과 며느리들에게 이미 넘겨주고 부양(扶養)을 받는 처지였다. 그래도 그는 우반동을 동성 마을로 만들려는 꿈을 버릴 수 없었다. 다음의 분재기를 보면 비록 겉으로 분명히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김명열의 이러한 처지와 염원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이 분재기는 그가 동생들과 함께 상의하여 장차 딸들에게는 조상의 제사를 돌리지 말고 아울러 재산도 아들 몫의 3분의 1만 주도록 당부한 바로 그날, 즉 1669년(현종 10) 11월 11일에 작성한 것이다. 이날 작성한 전후 문서와 함께 이 분재기를 읽어 보면 행간(行間)에 숨어 있는 김명열의 처지와 염원을 확연히 읽을 수 있다.

기유년(己酉年) 11월 11일 장자 번(璠)과 말자 문(璊)에게 특별히 재산을 주면서 작성한 문서122)『부안 김씨 우반 고문서』, 205∼206쪽, 분재기류 18.

문서를 작성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내가 너희 형제를 늦게 얻어 매우 사랑하였는데, 너희는 사람됨이 선량하여 나를 봉양하는 동안 조금도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 (거기다) 모두 문재(文才)까지 있으니 장차 크게 되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불행하게 너희 모친이 몹쓸 병에 걸려 여러 해 동안 앓더니 마침내 (얼마 전에) 일어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나는 지금 노쇠한데다가 홀아비로 살고 있어서 집안을 거느리기가 어렵다. (그래서 너희 두 형제에게) 각각 가산을 나누어 주어 조상의 제사를 받들고 나의 남은 여생을 봉양하도록 노비와 전답을 불가불 별급 형태로 나누어 준다.

내가 별득(別得)한 우반의 전답과 사내종 가지(加之)의 양처 병산(良妻幷産) 사내종 명산(名山)…… 등 노비를 아울러서 별급한다. 전답은 씨앗 뿌리는 가마니 수(落種石數)를 모두 계산해서 절반으로 나누어 가지고 노비는 장약(壯弱)을 셈해서 상의해서 균분(均分)하되 절대로 그 튼실하고 튼실치 않음을 비교하여 다투지 마라. 훗날 분재할 때 (이 재산을) 다시 거론하지 말아서 이 노비와 전답을 별급한 재산으로 취급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렇게 재산을 나누는) 나의 뜻은 깊이 생각하여 결정한 것이며, 또 (후손들에게 이를 준수하도록) 거듭 당부하는 것은 자필로 쓴 이 문서를 보면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진외(眞外) 자손 중에서 혹시 잡담하는 사람이 있거든 이 문서를 한 번 보여 주어 번거롭게 소송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라.

자필 재주(自筆財主) 통훈대부행평산부사 김(수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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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열 분재기
김명열 분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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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번은 부친 김명열이 사망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우반동으로 이거하였는데, 그것은 부친의 이러한 열망에 부응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명열이 사망한 것은 1672년(현종 13) 이후이며,123)김명열이 사망한 해는 확실하지 않다. 근래에 간행된 족보에는 1667년(현종 8)에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1672년(현종 13) 정월 11일에 손자 김수종이 돌을 맞이하자 축하하는 의미에서 약간의 재산을 나누어 주고 있다. 또 같은 해 8월에 부안현에서 발급한 준호구를 살펴보면, 그는 60세의 노인으로 두 아들 김번과 김문을 거느린 채 건선면(乾先面) 주래리(注萊里)에서 살고 있었다. 따라서 김명열은 1672년 8월경까지 분명히 생존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부안 김씨 우반 고문서』, 203∼204쪽, 분재기 11∼12와 28쪽, 호구 단자 준호구 1 참조. 김번이 우반동으로 이거한 시기는 1675년(숙종 1)에서 1678년(숙종 4) 사이이다.124)『부안 김씨 우반 고문서』, 28∼30쪽, 호구 단자 준호구 2∼3 참조. 따라서 시기상으로 보아 김번은 아버지의 상(喪)을 마치자마자 유언에 따라 우반동으로 입거(入居)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김번의 후손들은 결국 우반동을 부안 김씨 동성 마을로까지 만드는 데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그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자손이 수적으로 번성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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